3화
‹ ›딸랑, 휴대폰 진동이 울리는 소리에 손끝이 먼저 움직였다. 화면에 뜬 '세아'라는 이름을 확인하자마자 심장이 쿵, 아래로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 시간에 전화가 올 리가 없는데. 받자마자 들려오는 숨소리부터 이상했다. 헐떡이는 듯한, 참으려 애쓰는 듯한 그 숨소리에 나는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어디야, 지금 어디 있는지 말해봐." 나는 신발을 신으며 다급하게 물었다. 한쪽 발을 구겨 넣으면서도 손은 이미 겉옷을 낚아채고 있었다. 세아의 목소리는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고, 그 떨림이 수화기를 타고 그대로 전해져 왔다. "한강공원…… 반포 쪽이요. 저 벤치에 앉아 있는데 아까부터 계속 같은 사람이 저를 쳐다보면서 따라와요."
목소리 끝이 흐려지며 울음이 섞였다. 나는 대답 대신 곧장 현관문을 박차고 나가 계단을 두 개씩 건너뛰며 내려갔다. 큰길로 나서자마자 손을 흔들어 택시를 잡았다. 택시 기사가 뭐라 말을 걸었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반포 한강공원, 빨리요." 그 말만 겨우 뱉었다.
창밖 풍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동안 통화는 끊지 않았다. "소리 지르지 말고, 최대한 사람 많은 곳으로 이동해. 지금 갈게." 말은 담담하게 했지만 속으로는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 휴대폰을 쥔 손이 미끈거렸다. 세아는 대답 대신 흐느끼는 숨소리만 내고 있었다. "세아야, 듣고 있어? 대답해." 재차 물으니 겨우 "네……"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왜인지 모르게 예전 일이 자꾸 겹쳐 떠올랐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가로등 불빛이 눈앞에서 번쩍거릴 때마다, 그날 밤 병원 복도의 형광등 불빛이 떠올랐다.
어릴 적, 부모님이 타고 있던 차가 빗길에 미끄러져 반대편 차선으로 넘어갔다던 그 밤. 나는 그날의 사고를 직접 본 것도 아니면서 이상하게도 늘 그 장면을 생생하게 상상하곤 했다. 와이퍼가 미친 듯이 움직이는 앞유리, 헤드라이트가 순식간에 커지는 순간, 쇳덩이가 부서지는 소리까지도 마치 내가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재생됐다. 전화벨이 울리고, 낯선 목소리가 사고 소식을 전하고, 병원 복도에서 형광등 불빛 아래 주저앉아 있던 스무 살의 내가 있었다. 엄마, 일어나…… 그 말을 몇 번이고 되뇌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손을 뻗어 엄마의 손을 잡았을 때 이미 그 손은 온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누군가를 지키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공포를 마음 깊은 곳에 박아두고 살았다. 그 공포는 시간이 지나도 무뎌지지 않고, 오히려 소중한 사람이 하나둘 생길 때마다 더 날카롭게 벼려졌다.
택시가 공원 입구 근처에 멈추자마자 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요금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지폐 몇 장을 던지듯 건넨 뒤 곧장 달렸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멈추지 않았다. 가로등이 드문드문 서 있는 산책로를 따라 눈을 굴리며 벤치를 하나씩 훑었다. 저기, 저 멀리 웅크리고 앉은 작은 형체가 보였다. 세아였다.
벤치에 웅크리고 앉은 세아를 발견한 순간, 그 옆에 서 있는 남자의 뒷모습도 함께 눈에 들어왔다. 중년의 체형에 회색 점퍼, 짧게 깎은 머리. 손에는 담배를 들고 있었는데, 그 담배 끝이 세아의 팔 근처를 위협적으로 흔들고 있었다. 남자의 어깨는 넓고 두꺼웠고, 벤치에 앉은 세아는 그 옆에서 더욱 작아 보였다. 마치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도망칠 곳을 찾지 못한 채 몸을 최대한 움츠리고 있었다.
"저기요." 나는 성큼성큼 다가가며 낮게 소리쳤다. 발소리가 다가오자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그 눈빛이 뱀처럼 차갑고 끈적하게 나를 훑었다. 위에서 아래로, 다시 아래에서 위로. 마치 상대가 어느 정도 위협이 될지 재는 눈빛이었다. "뭐야, 넌." 그가 이죽거리며 물었고, 나는 세아 앞을 막아서며 그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세아의 어깨가 내 등 뒤에서 미세하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이 아이 삼촌인데요.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남자는 잠시 나를 재보듯 훑더니 피식 웃었다. 입가에 걸린 그 웃음이 소름 끼치도록 여유로웠다. "삼촌? 그치. 애가 먼저 만나달라고 글을 올렸는데, 그게 뭔 죄야." 느끼하게 늘어지는 말투에 속에서 뭔가가 뜨겁게 치밀어 올랐다. 세아를 흘끔 보니, 그녀는 벤치 끝에 몸을 최대한 움츠린 채 금붕어처럼 뻐끔거리는 입술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눈에는 이미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고, 손은 무릎 위에서 하얗게 질려 있었다.
"애 앞이니까 조용히 말할게요. 지금 당장 꺼지세요." 내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남자, 박기석이라는 이름은 나중에 알게 됐지만 그 순간엔 그저 짐승 같은 존재로만 보였다. 눈빛도, 몸에서 풍기는 담배와 술이 섞인 냄새도, 전부 들개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가 담배를 든 손을 슬쩍 들어 올리며 내 쪽으로 한 발 다가섰다. "어린애 앞에서 어른한테 이러는 거 아니지 않나? 응?" 감탄사 하나를 붙이는 것만으로도 불쾌감이 배로 늘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손목을 붙잡아 비틀었다. 담배 불씨가 그의 손등에 닿으며 지글거리는 소리가 났고, 그가 짧게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로 뺐다. "아악, 이 새끼가!" 그가 욕을 뱉으며 나를 향해 팔을 휘둘렀지만, 나는 그 팔을 손쉽게 피하며 그의 어깨를 눌러 벤치 옆 화단에 밀어붙였다. 흙바닥에 무릎이 닿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경찰 부르기 전에 사라지세요." 나는 그의 귀에 낮게 속삭이듯 말했다. 목소리는 나지막했지만 그 안에 담긴 서늘함은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박기석은 잠시 나를 노려보다가, 옷에 묻은 흙을 털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결국 욕설을 몇 마디 더 뱉으며 자리를 떴다. 걸음걸이는 느릿했지만 뒤돌아보는 눈빛만은 여전히 끈적했다. 그의 뒷모습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걸 지켜보며 나는 그제야 숨을 몰아쉬었다. 참고 있던 숨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면서 다리에 힘이 풀렸다.
세아가 벤치에서 일어나 나를 올려다봤다. 그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감사합니다."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손가락 끝이 아직도 미세하게 떨리는 게 보였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살짝 두드리며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 "괜찮아. 이제 안 와."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알고 있었다. 저런 부류의 인간이 이렇게 쉽게 물러날 리 없다는 걸. 어둠 속으로 사라진 그 뒷모습이 다시 나타날 거라는 불길한 예감이, 목덜미를 스치는 서늘한 바람처럼 자꾸만 등골을 타고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