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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그날 밤 나는 잠을 거의 못 잤다. 천장을 보고 누워서 생각을 정리해보려 했지만, 정리라는 게 되질 않았다. 서하은의 요구는 취향이라고 부르기엔 지나치게 구체적이었고, 그 애가 던진 협박은 결코 가벼운 무게가 아니었다. 청람여고 서열 1위, 라는 말이 진짜인지 허풍인지 판단할 근거도 없었다. 다만 그런 걸 확인해볼 방법이 딱 하나 있긴 했다. 학교 유도부에는 별의별 학교 소문이 다 모인다. 남고 유도부 담당 보건교사라는 자리가 은근히 정보의 허브 역할을 한다는 걸, 나는 이번에 처음 깨달았다. 새벽 세 시쯤엔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이 모든 게 그냥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눈을 뜨면 서하은도, 협박도, 그 서늘한 목소리도 다 없었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눈을 뜨나 감으나 천장은 그대로였고, 시계는 냉정하게 4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퀭한 얼굴로 보건실에 앉아 오태호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커피 두 잔을 연달아 마셨는데도 머리가 맑아지질 않았다. 오태호는 유도부에서 제일 입이 가볍고, 동시에 제일 정보가 빠른 놈이었다. 이럴 때 쓰라고 있는 인맥이었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파스를 받으러 온 오태호를 붙잡았다. "오태호, 청람여고에 서하은이라는 애 알아?" 순간 오태호 얼굴이 하얘졌다. 파스를 쥔 손이 살짝 떨리는 것까지 보였다. "서하은이요? 선생님이 걔를 어떻게 알아요?" 목소리가 한 톤 올라갔다.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그냥 좀 아는 사이가 됐는데." "선생님, 그거 큰일 나요." 오태호가 목소리를 낮췄다. 유도부 특유의 큰 몸으로 그렇게 조심스러운 몸짓을 하는 게 어색해 보였다. 백 킬로 넘는 덩치가 문 쪽을 힐끗거리며 목소리를 죽이는 모습은 어딘가 코미디 같기도 했는데, 웃을 상황이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걔 진짜 무서운 애예요. 저희 반 애가 걔한테 걸려서 한 달 동안 학교도 못 나왔어요." "뭘 어떻게 했는데?" "그건 몰라요, 아무도 얘기 안 해줘서. 근데 걔 눈에 든 애들은 다 이상하게 됐다는 얘기는 있어요." "이상하게 된다는 게 정확히 뭔데." "그걸 모른다니까요. 그냥... 눈빛이 달라지고, 말도 잘 안 하고, 어느 날 갑자기 전학 가버리고. 그런 식이에요." 좋은 정보라고 해야 할지 나쁜 정보라고 해야 할지 판단이 안 섰다. 구체적인 게 하나도 없으면서 동시에 소름은 확실하게 돋았다. 이런 식의 소문이 제일 무섭다.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 상상만 커진다. "선생님, 근데 진짜 왜 물어요? 설마 걔랑 뭐 있어요?" "아니야. 그냥 이름만 들어서."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다행이다 싶었지만, 곧 취소해야 했다. 이 거짓말이 오늘 오후에 바로 들통날 예정이었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다만 확실한 건, 이건 단순한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 문제는 그날 오후 벌어졌다. 보건실에 다른 유도부원이 찾아와서 파스를 받아 가면서 뭔가를 흘렸다. 이름은 기억 안 나는데, 어깨가 유난히 넓고 목소리가 큰 놈이었다. "선생님, 그런데 청람여고 걔랑 되게 자주 얘기하시던데요." "뭐?" 파스 상자를 놓칠 뻔했다. "어제 창문으로 봤어요. 서하은이랑. 저희끼리 얘기 다 됐어요, 선생님 뭔가 있다고." "뭔가 있다는 게 뭔데." "에이, 뭔지는 저희도 모르죠. 그냥 재밌잖아요, 상상하는 거." 재밌다고. 남 인생 망가지는 걸 재밌다고 표현하는 열일곱짜리의 사고방식이 새삼 낯설게 느껴졌다. 내가 열일곱 살 때는 이 정도로 잔인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아니, 어쩌면 나도 이 정도로 잔인했을지도 모른다. 순간 뭔가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이건 배신이라기보다는 무심함이었다. 학생들은 아무 생각 없이 던진 한마디였겠지만 나한테는 결정타였다. 소문이 퍼지면 학교 안에서 내 입지가 위험해진다. 청람여고 서열 1위와 은밀한 거래를 하는 보건교사, 그런 소문이 학부모 귀에 들어가는 순간 내 자리는 끝이다. 계약직 보건교사한테 그런 소문 하나면 재계약이고 뭐고 없다. 그냥 끝이다. "그런 거 아니야. 상담 온 거야." "에이, 상담을 왜 방과 후에 몰래 해요." 웃으며 던진 말이었지만 나는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손끝이 시린 게 이 계절 탓인지 긴장 탓인지 구분이 안 됐다. 이건 강제적인 결단의 순간이었다. 서하은의 요구를 계속 들어줄지, 아니면 지금이라도 손을 뗄지.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렸다. 계속 들어주면 매번 뭘 요구할지 모른다는 불안이 쌓이고, 지금이라도 끊으면 협박이 실제로 실행될 위험이 있다. 둘 다 나쁜 선택이었다. 그중에 덜 나쁜 걸 골라야 했다. 손을 떼려면 방법이 있어야 했다. 서하은은 협박까지 하는 상대다. 단순히 거절한다고 끝날 관계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는 결심을 굳혔다. 지금 끊지 않으면 나중에 더 큰 대가를 치를 것 같다는 예감이 강했다. 이런 예감은 대체로 맞는다는 게 문제였지만. 방과 후, 나는 결심을 하고 보건실 문을 잠갔다. 아무도 못 들어오게. 서하은이 오면 이번엔 확실히 선을 그어야 했다. 책상 위에 물을 한 잔 떠다 놓고 앉았다. 마시지도 않을 물이었는데 그냥 뭔가 손에 쥐고 있어야 마음이 놓였다. 시계를 몇 번이나 확인했는지 모른다. 방과 후 종이 친 지 십 분, 이십 분. 서하은이 안 올 수도 있다는 생각도 잠깐 들었지만, 그 애가 그런 애일 리 없다는 확신이 더 강했다. 예상대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정확히 방과 후 삼십 분이 지난 시각이었다. 시간까지 딱 맞춰 오는 그 규칙성이 오히려 더 소름 끼쳤다. "선생님, 문 왜 잠기셨어요?" 목소리에 아무 놀람도 없었다. 이미 예상했다는 투였다. 어쩌면 문을 잠글 거라는 것까지 계산에 넣었던 건지도 모른다. 나는 문을 열지 않았다. 대신 문에 등을 기대고 서서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를 냈다. "서하은씨, 저는 이 거래 여기서 그만하고 싶습니다." 문 너머에서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 몇 초가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심장이 문짝을 뚫고 나갈 것처럼 뛰었다. "···진심이세요?" "진심이에요. 이건 너무 위험한 일이에요. 저는 학생들 사이에서 소문이 돌기 시작했어요. 이대로 가면 제 자리가 위태로워질 거고요." 말을 뱉으면서도 이게 얼마나 옹색한 변명인지 스스로 느꼈다. 소문이 두려운 게 아니라 그 애 자체가 두려운 거였는데, 그 말은 도저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또 침묵. "알겠어요." 의외로 순순한 대답이었다. 나는 오히려 그게 더 불안했다. 순순하다는 것 자체가 함정처럼 느껴졌다. 이 애가 순순히 물러날 리가 없다는 직감이, 근거는 없어도 확신에 가까웠다. "대신, 선생님." "···네?" 목소리가 살짝 떨렸던 것 같다. 부끄럽지만 사실이다. "오늘 밤 우편함 확인해보세요." "우편함이요? 왜요?" 대답이 없었다. 발소리가 멀어졌다. 복도 저편으로 사라지는 그 발소리가 유난히 또각또각 규칙적으로 들렸다. 나는 한참을 문에 등을 붙이고 서 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그대로 미끄러져 앉을 뻔했다. 이겼다고 해야 할지, 진 거라고 해야 할지 판단이 안 섰다. 형식적으로는 내가 거래를 끊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지. 그날 밤, 나는 학교 앞 우편함 대신 내가 세 든 원룸 현관 앞 상자를 발견했다. 보낸 사람 이름은 없었다. 원룸까지 어떻게 왔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버스를 탔던 것 같은데, 창밖으로 지나가는 간판들을 하나도 눈에 담지 못했다. 머릿속엔 계속 그 말만 맴돌았다. 우편함 확인해보세요. 왜 학교 우편함이 아니라 내 집 앞이란 말인가. 내 원룸 주소를 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선을 넘은 일이었다. 상자는 그리 크지 않았다. 신발 상자 정도 크기였고, 겉면엔 아무 표시도 없었다. 테이프로 대충 봉해져 있었는데, 그 테이프를 뜯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상자를 열자마자 나는 이게 뭔지 바로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게 대체 왜 여기 와 있는지, 이해하는 데는 조금 더 시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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