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홍대 거리의 밤은 화려한 만큼 차가웠다. 네온사인이 젖은 아스팔트 위에 붉고 푸른 빛을 흩뿌리는 동안에도, 나는 벤치 구석에 몸을 웅크린 채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캐리어 바퀴 굴러가는 소리,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아이돌 노래 같은 것들이 뒤섞여 마치 다른 세계의 소음처럼 멀게 들려왔다. 겉으로는 그냥 잠깐 쉬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려고 애썼지만, 속으로는 이 벤치가, 이 골목이, 이 도시 전체가 나를 밀어내고 있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바람이 한 번 훅 불어오자 얇은 니트 사이로 한기가 스며들었다. 원래 이 옷은 라이브 방송에서 협찬받은 거였는데, 그때는 스튜디오 조명 아래서 예쁘게만 보이던 이 옷이 지금은 그저 얇디얇은 천 쪼가리에 불과했다. 나는 무릎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 다리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 게 느껴졌지만 딱히 옮겨갈 곳도 없었다.
배터리가 12퍼센트 남은 휴대폰 화면 속에서, 마지막으로 저장된 가족사진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아빠, 엄마, 나. 셋 다 웃고 있는데 나는 지금 여기 이러고 있다는 게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사진 속 나는 데뷔 초에 찍은 거였는데, 볼이 지금보다 훨씬 통통했다. 그때는 매일 밥을 세 끼씩 챙겨 먹었고, 매니저 언니가 늘 도시락을 싸 들고 왔었고, 카메라 앞에서 웃는 게 일이었다. 그 웃음이 진짜였는지 가짜였는지는 이제 와서 헷갈렸지만.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나는 30만 팔로워를 거느린 인플루언서 '루비'였고, 강남 한복판의 펜트하우스에서 살고 있었다. 침대 옆에는 조명 스탠드가 세 개나 있었고, 화장대에는 협찬받은 화장품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으며, 매일 밤 방송을 켜면 채팅창이 폭포수처럼 쏟아지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뭐랄까... 벤치가 내 침대이고 편의점 온장고 앞이 내 부엌이었다. 그 낙차가 너무 커서 실감이 안 나는 건지도 몰랐다.
부모님은 회사가 부도났다는 소식이 뜨기 전날 밤 연락도 없이 사라졌고, 은행에서는 집을 압류했고, 나는 학교도 못 나가는 채로 그저 거리를 떠돌고 있었다. 처음 며칠은 친구네 집을 전전했지만, 소문이 도는 속도는 상상보다 훨씬 빨랐다. '루비네 집 망했대.' '걔 부모님이 사기 쳤다던데.' 그런 말들이 돌기 시작하자 친구들의 연락은 하나둘 끊겼고, 나는 결국 갈 곳을 잃었다. 그 사실을 곱씹을 때마다 속에서 뭔가가 울컥 올라오는데, 나는 그걸 애써 삼키며 무릎에 얼굴을 더 깊이 묻었다.
배가 고팠다. 정확히는 배가 고픈지 아닌지도 잘 모르겠는, 그런 이상한 상태였다. 어제 저녁에 삼각김밥 하나를 편의점에서 유통기한 임박 세일로 사 먹은 게 마지막이었나. 아니, 그전에도 뭘 먹었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배 속이 텅 빈 느낌인데도 이상하게 속이 메슥거렸고, 손끝은 계속 차가웠다.
삑—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팔로우 알림이었다. 요즘 팔로워가 늘어날 일이 있을 리 없는데, 나는 의아한 얼굴로 화면을 켰고, 거기엔 낯선 계정명이 하나 떠 있었다.
'미레님이 나를 팔로우하기 시작했습니다.'
미레... 어디서 들어본 이름 같았다. 나는 손끝이 저려오는 걸 느끼며 그 이름을 몇 번이고 되뇌었는데, 정확히 어디서 봤는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계정 프로필 사진은 작게 흐릿한 실루엣만 보였고, 팔로워 수도 게시물 수도 비공개로 되어 있어서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며칠 전, 마지막으로 라이브 방송을 켰던 그날 밤의 기억이 파편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날 밤, 채팅창은 미친 듯이 올라가고 있었다. 부모님 회사에 대한 기사가 막 뜨기 시작한 직후였고,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방송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도 손끝은 자꾸만 떨렸다.]
'루비야 요즘 괜찮아?' '아버님 회사 괜찮으신 거지?' 그런 걱정 어린 댓글들 사이로, 유난히 짧고 건조한 문장 하나가 스쳐 지나갔던 것 같았다. 정확히 뭐라고 적혀 있었는지는 이제 기억나지 않지만, 그 댓글을 남긴 닉네임이 지금 이 계정과 비슷했던가... 아니,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저 이상하게도 낯설지 않다는 느낌만이 남아 있었다.
그 계정 프로필 사진을 눌러보려는 순간, 화면이 뚝 꺼졌다.
탁.
배터리가 다 된 것이었다. 나는 까맣게 죽어버린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그대로 휴대폰을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손이 떨렸다. 배가 고파서인지, 추워서인지, 아니면 그 이름 하나 때문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가슴 한쪽이 저릿하게 조여왔다. 마치 뭔가를 놓친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그게 뭔지는 정확히 짚어낼 수가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벤치 맞은편에는 커플로 보이는 두 사람이 웃으며 사진을 찍고 있었고, 조금 떨어진 곳에는 술에 취한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들며 지나갔다.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았다. 당연했다. 후드를 눌러쓰고 벤치에 웅크린 여자애 하나쯤, 이 거리에서는 그저 흔한 풍경 중 하나일 테니까.
그때, 저 멀리서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발소리들과는 확실히 다른,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그 리듬이 이상하게 신경을 붙잡았고, 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가로등 빛을 등지고 걸어오는 사람의 실루엣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는데, 어깨선이 곧고 걸음걸이에 흔들림이 하나도 없는 게, 마치 이 거리의 소음과 혼잡함 따위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설마... 나를 보고 있는 건가.
처음엔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이 넓은 거리에서, 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 하필 나를 보고 걸어올 이유가 없었으니까. 나는 애써 시선을 피하며 다시 무릎에 얼굴을 묻으려 했지만, 그 구두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고, 이상하게도 방향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심장이 이상하게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나는 겨우 몸을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며칠째 제대로 먹지 못한 다리는 힘없이 후들거렸고, 결국 다시 벤치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손바닥에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도망쳐야 하나, 아니면 그냥 모르는 척 계속 앉아 있어야 하나, 머릿속이 뒤엉켰다.
그 사람의 구두 소리는 이제 바로 앞에서 멈춰 있었다.
우뚝.
숨소리조차 조심스러워질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나는 고개를 들지도 못한 채, 그저 그 사람의 발끝—광이 나는 검은 구두 끝—만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사람이 천천히 무릎을 굽혀 나와 눈높이를 맞추려 하는 게 느껴졌다.
"...루비 씨?"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내 이름을, 아니 내 활동명을 정확히 짚어 불렀다. 그 순간 나는 온몸의 피가 한꺼번에 얼어붙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