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닭 잡던 손에 검이 깃들다

1화

새벽 종소리가 울렸다. 댕. 댕. 댕. 청명문 잡역 숙소, 좁은 마당. 이도현은 물동이를 지고 서 있었다. 어깨가 뻐근했다. 물동이 하나가 이렇게 무거울 일인가. 전생에는 헬스장에서 이보다 무거운 것도 들었는데. 근데 지금 이 몸은 그때 그 몸이 아니었다. 스물여덟 살 인생 다 살고 눈뜬 몸은 열여섯이었다. 전생의 기억은 또렷했다. 야근하다 쓰러진 것까지는. 그다음은 여기였다. 낡은 목조 건물, 짙은 약초 냄새. 청명문. 무공을 가르친다는 종파. 그 안에서 가장 밑바닥, 학도 1급 잡역 제자. 이름값 그대로 최하급이었다. 이도현은 며칠 전 상황을 다시 떠올렸다. 정신을 차렸을 때 눈앞에 있던 건 낡은 천장이었다. 옆에서 누가 밥 먹으라고 소리쳤다. 그렇게 새 인생이 시작됐다. 처음엔 미친 줄 알았다. 근데 하루 이틀 지나니까 적응이 됐다. 사람이 무섭다. 적응력이 이렇게 좋을 일인가. 마당 한쪽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느긋하고 여유로운, 그래서 더 짜증나는 걸음걸이였다. 야, 신입. 강태오가 그를 불렀다. 학도 3급, 잡역 제자들 사이에서 대장 노릇을 하는 놈이었다. 뒤로는 늘 두세 명이 따라붙었다. 이도현은 물동이를 내려놓지 않고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못 들은 척 지나가면 그냥 넘어갈까. 그럴 리가 없지. 물 다 채웠으면 이리 와서 발이나 씻겨봐. 강태오가 발을 쭉 뻗었다. 낡은 나무 의자에 앉아서 팔짱까지 낀 채였다. 제가 왜요. 이도현이 되물었다. 뭐라고? 강태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말귀 못 알아들으세요. 제가, 왜, 그걸, 해요. 이도현이 또박또박 끊어서 말했다. 주위가 순간 조용해졌다. 바람 소리마저 잦아든 것 같았다. 무리 중 하나가 픽 웃었다. 저 새끼 오늘 죽으려고 환장했나. 다른 하나는 옆에서 팔꿈치로 쿡 찌르며 웅얼거렸다. 신입 저거 뭘 잘못 먹었나. 강태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발을 걷어찼다. 물동이가 그대로 넘어갔다. 촤아악. 물이 마당에 쏟아졌다. 흙바닥을 파헤치며 퍼졌다. 이도현의 신발이 흠뻑 젖었다. 발가락 사이로 차가운 물기가 스며들었다. 다시 떠 와. 강태오가 팔짱을 꼈다. 입가에 웃음기까지 걸려 있었다. 이도현은 물동이를 내려다봤다. 텅 빈 나무통 안쪽에 아직 물기가 남아 반짝였다. 전생 스물여덟 해를 살면서 별의별 상사를 다 겪었다. 회식 자리 강제로 앉히던 부장, 야근 시키고 퇴근 인사만 하던 팀장. 이 정도 진상은 명함도 못 낸다. 근데 여긴 신고할 노무팀이 없단 말이지. 억울하네, 이거. 어디 가서 하소연도 못 하고. 그때였다. 삐빅. [초급 현사 시스템이 최초 각성 조건을 감지합니다.] 귓가에 낯선 소리가 울렸다. 이도현은 눈을 껌뻑였다. 뭐야 이거. 주변을 둘러봤다. 아무도 못 들은 표정이었다. 나만 들리는 건가. [분노 지수 임계치 도달. 잠재 능력치 일시 개방.] [신체 조건이 재조정됩니다.] 팔에 힘이 확 들어왔다. 다리도 가벼워졌다. 마치 다른 몸을 빌려 입은 것 같았다. 숨소리조차 달라진 기분이었다. 이게 뭔 조화인지 모르겠는데. 일단 나쁜 건 아닌 것 같고. 강태오가 다시 발을 뻗었다. 이번엔 아까보다 더 세게. 이도현이 그 발목을 잡았다. 손끝에 걸린 발목이 생각보다 가볍게 느껴졌다. 뭐 하는 짓이야. 강태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도현은 대답 없이 발목을 살짝 꺾었다. 강태오가 그대로 균형을 잃고 나뒹굴었다. 쿠당탕. 마당에 흙먼지가 튀었다. 무리들이 얼어붙었다. 누구도 먼저 나서지 못했다. 이런 미친놈이. 강태오가 벌떡 일어나 달려들었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도현은 반사적으로 몸을 틀었다. 주먹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바람이 귓가를 훑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였다. 느리다. 이상하게 그렇게 느껴졌다. 다음 순간 이도현의 팔이 먼저 뻗어 나갔다.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둔탁한 소리가 마당에 울렸다. 퍽. 강태오가 뒤로 두 발 밀려나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입술이 터져 피가 배어 나왔다. 손등으로 입가를 훔치며 그 피를 확인하고는 눈이 커졌다. 너, 너 이 자식. 강태오가 믿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이도현을 올려다봤다. 이도현은 손을 툭툭 털었다. 손등에 남은 얼얼한 감각이 낯설었다. 힘이 원래 좀 있었던 것 같은데. 원래 몸주인의 근성인지, 시스템 덕인지 몰라도 나쁠 건 없었다. 앞으로 발은 본인이 씻으시죠. 이도현이 담담히 말했다. 무리들이 강태오를 부축했다. 한 명은 겁먹은 눈으로 이도현을 힐끔거렸다. 다른 한 명은 아예 시선을 피했다. 강태오는 이를 갈며 노려봤다. 두고 봐. 두고 보긴 뭘 두고 봐. 이도현이 어깨를 으쓱였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는 조금 다른 계산을 하고 있었다. 저놈 뒤에 누가 있는지 알아봐야겠는데. 학도 3급이면 위로 사형들도 있을 거고. 그때,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우우우웅. 낮게 울리는 굉음이 청명문 전체를 흔들었다. 마당에 있던 모두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발밑까지 미세하게 떨리는 느낌이었다. 먹구름 사이로 균열이 갈라졌다. 마치 하늘에 상처가 난 것 같았다. 붉은 빛이 그 틈으로 새어나왔다. 가느다랗던 균열이 점점 넓어지고 있었다. 뭐, 뭐야 저게. 강태오가 얼빠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방금까지의 분노는 어디로 갔는지 표정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도현도 시선을 들었다. 전생에서도 본 적 없는 광경이었다. 저런 게 뉴스에 나왔으면 전 세계가 뒤집혔겠지. [세계 공표: 균열 이변이 관측되었습니다.] [대륙 전역, 무공 종파는 즉시 소집령을 따르십시오.] 문구가 눈앞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이도현은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이번엔 진짜 시스템이 말을 거는구나. 청명문 전체에 종소리가 다시 울렸다. 다급하고, 길게, 끊이지 않았다. 댕댕댕댕. 숙소 여기저기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잡역 제자들이 하나둘 마당으로 뛰쳐나왔다. 어리둥절한 얼굴들이 하늘을 향했다. 누군가는 손으로 눈을 가렸고, 누군가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강태오도 어느새 아까의 일은 잊은 듯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이도현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던 눈빛은 사라지고 없었다. 이도현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예삿일이 아니다.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붉게 갈라진 하늘 틈으로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그저 착각인지, 아니면 진짜인지.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하나였다. 이 세계, 생각보다 훨씬 위험한 곳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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