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성문 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속이 뒤틀린다. 사람들이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수백 명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하촌 뒷골목에서 동전 몇 푼에 굽신거리던 얼굴들이, 오늘은 창과 낫을 들고 내 이름을 연호한다.
"교주님! 교주님이 계시니 무섭지 않습니다!"
나는 웃었다. 실소가 나왔다.
무섭긴 나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제일 무섭다.
애초에 나는 마고교를 세울 때 신도들 주머니를 노렸을 뿐이다. 여신이 어디 계신다, 축복을 받으면 병이 낫는다, 그런 헛소리를 팔아서 하루 벌어 하루 먹던 사기꾼이었다. 대나무로 만든 지팡이 하나 흔들면서 "여신께서 오늘 밤 당신의 병을 거두어 가시리라"라고 읊었을 때, 나조차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하촌 사람들이 정말로 낫을 들고 청하성 성문을 부숴버렸다.
그것도 성공했다. 이 아이러니는 어디서부터 손을 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성벽 위로 부는 바람이 차가웠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사람들 손에 들린 무기가 제각각이다. 낫, 곡괭이, 부러진 창대, 심지어 부엌칼도 보인다. 저런 걸로 정규군이 지키던 성문을 뚫었다는 게 아직도 실감이 안 났다. 운이 좋았을 뿐이다. 아니면 저들의 절박함이 갑주보다 강했던 걸지도.
"교주님, 다음 지시를 내려주십시오."
부관을 자처하는 늙은 남자가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원래 하촌에서 땔감 장수를 하던 노인이다. 등이 굽었고 손등엔 오래된 화상 흉터가 있다. 나는 그의 눈을 피했다.
지시라니. 나는 성 하나 점령해본 적도 없다. 지시할 게 뭐가 있나.
"성 안 곳간을 열어서 배급을 하고, 부상자들을 모아라. 그거면 됐다."
대충 던진 말인데 노인은 감격한 얼굴로 물러갔다.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절이라도 할 기세였다. 다들 저런다. 내가 뭐라 뱉기만 하면 신탁이라도 받은 것처럼 받아들인다.
곳간을 열라는 말도, 사실은 대단한 통찰이 아니다. 배고픈 사람들 눈빛을 보면 알 수 있는 거고, 부상자를 방치하면 사기가 떨어진다는 건 하촌에서 밥그릇 싸움을 하며 자연히 배운 것뿐이다. 그런데 저들은 그걸 신의 계시처럼 받든다.
도망칠 수 없을까, 생각한 게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른다.
밤마다 성 뒤편 개구멍이라도 찾아서 빠져나갈까 궁리했다. 하지만 성문 밖은 이제 하촌보다 더 위험한 곳이 됐다. 청하성을 빼앗긴 영주가 가만있을 리 없으니까. 그리고 도망친다 해도 어디로 가나. 이 얼굴, 이 이름을 알아보는 사람이 너무 많아졌다.
성벽 아래 시체 몇이 아직 치워지지 않은 채 널려 있다. 어제의 전투에서 죽은 병사들이다. 죽은 이들의 갑주가 햇빛에 번쩍인다. 파리 몇 마리가 그 위를 맴돌았다.
그 반짝임을 보고 있으니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이건 도둑질이 아니다. 반란이다. 그리고 반란은 실패하면 목이 잘린다.
목이 잘린다는 말을 속으로 되뇌면서도 실감이 안 됐다. 어제까지 동전 세던 손으로 무슨 반란을 일으켰다는 건지. 자다가 눈뜨면 다시 하촌 뒷골목일 것 같은 기분이 아직도 가시지 않았다.
"교주님."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 정찰을 나갔던 소년병 하나가 숨을 몰아쉬며 성벽을 올라오고 있었다. 얼굴이 하얗다. 열대여섯이나 됐을까, 갑옷도 아니고 낡은 무명옷을 대충 껴입고 있었다.
"뭐냐."
"영주님이... 살아 계셨습니다. 성 밖으로 도망쳤던 게 아니라 근처 영지에 숨어서 병력을 모으고 있다고 합니다."
"몇이나."
"모,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상단 사람들 말로는... 기사만 백 명이 넘는다고......"
소년의 목소리가 떨렸다. 숨을 고르지 못해서 말이 자꾸 끊겼다.
기사 백 명. 우리 쪽 병력이라 부를 만한 건 창을 처음 잡아본 농민들과 낫을 든 아낙들이 대부분이다. 정면으로 붙으면 하루도 못 버틴다는 계산이 머릿속에서 저절로 섰다.
"확실한 소식이냐."
"상단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거짓말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나는 성벽 저 너머, 지평선을 바라봤다. 아직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나무와 들판, 저 멀리 흐릿한 산등성이뿐이다.
그런데도 뭔가 다가오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신경이 곤두선다.
하늘 색이 이상하다. 붉은 노을이라기엔 너무 짙고, 구름은 움직이지 않는데 그림자만 흘러가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하늘 자체가 무언가를 삼키고 있는 것처럼, 색이 안쪽에서부터 짓눌려 있었다.
"이거 원래 이런 색이었나."
혼잣말이 나왔다. 소년병도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저도... 처음 봅니다."
좋은 징조는 아니다. 그런 건 굳이 배우지 않아도 안다. 하촌에서 사기를 칠 때도 사람들 낯빛이 저렇게 변하면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뜻이었다.
"가서 쉬어라. 잘 뛰어왔다."
소년병은 고개를 숙이고 계단을 내려갔다. 뒷모습이 아직도 다리를 후들거리고 있었다.
나는 성벽에서 내려오며 생각했다. 이 반란, 어떻게든 끝을 봐야 한다. 그런데 그 끝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갈 것 같지가 않다. 애초에 내가 원하는 방향이라는 게 뭔지도 정확히 모르겠다. 그냥 죽지 않고, 사람들 손에 피가 덜 묻는 쪽으로 끝나기를 바랄 뿐이다.
계단을 다 내려서자 발밑에서 흙먼지가 일었다. 어제 무너진 성문 잔해가 아직도 마당 한쪽에 쌓여 있고, 그 옆으로 대충 눕혀놓은 부상자들이 신음하고 있었다. 붕대를 감아줄 사람도 손이 모자란 모양이다.
성 안뜰로 들어서자 백여 명이 넘는 신도들이 나를 향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마치 내가 진짜 여신의 대리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앞줄에 있던 여자 하나는 무릎까지 꿇으며 두 손을 모았다.
웃음이 나오려다 말았다.
이래도 되는 걸까. 이 사람들, 진짜로 나를 믿고 있다.
처음 마고교를 만들었을 때는 이런 걸 상상도 못 했다. 몇 명 모아서 헌금 받고 도망치면 그만인 장사였다. 그런데 지금은 이 마당에 서 있는 사람들 절반 이상이 나 하나 때문에 목숨을 걸고 성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나는, 이 사람들이 언제 죽어 나갈지 모른다는 걸 알면서도 아무 대책이 없다.
늙은 부관이 저 멀리서 곳간 문을 여는 걸 지시하는 모습이 보였다. 사람들이 줄지어 서서 쌀자루를 받아가고 있다. 그 광경을 보면서도 마음이 편해지지 않았다. 이 쌀이 다 떨어지면, 그다음엔 뭘로 저 사람들 배를 채워줄 건데.
성문 쪽에서 다시 종소리가 울렸다. 누군가 급히 뛰어온다. 발소리가 다급했다.
"교주님! 성녀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서유리가 온다는 소식이었다. 나는 그제야 조금 안도했다.
적어도 이 진창에 나 혼자는 아니라는 뜻이니까.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자 어깨에 힘이 조금 풀렸다. 서유리라면,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도 뭔가 실마리를 잡아줄지 모른다. 그런데 성문 쪽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와 목소리가 이상하게 소란스러웠다. 환영하는 함성이 아니었다. 다급하고, 겁에 질린 웅성거림이었다.
"뭐야, 왜 이렇게……"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성문 쪽에서 누군가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