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성벽 위에 올라서자 숨이 턱 막혔다.
돌계단을 오르는 동안 다리가 후들거렸던 걸 기억한다. 한 계단, 두 계단, 세 계단. 숫자를 세면서 올라간 이유는 단순했다. 딴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그런데 정상에 서자마자 그 노력이 무색해졌다.
지평선 끝에서부터 대열이 밀려오고 있었다. 갑옷이 빛을 받아 은빛으로 물결친다. 깃발 수십 개가 바람에 나부꼈다. 바람 소리인지 갑옷들이 부딪히는 소리인지, 멀리서도 철컥거리는 금속음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저게... 몇 명이야."
옆에 선 서유리의 목소리가 떨렸다. 평소 같으면 침착한 척, 성녀답게 굴었을 그녀인데. 지금은 목소리 끝이 살짝 갈라져 있었다.
부관 노인이 망원경 대신 낡은 유리 조각을 들고 보다가 손을 떨었다.
"기사가... 백은 넘어 보입니다. 그 뒤로 보병이 최소 천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유리 조각이 손에서 미끄러질 뻔했고, 노인은 그걸 다시 움켜쥐었다.
청하성 안에 남은 전력은 다 합쳐도 오백이 안 된다. 무기도 대부분 농기구를 개조한 것들이다. 낫이 창이 됐고, 도끼가 검이 됐다. 그 정도로 저 물결치는 은빛 대열을 막아내겠다고?
속이 뒤틀렸다.
머릿속으로 계산을 해봤다. 병력 비율로 따지면 최소 세 배, 아니 네 배는 차이가 난다. 게다가 저쪽은 기사다. 정식으로 훈련받은 기사와 갑옷. 이쪽은 어제까지 밭을 갈던 농부와 땔감을 지던 지게꾼들이다.
이길 방법이 있나. 없다. 도망칠 방법은. 그것도 마땅치 않다.
대열 가장 앞에 백마를 탄 남자가 있었다. 은빛 갑주, 붉은 망토. 멀리서도 그 자세만으로 위압감이 전해졌다. 등을 곧게 세운 채 말 위에 앉은 모습이, 마치 그림에서 뜯어낸 것처럼 흔들림이 없었다.
"저 사람이 영주다."
노인이 말했다. 한지헌이라고.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이 성을 원래 다스리던 자. 우리가 빼앗은 자리의 원래 주인. 당연히 곱게 물러날 리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이렇게 큰 규모로 올 줄은 몰랐다.
한지헌의 목소리가 이상한 방식으로 성벽까지 울려 퍼졌다. 마법인지 무슨 도구인지 모르겠지만, 성 전체에 그 말이 퍼졌다.
"청하성의 도적들에게 말한다."
낮고 차가운 목소리였다. 귀에 직접 박히는 것 같은, 그런 목소리였다.
"땔감 장수와 거지들이 내 성을 빼앗았다는 소식을 듣고 처음엔 웃었다. 우스갯소리인 줄 알았지."
신도들 사이에서 낮은 신음이 퍼졌다. 누군가는 무기를 고쳐 쥐었고, 누군가는 뒷걸음질을 쳤다.
"그런데 진짜였더군. 그래서 지금 이 자리에 왔다. 웃음거리가 된 것에 대한 답을 받아가려고."
한지헌의 시선이 성벽을 훑었다. 나를 찾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 눈빛이 성벽 위 사람들을 하나씩 지나쳐 결국 어디쯤엔가 멈출 걸 알고 있었기에, 나는 저절로 몸을 낮추고 싶어졌다.
"이 반란을 이끈 자가 누구인지 궁금하군. 나와서 이름을 밝혀라. 그러면 나머지는 살려주는 걸 고려해보겠다."
신도들이 일제히 나를 쳐다봤다. 이 시선들, 정말 부담스럽다. 등 뒤에서 수백 개의 눈이 나를 찌르는 느낌이었다. 왜 다들 나만 보는 거야. 나도 어제 하촌에서 땔감 팔던 사람이었는데.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다시 치솟았다. 지금이라도 뒷문으로 빠져나가 하촌 어딘가에 숨어버리면 어떨까. 이름을 바꾸고, 얼굴을 가리고, 어디 먼 마을에 가서 다시 땔감이나 팔면서 살면 되지 않을까.
그런데 서유리가 내 소매를 붙잡았다. 손끝이 차가웠다.
"지금 나가면 죽어요."
"안 나가면 다 죽어요."
"그거야말로 나가면 확실히 죽는다는 소리잖아요."
핑퐁처럼 이어지는 말싸움에 답이 없었다. 둘 다 맞는 말이니까. 서유리는 논리로 몰아세우는 재주가 있고, 나는 그걸 받아치는 재주가 없었다.
"그럼 어쩌라는 거예요, 성녀님."
"그건 교주님이 정하실 일이죠. 저는 그냥... 사실을 말한 거예요."
"사실만 말하면 다야? 위로도 좀 해줘."
"위로할 시간 없어요. 저기 좀 보세요."
서유리가 턱짓으로 가리킨 곳에는 다혜가 있었다. 성벽 아래에서 부상자들 사이를 오가며 신도들을 다독이고 있었다. 저 아이는 저 상황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다. 어떻게 저럴 수 있지. 나는 속으로 감탄하면서도 동시에 조금 부끄러워졌다. 나이도 어린 애가 저렇게 담담한데, 나는 다리가 후들거리고 있으니.
결국 나는 성벽 위로 조금 더 나섰다. 목소리를 짜냈다.
"강태율이다. 마고교의 교주다."
말을 뱉고 나니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내 목소리가 저 아래까지 닿을까 걱정했는데, 신기하게도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이곳 성벽의 구조 때문인지, 아니면 그저 이 순간의 정적이 소리를 더 크게 만든 건지.
한지헌이 나를 올려다보며 웃었다. 그 웃음이 소름 끼치게 차가웠다. 입꼬리만 살짝 올라간, 조롱에 가까운 웃음이었다.
"교주라니, 거지들 우두머리치고는 근사한 호칭이군."
"당신 성을 빌린 것뿐이다. 곧 돌려줄 생각이었다."
허세였다. 나오는 대로 뱉은 말이다. 사실 돌려줄 생각 같은 건 애초에 없었다. 있는 대로 지어낸 말이었는데, 저 입에서 나가는 순간 진짜처럼 들리는 게 나 자신도 놀라웠다.
"빌렸다고? 좋다. 그럼 내가 지금 돌려받으러 온 것이니 얌전히 문을 열어라. 그리고 반란의 주모자들만 내놓으면, 나머지 어리석은 백성들은 목숨만은 살려주지."
신도들이 동요했다. 몇몇은 벌써 무기를 내려놓으려는 기색이었다. 노인네 하나가 창을 슬쩍 바닥에 내리는 게 시야 끝에 걸렸다.
이 상황에서 문을 열면, 나와 서유리, 다혜는 확실하게 처형이다. 다른 신도들도 온전히 살아남을 리 없다는 걸 저 말투에서 느꼈다. 저건 살려준다는 말이 아니라, 시간을 끌기 위한 미끼다. 문 열면 안에서 학살하고, 성문에 시체를 걸겠지. 딱 그런 인상이었다.
"그럴 수 없다."
내 입에서 나온 말에 나 자신도 놀랐다. 도망칠 궁리만 하던 내가, 어느새 저항한다는 말을 뱉고 있었다.
왜 그런 말이 나왔는지 나도 모르겠다. 어쩌면 다혜의 웃음을 봤기 때문일 수도 있고, 서유리가 소매를 붙잡은 손의 온도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저 위에서 웃고 있는 놈의 얼굴이 너무 마음에 안 들어서일 수도 있다.
한지헌의 표정이 굳었다.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은 더 서늘했다.
"그런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그가 손을 들어 올렸다.
뒤에 늘어선 병력이 일제히 진형을 갖췄다. 창끝이 햇빛에 반짝였다. 저 많은 창끝이 동시에 움직이는 걸 보고 있자니, 마치 거대한 짐승이 몸을 뒤척이는 것 같았다.
"오늘 해가 지기 전에, 이 성은 다시 내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도적들의 시체는 성문에 걸어 본보기로 삼겠다."
말이 끝나자 북소리가 울렸다.
둥. 둥. 둥.
심장이 그 소리에 맞춰 뛰는 것 같았다. 아니, 정확히는 그 소리가 심장을 억지로 그 박자에 맞추게 하는 것 같았다.
서유리가 내 옆에서 낮게 중얼거렸다.
"교주님, 이제 어떡해요."
"모르겠어요."
"모른다고 하면 안 되죠. 신도들은 다 교주님 보고 있어요."
"그럼 성녀님이 대답해보시죠."
"저는 신도들 안심시키는 역할이잖아요. 결정은 교주님이 하는 거예요."
이 여자도 위기 앞에서는 책임을 미루는 데 능숙하다. 나만큼이나. 그래도 그 목소리에 담긴 떨림은 숨기지 못했다. 서유리도 무섭다는 뜻이다. 나만 무서운 게 아니라는 게, 이상하게 조금 위안이 됐다.
대열이 서서히 전진을 시작했다. 저 멀리서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말발굽 소리가 땅을 타고 전해지는 것 같았다. 발밑의 성벽 돌까지 미세하게 떨리는 느낌이었다.
다혜가 성벽 아래에서 부상자들 사이를 오가며 신도들을 다독이고 있는 게 보였다. 저 아이는 저 상황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다. 누군가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누군가에게는 물을 건네고. 나는 저 멀리서 그 모습을 보며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다. 적어도 저 아이가 저렇게 웃고 있는 동안은, 이 성이 완전히 끝난 게 아니라는 기분이 들었다.
마고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교주잖아. 아니야.
젠장, 진짜로 뭔가 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북소리가 점점 커졌다. 대열이 사거리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창끝들이, 방패들이, 그리고 그 사이사이로 보이는 무표정한 얼굴들이 점점 가까워졌다.
이제 도망칠 시간도, 생각할 시간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