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성문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서유리는 시선을 사로잡았다.
흰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흘러내리고, 걸음마다 신도들이 무릎을 꿇는다. 걸을 때마다 옷자락이 바닥을 스치는 소리까지도 계산된 것처럼 우아하다. 성녀라는 직함이 저렇게 잘 어울리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원래 이 짓을 시작할 때부터 저 여자가 얼굴값을 하리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도 볼 때마다 새삼스럽다.
"오랜만이네요, 교주님."
존댓말이지만 눈빛은 서늘하다. 저건 존경이 아니라 견제다. 몇 년을 같이 사기를 쳐도 저 눈빛만은 익숙해지질 않는다.
"성녀님도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나도 웃으며 맞받았다. 속으론 다른 말이 올라온다. 무사하긴, 당신도 이 사기 덕에 재미 좀 봤으면서. 신도들이 바치는 헌금 절반은 저 여자 방에 쌓여 있을 텐데.
서유리는 원래 하촌 뒷골목에서 몸을 파는 여자였다. 나와 손을 잡은 이유는 단 하나, 마고교가 벌어들이는 돈이었다. 얼굴이 예쁘니 성녀 자리에 세워놓으면 신도들이 알아서 기부를 한다는 계산이었다. 그 계산은 정확히 맞아떨어졌고, 우리는 그 돈으로 여기까지 왔다.
그게 지금 이 사태의 절반의 원인이다. 나머지 절반은 순전히 내 욕심이었고.
"신도들 사이에서 이상한 얘기가 돌던데요."
서유리가 목소리를 낮췄다. 주변을 한 번 살피는 동작이 몸에 익어 있다. 뒷골목에서 살아남으려면 배워야 하는 습관이었을 거다.
"무슨 얘기요."
"여신님 목소리를 들었다는 사람들이 있어요. 어젯밤에."
나는 웃었다. 이번엔 진짜 실소였다.
"환청이겠죠. 전투 스트레스도 있고. 요즘 다들 잠도 제대로 못 자잖습니까."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데......"
말을 흐리는 서유리의 얼굴이 평소와 달랐다. 저 여자가 저런 표정 짓는 건 처음 본다. 늘 계산하고, 늘 웃고, 늘 상대의 약점을 찾던 눈이 지금은 뭔가를 피하고 있었다.
"뭔가 있어요?"
"모르겠어요. 그냥, 어제 예배당에서 잠깐 눈을 감았는데... 누가 제 이름을 불렀거든요. 제 진짜 이름을요."
서유리의 진짜 이름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성녀로 데뷔하면서 다 지운 이름이니까. 서류도 없고, 기억하는 사람도 나 말고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순간 나도 등골이 서늘했지만 애써 무시했다.
"착각입니다. 우리끼리 있을 때 흔들리면 안 돼요. 신도들 앞에서는 확신을 보여야 합니다."
이 말은 서유리한테 하는 게 아니라 나 자신한테 하는 거였다. 목소리가 조금 떨렸던 것 같은데, 서유리가 눈치챘는지는 모르겠다.
서유리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 여자도 나만큼 상황을 잘 안다. 사기극이 무너지면 둘 다 목이 날아간다는 걸. 신도들의 신앙이 무서운 건, 그게 배신당했을 때 돌아오는 분노도 그만큼 크다는 점이다.
"일단 오늘은 예배 없이 넘어가죠. 다들 지쳤으니."
"그러죠."
서유리가 돌아서서 걸어갔다. 뒷모습마저도 성녀답게 반듯했다. 참 대단한 여자다, 매번 느끼지만.
예배당 쪽에서 다혜가 걸어왔다. 은색 머리를 하나로 묶고, 양손에는 붕대와 약초 바구니를 들고 있다. 부상자들을 돌보고 오는 길이다.
"교주님! 성녀님! 다들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다혜는 웃을 때 눈이 반달처럼 접힌다. 저 순박함이 진짜인지 연기인지 아직도 헷갈릴 때가 있다. 몇 년을 봐도 모르겠다는 게 신기할 정도다.
다혜는 원래 하촌에서 고아들을 돌보던 여자였다. 마고교에 들어온 이유도 단순했다. 아이들 먹일 밥이 필요했으니까. 지금도 신앙심은 진짜인지 몰라도 나는 그 마음을 이용해서 여기까지 왔다. 가끔은 그게 미안하다가도, 미안한 감정을 느낄 자격이 있는지 스스로 되묻게 된다.
"부상자들은 좀 어때."
"많이 나아지셨어요. 근데......"
다혜가 말끝을 흐리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아까 봤던 그 이상한 하늘 색이 여전했다. 붉은 것도 아니고 노란 것도 아닌,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흐린 색이 지평선 위로 낮게 깔려 있었다.
"저 하늘, 계속 저래요. 어젯밤부터."
"신경 쓰지 마. 날씨야."
내가 잘라 말했지만 다혜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붕대를 쥔 손끝이 살짝 떨리는 게 보였다.
"어젯밤에 예배당에서 이상한 걸 봤어요."
서유리와 나는 동시에 다혜를 쳐다봤다. 방금 서유리가 했던 말과 겹쳐졌다는 걸 다혜는 모르는 것 같았다.
"무슨 걸."
"제단 위에 빛이... 사람 모양으로 서 있었어요. 머리색이 연한 황녹색이었고요. 아주 잠깐이었는데, 분명히 봤어요."
순간 예배당 벽에 그려놓은 마고 여신의 그림이 떠올랐다. 우리가 대충 상상해서 그려 붙인 그림. 급하게 화가를 시켜서 만든, 사실 근거도 없는 상상화. 연한 황녹색 머리카락. 다혜가 지금 말한 색깔과 똑같다.
웃어야 할지 겁을 먹어야 할지 모르겠다. 우연이라면 너무 정확한 우연이고, 우연이 아니라면 그건 더 무서운 얘기다.
"환각이야. 다들 지쳐서 그래."
서유리가 먼저 말했다. 나보다 더 빠르게 상황을 수습하는 저 능력만은 인정해줘야 한다. 뒷골목에서 살아남는 여자는 확실히 이런 순발력이 남다르다.
다혜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눈빛에는 뭔가가 남아 있었다. 완전히 믿지 못하는, 그러나 반박할 근거도 없는 그런 얼굴이었다.
그날 저녁, 나는 부상자들 상태를 확인하는 척 예배당 주변을 돌아다녔다. 신도들 몇이 아직도 삼삼오오 모여 소곤거리고 있었다. 여신님 목소리, 빛, 이름. 단어 몇 개가 귀에 걸렸다가 사라졌다.
밥을 먹는 동안에도 그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림하고 색깔이 똑같은 게 우연일 수는 있다. 신도들이 매일 보는 그림이니 무의식중에 그 이미지가 환각으로 나타났을 수도 있다. 그렇게 정리하면 간단한데, 이상하게 손에 쥔 숟가락이 계속 무거웠다.
그날 밤, 나는 예배당에 혼자 들어가 봤다. 확인해야 했다. 헛소리인지 아닌지.
문을 열자 서늘한 공기가 먼저 마중을 나왔다. 낮에 봤던 신도들의 자리는 텅 비어 있었고, 제단 위 여신상만이 촛불도 없이 어둠 속에 서 있었다.
제단 앞에 서서 촛불 하나만 켜놓았다. 불씨가 옮겨 붙으며 작은 소리를 냈다. 조용했다. 너무 조용했다. 벽에 걸린 그 상상화 속 여신의 눈이 이상하게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거기 누구 있습니까."
혼잣말치고는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대답이 있을 리가 없다. 여기 있는 건 나무 조각으로 만든 제단과, 급하게 그려 붙인 가짜 그림뿐이다.
그런데.
촛불이 흔들렸다. 바람 한 점 없는 실내에서.
숨을 멈췄다. 창문은 다 닫혀 있었다. 문도 내가 직접 걸어 잠갔다. 그런데 촛불은 마치 누군가 옆에서 숨을 내쉰 것처럼 흔들렸다.
등 뒤에서 온기가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