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손끝이 시렸다. 도망치고 싶었는데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머릿속으로는 이미 세 번쯤 도망쳤다. 창문 쪼개고 뛰어내리는 그림, 문 부수고 복도로 튀는 그림, 그냥 바닥에 엎드려서 죽은 척하는 그림까지. 근데 몸은 그 어느 것도 실행하지 않았다. 다리가 얼음이 된 것처럼 딱 붙어서 안 움직였다.
블랙드래곤의 시선이 나를 관통하는 느낌이었다. 저 정도 크기의 존재가 방 안에 어떻게 들어와 있는 건지 물리적으로 이해가 안 됐다. 방은 원래 딱 침대 하나, 책상 하나 들어가는 크기였는데 지금은 저 거대한 몸뚱이가 벽을 뚫지도 않고 그냥 들어차 있었다. 공간 자체가 늘어난 건지, 내가 헛것을 보는 건지 판단이 안 됐고, 그런 걸 따질 겨를도 없었다.
[네가 그 아이를 데리고 있구나.]
"그 아이…요?"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존댓말이 튀어나온 건 순전히 반사였다. 상대가 나보다 세 보이면 일단 존댓말부터 나가는 게 내 오랜 습성이었고, 저건 세 보이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다른 체급이었다.
드래곤의 시선이 내 품 안, 정확히는 유골함으로 향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걸 더 세게 끌어안았다. 손끝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이 유골함 하나 지키겠다고 드래곤 앞에서 버티고 있는 내 모습이 스스로도 우스웠지만, 몸이 먼저 움직인 걸 어쩌겠나.
[냄새가 익다. 아주 오래된 냄새인데도, 잊을 수가 없구나.]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저게 지금 뭘 알아본다는 건지, 이해가 안 됐다. 유골함 안에 있는 게 뭔지는 나도 정확히 모른다. 그냥 오래전에 죽은, 내가 키웠던 개의 흔적일 뿐이었다. 그런데 붉은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는 방식이, 어딘가 익숙했다.
낑낑거리며 내 다리에 머리를 비비던, 그 눈빛과 겹쳐 보였다. 밥그릇을 향해 꼬리를 흔들던 그 각도, 산책 가자고 하면 현관에서 방방 뛰던 그 자세. 말도 안 되는 연상이라는 거 알면서도 머릿속에서 자꾸 그 장면들이 재생됐다.
"…까망?"
말이 헛나온 줄 알았다. 입 밖으로 낼 생각도 없었는데 그냥 새어 나왔다. 그런데 그 순간 드래곤의 거대한 몸이 흠칫 떨렸다. 방 전체를 울리던 위압감이 순식간에 다른 색으로 물들었다. 조금 전까지는 숨 쉬는 것조차 허락받아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는데, 지금은 뭔가 어색하고 조심스러운 침묵이 흘렀다.
[…그 이름을, 아직 기억하고 있느냐.]
목소리가 흔들렸다. 아까 나를 찾아낸 그 압도적인 존재감과는 완전히 다른, 뭔가 조심스러운 어조였다. 방금까지 신을 대놓고 무시하던 존재가, 지금은 마치 내 대답 하나에 목숨을 걸고 있는 것처럼 굳어 있었다.
나는 대답 대신 유골함을 내려다봤다. 손끝의 냉기가 그제야 조금 풀렸다. 그리고 다시 드래곤을 올려다봤다. 믿기지 않았지만, 믿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저 붉은 눈동자가, 내가 열네 살까지 함께 살았던 그 개의 눈빛과 똑같았다. 색깔도, 깜빡이는 속도도, 나를 향할 때의 그 미묘하게 처지는 눈꼬리까지.
"너… 진짜 까망이야?"
목이 멨다. 열네 살 이후로 한 번도 안 불러본 이름이었는데, 이상하게 발음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손끝이 떨리는 게 냉기 때문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 구분이 안 됐다.
[살아 있었을 적, 마지막으로 본 것이 네 얼굴이었다.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을 때는 이 몸이었지. 이곳의 신들이 나를 전생시켰다고 하더구나.]
말투는 낯설었지만 그 안에 담긴 온도는 낯설지 않았다. 예스러운 어투에 하대하는 말투인데도, 이상하게 위협적으로 안 들렸다. 오히려 옛날에 마당에서 뒹굴던 그 녀석이 갑자기 정장 입고 존댓말 흉내 내는 걸 보는 기분이었다.
[너를 찾는 데 오래 걸렸다. 이 세계는 넓고, 신들은 정보를 숨기는 데 능하지.]
"…나 찾으려고 이 세계까지 온 거야?"
[찾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이 있었겠느냐.]
그 대답이 너무 단호해서 오히려 헛웃음이 났다. 세상에, 개 한 마리가 죽고 나서 드래곤으로 환생해서 주인 찾으러 세계를 넘어왔다니. 이게 감동적인 이야기인지 스케일이 너무 커서 무서운 이야기인지 판단이 안 섰다.
그 순간 방 한편에서 처음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끼어들었다.
[자, 잠깐, 이건 예정에 없던 상황이니라. 저 개체는 통제 불가 등급인데, 어찌 이곳에…]
목소리에 당황이 그대로 묻어났다. 신이라는 존재도 저렇게 허둥댈 수가 있구나 싶었다. 나만 당황한 게 아니라는 게 묘하게 안심이 됐다.
[통제라니, 함부로 입에 담지 말거라.]
드래곤의 눈빛이 서늘해지자 방 안 공기가 다시 무겁게 내려앉았다. 신의 목소리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나도 덩달아 숨을 참았다.
"저기, 통제 불가 등급이 뭔데요…"
물어놓고 나서 바로 후회했다. 이 상황에서 그런 걸 왜 궁금해하는지 스스로도 이해가 안 됐지만, 습관이라는 게 무섭다. 정보 없이 죽는 것보다 정보 얻고 죽는 게 나으니까.
[이 아이는 나의 사람이다. 그리고 나는 이제부터 이 아이 곁에 있을 것이다.]
드래곤은 내 질문에 대답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대신 신을 향해 못을 박듯 선언했다. 방 안 온도가 한 번 더 내려간 것 같았다.
그 선언과 동시에 내 앞에 새로운 창이 떠올랐다.
[계약 요청: 블랙드래곤 '까망'이 당신과의 마물 계약을 제안합니다.]
등급은 따로 표기되지 않았다. 대신 그 옆에 조그맣게 적힌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등급 산정 불가 — 측정 범위 초과]
측정 범위 초과. F등급 마물사한테 이런 창이 뜨는 게 맞나 싶었다. 사흘 전까지 뭐 하나 계약 못 해서 길거리에서 울고 있던 내가, 지금은 등급 표기 자체가 불가능한 존재랑 계약서를 마주하고 있다. 인생이 원래 이렇게 급커브를 트나.
나는 침을 삼키며 물었다.
"이거… 계약하면 어떻게 되는 거야?"
[너는 나의 계약자가 되고, 나는 너의 마물이 된다. 형식상으로는 그렇다.]
"형식상으로는?"
[실질적으로는 내가 너를 지킨다. 예전처럼.]
그 말투가 너무나도 자연스러워서, 나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 방금까지 F등급 낙오자 신세로 절망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신들도 함부로 못 건드는 존재가 내 마물이 되겠다고 한다. 세상에 이런 반전이 있나.
"…이거 완전 사기 아니야?"
말이 나오자마자 아차 싶었다. 상대는 드래곤이고, 나는 계약서 조항 하나에 목숨 걸어야 하는 인간인데 반말이 튀어나왔다. 근데 이상하게 다시 존댓말로 고칠 마음이 안 생겼다. 저 붉은 눈이 여전히 그 개의 눈빛이라고 생각하니, 자꾸 옛날처럼 말이 나왔다.
[사기라니. 계약서를 잘 읽어보거라.]
목소리에 살짝 억울함이 묻어 있었다. 드래곤도 억울해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계약서를 스크롤해봤다. 대부분 형식적인 문구였는데, 맨 아래 한 줄이 눈에 걸렸다.
[계약 성립 시, 계약자는 마물의 존재를 신들의 감시로부터 은폐할 의무를 가진다.]
은폐 의무. 손가락으로 그 줄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계약서에 이런 조항이 붙는 게 정상인지 아닌지 판단할 기준조차 없었다. F등급 마물사 교육 과정에서 배운 계약서 예시들엔 저런 문구가 있었던 기억이 없다.
이게 왜 필요한 건지 물어볼 새도 없이, 신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끼어들었다.
[잠깐, 저 조항은 위험하니라! 저 개체를 계약하면 신들의 표적이 될 수도…]
목소리가 거의 비명에 가까웠다. 방금까지 위엄 있는 척하던 톤은 다 사라지고, 순수한 경고만 남아 있었다. 저 정도로 다급하게 말리는 걸 보니 이게 정말 별거 아닌 일은 아니구나 싶었다.
[걱정 마라. 저것들이 나를 건드릴 배짱이 있을 것 같은가.]
드래곤의 자신감은 하늘을 뚫을 기세였다. 그 말투 하나로 방 안의 무게가 다시 뒤집혔다. 신의 목소리는 대답을 못 하고 그대로 침묵했다.
나는 그 자신감 뒤에 숨은 위험 신호를 놓치지 않았다. 표적이 된다는 게 대체 무슨 뜻이란 말인가. 신들이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존재를, 나 같은 F등급이 계약해도 되는 걸까. 계약서 밑에 깔린 문구 하나 때문에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손끝은 더 이상 시리지 않았다. 대신 손바닥에 땀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유골함을 쥔 손에 힘을 풀지 못한 채로, 나는 눈앞에 떠 있는 계약창을 다시 들여다봤다. 서명 버튼이 조용히 깜빡이고 있었다. 누르면 어떻게 되는지, 안 누르면 또 어떻게 되는지, 아무도 나한테 알려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