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썩어가는 영웅, 90일의 유예

3화

짐을 꾸리는 데는 하루가 채 걸리지 않았다. 가진 것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약초 몇 가지와 낡은 지팡이, 그리고 윤서인의 편지 한 장이 그의 짐 전부였다. 낡은 배낭 하나에 모든 것을 담고도 자리가 남았다. 이도현은 그 빈 공간을 잠시 바라보았다. '가진 게 이토록 없었나.' 세계를 구했다는 사람의 짐이 이 정도라니, 스스로도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마을 사람들에게는 왕도의 옛 친구를 만나러 간다고 짧게 알렸다. 아무도 그의 말에 의심을 품지 않았다. 그저 잘 다녀오라는 인사만 건넸을 뿐이었다. 노파 한 명이 그의 소매를 붙잡고 말린 나물 한 봉지를 쥐여주었다. 가는 길에 요기라도 하라는 말이었다. 이도현은 그것을 받으며 웃었다. 도원촌에서는 이런 것이 당연했다. 서로가 서로를 알고, 작은 것을 나누는 일이 이상하지 않았다. '모두가 모른다.' 이도현은 마을을 벗어나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가 세계를 구했던 회복술사였다는 사실도, 지금 그의 몸이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도, 도원촌의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것이 편안했다. 동시에, 조금은 외로웠다. 마을을 벗어나 큰길에 접어들자 그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낮은 지붕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저곳에서는 그가 그저 다리를 저는 약초꾼 노인일 뿐이었다. 그 이름 없음이 지금 그를 지탱하는 유일한 방패였다. 왕도까지는 마차로 닷새가 걸리는 거리였다. 이도현은 그 닷새 동안 몇 번이나 마차 안에서 숨을 몰아쉬어야 했다. 가슴이 답답해지는 증상이 새롭게 나타나고 있었다. 첫째 날은 그저 가슴이 조금 뻐근한 정도였다. 셋째 날이 되자 숨을 들이쉬는 것만으로도 갈비뼈 안쪽이 조여드는 느낌이 들었다. 마부는 그의 안색을 살피며 괜찮으냐 물었지만, 이도현은 그저 마차가 흔들려서 그렇다고 둘러댔다. '또 하나가 늘었군.'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 오른팔의 얼룩, 왼쪽 눈의 어둠에 이어 이제는 숨쉬는 것마저 그의 것이 아닌 듯했다. 몸이 하나씩 그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감각이었다. 저주는 계단을 오르듯 순서대로, 그리고 확실하게 그를 잠식해 갔다. 왕도에 도착했을 때, 그는 오랜만에 느끼는 번잡함에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대로를 오가는 인파, 높이 솟은 신전의 첨탑, 화려한 상점들. 전쟁 전에 이곳에서 보냈던 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거리의 상인들은 목청을 높여 손님을 끌었다. 마차들이 바쁘게 오갔고, 아이들이 그 사이를 뛰어다니며 웃었다. 전쟁이 끝난 지 오래인 것처럼, 왕도는 그 모든 상처를 잊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도현은 그 낯선 평화가 반갑기보다는 서글펐다. 그는 곧장 신전으로 향했다. 윤서인을 만나기 전에, 먼저 자신의 몸을 확인해야 했다. +++ 신전의 접수처에는 젊은 사제가 앉아 있었다. 이도현이 다가가자 사제는 형식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떤 일로 오셨습니까." "치유사를 뵙고 싶습니다. 제 몸에... 이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도현이 말했다. 사제는 그의 행색을 슬쩍 훑어보았다. 낡은 여행복, 지팡이를 짚은 모습. 왕도의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차림새였다. "어디 촌구석에서 올라오신 모양인데." 사제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도현은 그 말을 못 들은 척했다. 이런 취급은 익숙했다. 익숙해서 더 씁쓸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이도현입니다." 그 이름에 사제의 표정이 잠시 흔들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이도현... 흔한 이름은 아닌데." 사제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이내 서류를 뒤적였다. 왕도에는 같은 이름을 쓰는 자가 셋은 넘었다. 회복술사 이도현이 지금 이 초라한 행색으로 이곳에 앉아 있을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짐작하지 못할 일이었다. "잠시 기다리십시오." 한참을 기다린 뒤, 이도현은 안쪽 진료실로 안내되었다. 그곳에는 세 명의 치유사가 앉아 있었다. 신전에서도 명망이 높다고 알려진 이들이었다. 방 안은 깨끗했다. 벽에는 신전의 문양이 새겨진 휘장이 걸려 있고, 선반 위에는 값비싸 보이는 약병들이 줄지어 있었다. 이도현이 평생 만져보지 못한 재료들도 섞여 있었다. 전쟁 중에는 이런 사치를 부릴 여유조차 없었다. "증상이 어떻게 되십니까." 가장 나이가 많은 치유사가 물었다. 이도현은 자신의 오른팔을 내밀어 소매를 걷었다. 검푸른 얼룩이 이제는 팔뚝 절반을 덮고 있었다. "이 얼룩이 점점 번지고 있습니다. 왼쪽 눈은 시야를 완전히 잃었고, 최근에는 호흡이 곤란해지는 증상까지 생겼습니다." 치유사들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중 하나가 이도현의 팔을 살펴보며 손끝에 마력을 흘렸다. 파앗- 가느다란 빛이 얼룩 위로 스며들었다. 하지만 얼룩은 그 빛을 삼켜버리듯 조금도 옅어지지 않았다. 치유사의 손끝이 미미하게 떨렸다.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이건... 저주의 흔적입니다. 상당히 오래되고 깊게 뿌리박힌 저주로군요." 치유사가 말했다. "치료가 가능합니까." "글쎄요. 이 정도 저주라면, 저주를 건 마법사의 힘을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다른 치유사가 답했다. "이런 종류의 저주는 대체로 특정 대가가 따르는 계약형 마법에서 비롯됩니다. 혹시 최근에 큰 마법을 쓰신 적이 있습니까." 나이 든 치유사가 덧붙였다. "짐작 가는 게 있습니다. 이건 회복 마법의 대가로 생긴 것일 겁니다. 제가 직접 걸었던 것과 다름없습니다." 이도현이 말했다. 순간 진료실에 정적이 흘렀다. 세 치유사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걷혔다. 잠시 서로를 마주 보던 그들의 눈에는 의아함과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 "본인이 회복술사이십니까." 나이 든 치유사가 되물었다. "그렇습니다. 전 용사 파티의 회복술사였습니다." 그 말에 세 치유사가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누군가 작게 실소를 터뜨렸다. "역사상 최고의 회복술사라는 그분 말씀이십니까?" 젊은 치유사가 웃음을 참지 못하며 말했다. "저희도 그 명성은 들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을 치유하지 못하신다니..." 다른 치유사도 실없이 웃었다. "그분이라면 신전 벽화에도 초상이 걸려 있을 정도인데. 그런 분이 이런 행색으로 오셨다는 게, 좀..." 나이 든 치유사가 말끝을 흐리며 헛기침을 했다. 이도현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그러나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명성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해서 온 것입니다."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 신전에서 최고라는 분의 저주를 저희가 어떻게 풀겠습니까. 스스로도 풀지 못하시는 저주를요." 나이 든 치유사가 손을 저었다. "저희 실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애초에 풀 수 없는 종류의 저주일 가능성이 큽니다. 대가로 생긴 저주는, 대가를 받은 자만이 되돌릴 수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다른 치유사가 거들었다. "그 대가를 받은 존재를 찾아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이도현이 물었다. "글쎄요. 그것까지는 저희 소관이 아닙니다." 치유사가 손을 내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없다는 태도였다. "돌아가서 좀 더 알아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저희로서는 도와드릴 방법이 없습니다." 그것으로 대화는 끝이었다. 이도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진료실을 나섰다. 등 뒤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한 척 걸음을 옮겼다. 복도를 지나는 동안 신전에서 근무하는 사제들이 그를 스쳐 지나갔다. 다들 바쁜 걸음이었고, 누구도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예전이었다면, 이도현이 신전 복도를 걸을 때마다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지금은 그 반대였다. 그의 존재는 이곳에서 그저 초라한 행색의 촌부에 불과했다. 접수처를 지나칠 때, 아까의 젊은 사제가 다른 동료와 낮게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자기가 그 회복술사래. 헛소리도 참." 사제가 웃으며 말했다. "정신이 좀 이상한 노인네인가 봐." 이도현은 그 말을 듣고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반박할 기운도, 반박할 이유도 없었다. 지금의 그는 그 말이 틀렸다고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신전을 나서며,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왕도의 하늘은 맑았지만, 그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무겁게 가라앉고 있었다. 신전 앞 광장에는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저 멀리 아이들이 뛰어다니며 웃었고, 상인들이 좌판을 벌여 놓고 손님을 부르고 있었다. 그 평범한 풍경 속에서 이도현은 이질감을 느꼈다. 그가 지켜낸 세상이 이렇게 그를 모른 채 흘러가고 있었다. '내가 정말 최고의 회복술사였을까.' 그 물음이 처음으로 그의 가슴을 후벼팠다. 지팡이를 짚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왼쪽 눈은 여전히 어둠뿐이었고, 오른팔의 얼룩은 조금 전 마력이 스쳤던 자리에서 오히려 더 진하게 배어난 듯했다. 그는 그 팔을 소매 속으로 감추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윤서인이라면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편지 속 그녀의 필체가 떠올랐다. 급하게 써 내려간 듯한, 그러나 분명한 다급함이 배어 있던 글씨였다. 이도현은 그 편지를 다시 꺼내 펼쳤다. 종이는 이미 손끝의 온기로 여러 번 구겨졌다가 펴진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 짧은 문장 하나가, 지금 그가 이곳까지 걸어온 유일한 이유였다. 그는 편지에 적힌 주소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왕도의 골목 사이로 발걸음을 옮겼다. 해는 이미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고, 그의 몸속에서는 또 다른 무언가가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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