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왕립 학술원의 서고는 책 냄새로 가득했다. 오래된 양피지와 마른 잉크의 냄새가 뒤섞여 코끝을 찔렀다. 천장까지 닿은 책장들이 미로처럼 늘어서 있었고, 그 사이로 마력등의 푸른 불빛이 은은하게 흘렀다.
이도현은 접수처에서 현자의 이름을 대며 면담을 청했다. 접수를 맡은 서기가 그의 얼굴을 한 번 살피더니, 곧 안쪽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다.
"이도현." 서고 안쪽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브를 걸친 현자가 책 더미 사이에서 걸어나왔다. 반년 전보다 조금 야윈 모습이었다. 볼이 홀쭉해지고 손등에는 핏줄이 도드라져 있었지만, 눈빛만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그 눈빛이 이도현을 위아래로 훑었다.
"연락도 없이 찾아오다니, 놀랍군." 현자가 담담하게 말했다.
"급한 일이 있어 왔습니다."
"급한 일이라." 현자가 그를 바라보며 되풀이했다. "자네 얼굴을 보니 그 말이 사실이겠군."
이도현은 다시 한 번 자신의 팔을 내밀었다. 소매를 걷어 올리자 검은 얼룩이 드러났다. 얼룩은 조금 전보다도 더 넓어져 있었다. 손목 근처에서 시작된 것이 이제는 팔꿈치 가까이까지 뻗어 있었다. 마치 그의 몸이 시간이 흐를수록 빠르게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현자는 그 얼룩을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다. 손끝으로 짚어보고, 눈을 감아 마력의 흐름을 살폈다. 그의 손끝이 얼룩의 경계를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그럴 때마다 미세한 마력의 파동이 손끝에서 흘러나와 얼룩 속으로 스며들었다.
"흠." 현자의 입에서 짧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결코 좋은 신호는 아니었다.
"이건... 대가 저주로군." 현자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대가 저주요?"
"회복 마법은 본질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만들어내는 마법이야. 잃어버린 살을, 부서진 뼈를, 멈춘 심장을 되돌린다는 건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일이지. 그 대가는 반드시 누군가가 치러야 해."
현자는 책장에서 낡은 서책 하나를 꺼내 펼쳤다.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서고의 정적을 갈랐다. 오래된 종이 특유의 마른 소리였다.
"보통은 그 대가가 술사의 마력으로 상쇄돼. 하지만 지나치게 큰 회복을, 지나치게 자주 행하면..."
"몸으로 대가를 치르게 됩니까."
"그렇지." 현자가 서책의 한 구절을 손끝으로 짚었다. "여기 보게. 대가 저주에 관한 옛 문헌이야. '치유는 곧 침식이다. 자연이 앗아간 대가를 술사의 육신이 대신 치른다.' 이 문장을 처음 봤을 때는 그저 비유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자네를 보니 그게 아니었어."
이도현은 그 문장을 되뇌었다. 침식. 그 단어가 자신의 팔에 새겨진 얼룩과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자네는 반년 동안 얼마나 많은 회복 마법을 썼나."
이도현은 잠시 생각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도원촌에서 매일같이 마을 사람들을 치료해왔다. 아이가 넘어져 무릎이 까지면 그 자리에서 나서서 고쳐주었고, 노인이 기침을 하면 굳이 마법으로 손을 봐주었다. 사소한 것부터 심각한 것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거의 매일 썼습니다."
"얼마나 자주?"
"하루에도 몇 번씩요. 큰 상처든 작은 상처든 가리지 않았습니다."
현자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그는 서책을 덮고 이도현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게 문제야. 자네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대가를 쌓아온 거야. 마지막 전투에서 서인의 팔을 치유한 게 결정타였겠지. 그 정도의 회복은 술사의 목숨을 요구할 만한 것이었으니까."
서인의 이름이 나오자 이도현의 가슴 한구석이 뜨거워졌다. 그날의 기억이 선명했다. 서인의 팔이 완전히 잘려나간 것을 마력을 쏟아부어 되돌린 순간, 그의 시야가 순간적으로 하얗게 변했던 것을.
"그때는... 다른 선택이 없었습니다."
"알아. 그 선택을 후회하라는 게 아니야." 현자가 고개를 저었다. "다만 그 대가가 지금 자네를 갉아먹고 있다는 걸 말해주는 것뿐이지."
이도현은 침을 삼켰다. 목이 타는 듯한 갈증이 느껴졌다. 서고 안의 공기가 갑자기 무겁게 느껴졌다.
"치료법이 있습니까."
"솔직히 말하면, 없어." 현자가 고개를 저었다. "대가 저주는 대가를 다 치를 때까지 진행돼. 유일한 방법은 대가를 상쇄할 만큼의 마력을 새로 얻는 것뿐인데, 그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야."
"불가능하다는 건... 방법이 아예 없다는 뜻입니까."
"방법이 없는 게 아니라, 그 방법을 치를 여력이 없다는 뜻이야." 현자가 씁쓸하게 웃었다. "막대한 마력을 한꺼번에 얻을 방법이 존재하긴 해. 하지만 그런 방법은 대개 그 자체로 목숨을 건 대가를 요구하지. 결국 같은 얘기야."
이도현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예상은 했지만, 직접 들으니 그 무게가 달랐다. 서고의 책장들이 갑자기 자신을 짓누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도현." 현자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궁금한 게 있네. 자네는 왜 그렇게까지 무리하며 마을 사람들을 치료했나. 사소한 병까지 자네가 직접 나서서 마법으로 고칠 필요는 없었을 텐데."
그 물음에 이도현은 순간 말을 잃었다.
"그건..." 그가 입을 열었지만, 말을 잇지 못했다.
머릿속에 도원촌의 얼굴들이 스쳐 지나갔다.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 다리를 저는 노인, 손이 성치 않은 농부들. 그들을 볼 때마다 그는 손을 뻗었다. 그 이유를 딱히 설명할 말이 없었다. 그저 눈앞에 아픈 사람이 있으면, 손을 뻗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힘을 가진 자는 그 힘을 아껴서는 안 된다.' 스승의 목소리가 문득 떠올랐다. '아끼는 순간, 그 힘은 죄가 된다.'
하지만 그 가르침을 현자에게 그대로 옮길 수는 없었다. 너무 오래된 말이었고, 지금의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현자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서책을 덮으며 말했다.
"저주의 근원을 되짚어보고 싶다면, 마지막 전투가 벌어졌던 곳을 다시 찾아가는 게 나을지도 몰라. 그곳에 남은 마력의 흔적이 뭔가 실마리를 줄 수도 있으니까."
"어디입니까."
"북쪽의 절벽 성채. 마지막 마왕이 봉인됐던 곳이지."
이도현은 그 이름을 마음에 새겼다. 절벽 성채. 그곳의 풍경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부서진 성벽과 검게 그을린 대지, 그리고 마지막 순간의 함성. 하지만 지금 당장 그곳으로 떠날 여력은 없어 보였다. 이미 몸이 예전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맙습니다, 현자님."
"도현." 현자가 그를 불러세웠다. "몸조심하게. 자네는... 생각보다 시간이 많지 않을지도 몰라."
그 말이 이도현의 가슴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시간이 많지 않다는 말. 그것이 얼마나 짧은 시간을 의미하는지, 현자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도현도 굳이 묻지 않았다.
+++
학술원을 나선 이도현은 왕도의 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고, 거리에는 하루 일을 마친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좌판을 정리하는 상인, 아이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아낙, 술집으로 향하는 표사들. 평범한 풍경이었다.
그 평범함이 오히려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현자의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자네는 왜 그렇게까지 무리하며 마을 사람들을 치료했나.' 그 질문에 그는 여전히 답을 찾지 못했다. 걸음을 옮기는 내내 그 물음이 그의 발밑을 따라다녔다.
'왜였을까.'
답을 찾으려 할수록 오히려 더 흐릿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는 그냥 손을 뻗었을 뿐이다. 아픈 사람을 보면 고쳐주고, 다친 사람을 보면 나서서 도왔다. 그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었고,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상의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 그게 정말 이유의 전부였을까.'
여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이 깊어 있었다. 그는 방으로 올라가 침대에 몸을 뉘었다. 창밖으로 왕도의 불빛이 하나둘 켜지고 있었다. 몸이 무겁게 침대에 파묻히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잠들기도 전에, 가슴이 갑자기 조여드는 느낌이 들었다.
뻑- 뻑-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마치 폐가 스스로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가슴 한가운데서 시작된 통증이 순식간에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뭐지.' 그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몸을 일으키려는 시도조차 무의미했다. 팔은 침대 위에 축 늘어진 채였고,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 떨림조차 그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호흡이 점점 짧아지고 얕아졌다. 눈앞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방 안의 사물들이 흐릿하게 겹쳐 보였다. 벽에 걸린 등불의 불빛조차 두 개, 세 개로 갈라져 보였다. 그의 나머지 시야마저도, 이제는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대로... 죽는 건가.' 그는 처음으로 그 생각을 명확하게 떠올렸다.
손을 뻗어 마력을 끌어올리려 했다. 하지만 몸 안의 마력조차 제대로 응집되지 않았다. 늘 손끝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던 그 익숙한 흐름이, 지금은 마치 막힌 수로처럼 끊겨 있었다. 마치 몸이 스스로를 거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왜... 안 되는 거지.'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결과는 같았다. 오히려 시도할수록 가슴의 통증이 더 심해졌다. 마력을 끌어올리려는 행위 자체가, 몸에게는 또 다른 부담이 되는 것 같았다.
창밖으로 왕도의 불빛이 흐릿하게 번져 보였다. 그 불빛 속에 윤서인의 얼굴이 겹쳐 떠올랐다. 아직 그녀를 만나지도 못했는데. 편지 한 장을 주고받은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녀가 보낸 편지에는 그다운 담백한 안부와, 그답지 않은 걱정이 조금 섞여 있었다.
'답장을... 써야 하는데.'
책상 위에 놓인 미완성의 편지가 떠올랐다. 반쯤 쓰다 만 그 편지의 마지막 줄은 아직 채워지지 않은 채였다. 무슨 말로 끝맺을지 고민하다가 미뤄둔 것이었다.
이도현의 의식이 서서히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그의 머릿속에 스친 것은, 완성하지 못한 편지의 답장 한 줄이었다.
'조금만 더... 살아야 한다.'
그리고 그 생각을 끝으로, 그의 눈앞은 완전히 암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