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몸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아니, 흔들리는 건 나 자신이었다.
의식이 물속에 잠긴 것처럼 흐릿했다가, 다시 수면으로 떠오르듯 밝아지기를 반복했다.
그 사이를 오갈 때마다 시야 끝이 조금씩 검게 지워졌다.
등의 상처는 이제 통증조차 무디게 느껴졌다.
처음엔 불로 지지는 것처럼 뜨거웠는데, 지금은 그냥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 같았다.
그게 더 무서웠다.
감각이 사라진다는 건 몸이 포기하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손끝을 움직여보려 했다. 반응이 없었다.
발끝을 움직여보려 했다. 역시 없었다.
살아 있다는 증거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숨소리조차 내 것 같지 않았다.
눈앞이 캄캄해지는 순간, 낯선 풍경이 스쳤다.
네모난 화면.
손가락이 그 위를 미끄러지듯 움직인다.
작은 상자들이 화면 안에 줄지어 있다.
가격이 적혀 있고, 별점이 적혀 있고, 리뷰가 달려 있다.
손가락이 화면을 두 번 두드리자 상자 하나가 확대됐다. 사진이 여러 장 넘어갔다.
익숙한 손짓이었다. 너무 익숙해서 오히려 이상했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 목소리였던 것 같다.
"이거 다음날 온다니까."
또 다른 목소리가 대꾸했다. 웃음이 섞인 목소리였다.
"그럼 지금 시켜. 뭘 고민해."
기억 속의 나는 웃으며 결제 버튼을 눌렀다.
간단했다. 너무 간단했다.
몇 번의 손짓, 몇 번의 터치. 그게 전부였다.
장면이 바뀌었다.
문 앞에 상자가 놓여 있다.
그 상자를 뜯는 손. 내 손이었다.
테이프를 손톱으로 긁어 뜯는 손끝의 감각까지 선명했다.
안에서 나오는 물건들.
포장을 뜯을 때 나던 바스락거리는 소리.
그 소리가 지금, 이 바위틈 속에서도 들리는 것 같았다.
왜 이런 기억이 지금 떠오르는 걸까.
이해할 수 없었지만, 몸의 어딘가는 그 기억을 알아보는 것 같았다.
손끝이, 손가락 마디마디가, 그 순서를 기억하고 있다는 느낌.
검색하고, 담고, 결제하고, 기다리고, 받는다.
그 반복된 순서가 몸에 새겨진 습관처럼 떠올랐다 사라졌다.
다시 어둠이 몰려왔다.
바위틈 밖에서 뭔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무거운 발소리.
돌아온 거다.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었다.
몸이 이미 도망칠 힘을 잃었다.
팔을 짚고 몸을 일으켜보려 했지만, 팔꿈치가 접히지 않았다.
다리도 마찬가지였다. 감각은 있는데 명령이 통하지 않았다.
몸과 정신 사이에 끊어진 선이 있는 것 같았다.
짐승의 그르렁거림이 바위틈 입구를 향해 다가왔다.
낮고 긁는 듯한 숨소리. 콧김이 바위 사이로 새어들었다.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피 냄새였다. 내 피 냄새인지, 아니면 놈이 이미 뭔가를 물어뜯은 뒤인지 알 수 없었다.
바위 틈새로 붉은 눈이 어른거렸다.
한 번, 두 번, 깜빡였다.
그 눈이 나를 정확히 찾고 있었다.
이번엔 정말로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하게도 두려움보다 먼저 온 건 허탈함이었다.
여기까지 와서, 이런 좁은 틈에서 끝나는 건가.
손이 저절로 앞으로 뻗어졌다.
의미도 없이, 그냥 뻗었다.
무언가를 붙잡으려는 것처럼.
그 순간, 머릿속에서 아까 본 화면이 다시 떠올랐다.
손가락으로 화면을 누르던 그 감각.
주문을 하던 그 순서.
검색하고, 담고, 결제하던 손짓.
이거였나.
이게 그 스킬의 진짜 방식이었나.
너무 늦게 알아차렸다는 생각이 스쳤다.
지금 알아도 뭘 할 수 있을까.
손끝조차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데.
그래도 몸은 그 기억을 따라가려 했다.
손가락을 접었다가 펴는 시늉. 화면을 누르는 시늉.
허공에 아무것도 없는데, 그 손짓만은 또렷하게 반복됐다.
허공에 흐릿한 빛이 어른거렸다.
글자 같은 것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조건 미충족 : 발동 불가]
그 메시지가 눈앞에서 흐려졌다가 다시 명확해졌다.
조건.
무슨 조건.
머릿속이 뒤죽박죽으로 뒤엉켰다.
돈이 필요한가. 아니면 물건이 필요한가.
아니면 그 순서를 정확히 따라야 하는 건가.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짐승의 앞발이 바위틈 입구를 긁는 소리가 들렸다.
돌 조각이 부서져 얼굴에 튀었다.
날카로운 파편이 뺨을 긋고 지나갔다.
따끔한 감각이 잠깐 선명해졌다가 다시 무뎌졌다.
이대로는 아무것도 못 한다.
손끝이 저절로 다시 앞으로 뻗어졌다.
뭔지도 모르는 조건을 향해, 그냥 부딪혀보는 심정으로.
기억 속의 그 손짓을 따라, 나는 허공에서 무언가를 찾는 시늉을 계속했다.
검색창을 누르는 시늉.
물건을 고르는 시늉.
장바구니에 담는 시늉.
결제 버튼을 누르는 시늉.
몸이 부서지고 있는데도, 손끝만은 그 순서를 놓지 않으려 했다.
이게 맞는 건지도 몰랐다. 이게 틀렸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의식이 다시 아득해졌다.
눈앞이 하얗게 번지기 시작했다.
그 하얀 빛 속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아주 또렷하게 들렸다.
"주문을 확인하시겠습니까."
그 말이 들리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건 꿈이 아니다.
너무나 익숙한 어조, 너무나 익숙한 리듬.
전생에서, 저 목소리를 몇 번이나 들었던가.
늦은 밤 침대에 누워 화면을 두드릴 때마다 나오던 그 문장.
무심하게, 기계적으로, 그리고 언제나 나를 만족시켰던 그 한 마디.
의식이 그 목소리를 붙잡으려는 순간, 시야가 완전히 새하얗게 뒤덮였다.
짐승의 발톱이 바위틈으로 파고드는 소리가 마지막으로 들렸고,
그 뒤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둠도, 빛도, 고통도, 소리도.
모든 것이 한순간에 지워졌다.
마치 화면이 꺼진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