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패배를 기억하는 요람

5화

한서은과의 수업은 매일 한 시간씩, 오전과 오후로 나뉘어 진행됐다. 겉으로는 순조로웠지만, 나는 매번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이 사람은 조금이라도 어색한 반응이 나오면 곧바로 캐물었다. "도련님, 방금 그 표정, 뭘 이미 알고 있다는 표정 같은데요." "그냥 어려워서요." "어려운 표정이 아니라 계산하는 표정이었습니다만." 정확했다. 하지만 정확하다고 인정하면 끝장이었다. 두 살짜리가 계산이라는 단어를 이해한다는 것부터가 문제였으니까. "계산이 뭔지도 몰라요." "그럼 방금 그 눈알 굴리는 건 뭐였을까요." "눈이 아파서요." "아프면 비비지, 왜 굴려요?" 말이 안 됐다. 나도 알았다. 그래도 밀어붙이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최대한 아이답게 눈을 깜빡이며 얼버무렸다. 다행히 한서은도 두 살짜리에게서 성인의 사고를 의심하는 건 무리라고 판단했는지, 더는 깊게 파고들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나를 관찰 대상으로만 취급하기로 마음을 바꾼 것 같았다. 수업 시간마다 노트에 뭔가를 적는 버릇이 생긴 걸 보면 확실했다. 뭘 적는지 몰라도 좋은 예감은 들지 않았다. 문제는 다른 데서 터졌다. 한서은이 상주 가정교사로 정식 채용된 지 두 달쯤 지났을 때, 왕도에서 사람이 왔다. 마차 소리부터 남달랐다. 저택 정문에 마차가 멈추는 소리를 듣고, 하녀들이 술렁이는 걸 보고, 나는 뭔가 잘못됐다는 걸 직감했다. 자작가에 예고 없이 찾아오는 손님이라면 대개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왕실 소속 마법원 감사관이라는 직함을 가진 남자였다. 회색 관복에 마법원 문양이 박힌 견장을 달고 있었는데, 그 문양이 번쩍거리는 방식이 딱 관료다웠다. 실력보다 권위를 먼저 보여주는 방식. "이강민 자작. 최근 자작가에서 특급 술식 교육을 시행 중이라는 보고가 있어 확인하러 왔습니다." 이강민의 얼굴이 굳었다. 나는 그날도 요람이 아니라 걸어다닐 나이였는데, 아버지 손을 잡고 응접실에 서 있었다. 손바닥에 땀이 났다. 아버지의 손도, 내 손도. "특급 술식이라니요, 그런 거 없습니다. 그냥 가정교사를 들인 것뿐입니다." "왕립 마법원 출신 교사를, 두 살짜리 아이에게, 정규 순서를 무시하고 가르친다는 첩보가 있습니다. 이건 왕실 규정 위반입니다." "규정 위반이요?" "미성년 마력 각성자는 반드시 왕립 마법원에 등록 후, 승인된 교육 절차를 따라야 합니다. 사적으로 특급 술식을 가르치는 건 불법이에요." 이강민이 뭐라 반박하려 했지만, 감사관은 손을 들어 막았다. 그 손짓 하나에도 위계가 실려 있었다. 자작보다 위에 있다는 걸 몸으로 보여주는 방식이었달까. "군부에서도 이 문제를 주시하고 있습니다. 최근 국경 정세가 불안한 상황에서, 등록되지 않은 강력한 마력 소유자가 있다는 건 위험 요소로 간주됩니다." 국경 정세라는 말에 내 귀가 확 곤두섰다. 전생의 그 전쟁이 이 시기에도 진행 중이거나, 곧 시작될 조짐이 있다는 뜻이었다.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두 살짜리 몸으로 감당할 수 있는 정보량이 아니었다. "등록을 거부하시면, 이후에 벌어지는 모든 일에 대해 자작가는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 그 말은 협박이었다. 포장만 정중했지, 내용은 협박이었다. 이강민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아버지도 이게 협박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다만 대응할 방법이 당장 없었을 뿐이다. 나는 그 순간 처음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다. 계산은 빨랐다. 등록을 거부하면 자작가가 위험해진다. 등록을 순순히 받아들이면 지금까지 쌓은 교육 방식이 통째로 뒤집힐 수 있다. 둘 다 나쁜 패였다. 그럼 세 번째 패를 만들어야 했다. "등록하면, 저는 어떻게 되나요?" 내가 물었다. 두 살짜리 목소리로 던진 질문에, 감사관이 흠칫하며 나를 봤다. 그 표정이 재밌었다. 아이가 말을 한다는 것 자체는 이미 알고 왔을 텐데도, 질문의 결이 다르면 반응이 달라지는 모양이었다. "등록하면 왕립 마법원 산하 특별 관리 대상이 됩니다. 정기적으로 검사를 받고, 성인이 되면 군부 배속이 우선됩니다." 군부 배속. 그 말에 등줄기가 다시 서늘해졌다. 전생에서 마력이 없어 군부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했던 나로서는, 이번 생에서 군부 소속이 되는 게 나쁜 일만은 아닐 수도 있었다. 실력만 있으면 위치가 확보되는 곳이니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성장한 뒤여야 했다. 지금 등록되면, 이후의 모든 교육 방식이 왕립 마법원의 정규 순서에 맞춰 강제될 것이었다. 회로부터 배우고 형식부터 익히는, 느리고 안전한 방식으로. 한서은이 그 방식이 아니라고 했던 그 방식. 회로부터가 아니라 성질부터 배우는 방식. 그게 사라질 수도 있었다. 나는 그 방식이 필요했다.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걸 나만 알고 있었으니까. "자작님, 결정을 서둘러주십시오." 감사관이 다시 압박했다. 손목에 찬 시계를 슬쩍 보는 태도까지, 시간이 곧 권력이라는 걸 아는 사람의 몸짓이었다. 이강민은 나를 한번 내려다본 뒤,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등록은 하겠습니다. 다만, 교육 방식은 저희 재량으로 두게 해주십시오." "그건 규정상 불가능합니다." "그럼 이 문제를 국왕께 직접 상소하겠습니다." 응접실 공기가 한 톤 낮아졌다. 감사관의 표정이 흔들렸다. 이강민이 실제로 그럴 배짱이 있는지 가늠하는 듯했다. 자작이 감사관 상대로 국왕까지 언급하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배짱이라기보다는 도박이었다. 이겨야만 하는 도박. "…자작가에서 그렇게까지 나오실 줄은 몰랐군요." "제 아들 문제입니다. 이 정도는 당연한 겁니다." 말은 담담했지만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 떨림을 보면서, 아, 이 사람이 진심으로 나를 지키려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전생엔 이런 어른이 없었다. 결국 감사관은 일주일 시한을 주고 돌아갔다. 마차가 정문을 빠져나가는 걸 지켜보던 아버지의 어깨가 그제야 조금 내려갔다. 그 일주일 동안 이강민은 왕도를 오가며 인맥을 총동원했다. 밤늦게 돌아와 서재에 틀어박히는 날이 이어졌고, 서하윤은 매일 밤 그 서재 문 앞을 오가며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나는 그 얼굴을 볼 때마다, 이 소동의 원인이 결국 나라는 걸 자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최도윤 제2왕자의 개입으로 특례가 승인됐다. 등록은 하되, 교육 방식은 자작가 재량으로 둔다는 조건이었다. "어떻게 왕자님이 개입하신 거예요?" 서하윤이 물었을 때, 이강민은 씁쓸하게 웃었다. 이겼는데도 웃는 얼굴이 밝지 않았다. "국왕 폐하께서 최근 군사력 강화에 관심이 많으시다더군. 조기 각성자를 잘 키우면 나중에 도움이 될 거라는 명분으로 설득했지." "그래도 다행이네요. 통했으니." "통했다기보다는… 팔린 거지." 이강민이 낮게 중얼거린 그 말이, 나는 오래 기억에 남았다. 조기 각성자를 나중에 도움이 될 전력으로 본다는 그 시선이, 왠지 불편했다. 전생에서 나는 늘 소모품이었다. 강해질수록 더 위험한 곳으로 밀려났고, 밀려난 자리에서 그대로 죽었다. 이번엔 아니어야 했다. 등록이라는 이름의 목줄이 이미 채워졌다는 걸, 그 순간엔 애써 모른 척했다. 한서은은 이 소동을 지켜보며 나를 다시 한번 유심히 살폈다. 안경 너머 눈빛이 평소보다 날카로웠다. "도련님, 방금 그 상황에서 왜 스스로 나서서 질문하셨어요? 보통 두 살짜리라면 무서워서 울음을 터트릴 상황인데요." "그냥… 무서워서 나온 말이었어요." "거짓말 하나는 서투르시네요." 그녀는 안경을 고쳐 쓰며 웃었다. 처음 보는 웃음이었다. 비웃음도 아니고, 그렇다고 순수한 호의도 아닌, 뭔가를 확인했다는 웃음. 나는 그 웃음이 오래 마음에 걸렸다. 그날 밤, 이강민이 왕도에서 가져온 서류 뭉치를 정리하다가 흘린 신문 한 장을 나는 몰래 주워 읽었다. 촛불 아래 글자를 하나씩 눈으로 훑는 데도 시간이 걸렸다. 두 살짜리 눈은 아직 시력조차 완전하지 않았다. 국경 지대 순찰 강화, 유란 제국 사절단 방문 예정이라는 짧은 기사였다. 그리고 그 기사 하단에, 사절단을 이끌 인물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강신우. 그 이름을 본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종이를 쥔 손끝이 차가워졌다. 아직 전쟁은 시작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이름이 이 시점에 벌써 등장했다는 건, 시간이 내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흘러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신문을 다시 서류 더미 속에 조심스레 끼워 넣었다. 아무도 모르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하지만 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뛰고 있었다. 등록이라는 목줄, 국경의 불안, 그리고 그 이름. 세 가지가 한꺼번에 겹쳐지는 게 우연일 리 없었다. 우연이 아니라면, 나는 이미 늦은 걸까.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