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야근 마치고 나온 밤 열한 시, 어깨가 뻐근했다.
주 4일제라던 회사 슬로건은 다 어디 갔는지, 이번 주는 5일 내내 야근이었다.
'퇴근이 이렇게 늦으면 저녁 6시 퇴근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나는 속으로 사장님한테 항의서를 제출했다. 물론 실제로는 절대 못 낼 항의서였다.
골목 어귀에 웬 고양이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하얗고 통통한 녀석이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서 반짝이는 그 하얀 털을 보는 순간, 뇌 안에서 뭔가 뚝, 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귀엽다.' 나는 즉시 무릎을 굽혔다.
귀엽고 아름다운 것 앞에서는 사고력이 마비되는 게 내 특기였다.
원래도 그랬다.
회사에서는 나름 꼼꼼하다는 소리를 듣던 나였는데, 고양이나 강아지, 심지어 소품샵 캐릭터 인형만 보면 회로가 그냥 끊겼다.
전에 편의점에서 산리오 캐릭터 랜덤 뽑기를 열두 번 연속으로 돌린 적도 있었다.
그날 통장 잔고가 반토막 났지만, 후회는 없었다.
"이리 와, 이리 와..." 나는 손을 뻗으며 속삭였다.
목소리를 최대한 부드럽게 깔았다.
연습해서 만든 목소리는 아니고, 그냥 자연스럽게 나오는 톤이었다.
고양이는 도망가지 않았다.
대신 저 앞, 도로 쪽으로 슬금슬금 걸어갔다.
'저기 위험한데.'
골목 끝은 왕복 4차선 도로였다.
신호등도 없고 가로등도 흐릿했다.
낮에도 차들이 씽씽 달리는 곳이라, 밤엔 더 위험했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발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뭔가에 이끌리듯 따라 걸었다.
'저기 위험한데, 저기 위험한데.'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계속 울렸는데, 몸은 별개로 움직였다.
이런 걸 두고 이성과 본능의 분리라고 하는 건가.
아니, 그냥 고양이한테 미쳐서 판단력을 상실한 거였다.
'차 안 오는 것만 확인하고 데려오면 되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생각이 짧았다.
인생 30여 년 살면서 이렇게 생각이 짧았던 순간이 몇 번이나 있었을까 싶었지만, 그중에서도 최고봉이었다.
수능 전날 밤새 웹소설 정주행했던 것도 어지간했는데, 이번 건 그거보다 한 수 위였다.
부아아아앙!
트럭 한 대가 그대로 커브를 돌아 나왔다.
헤드라이트가 시야를 새하얗게 태웠다.
세상이 슬로모션으로 돌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영화에서나 보던 그런 장면이었다.
근데 그게 지금 내 눈앞에서 실시간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아.' 그 짧은 순간에도 나는 생각했다.
'이거 죽는 거 아냐?'
죽는 거였다.
몸이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공중에 뜬 채로, 나는 마지막으로 시선을 돌렸다.
고양이는 이미 반대쪽으로 튕겨 나가 무사히 도망친 뒤였다.
'저 자식, 튀는 건 또 빠르네.'
다행이다, 라고 생각한 게 내 마지막 사고였다.
그 뒤로는 아무것도 없었다.
암전.
엔딩 크레딧도 없이 그냥 화면이 꺼지는 느낌이었다.
*
눈을 떴을 때 나는 하얀 공간에 서 있었다.
하얗다기보다는... 그냥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었다.
색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느낌이었다.
바닥이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은데, 서 있는 느낌은 났다.
물리법칙이 알아서 대충 타협하고 있는 듯한 그런 공간이었다.
'여기가 그거구나.' 나는 침착하게 상황을 받아들였다.
어쩐지 침착했다.
덕후 인생 30년, 이세계물 웹소설을 몇백 권은 읽었으니 이 정도 상황에 안 놀랄 자신은 있었다.
사실 놀라는 것보다 신나는 마음이 3할쯤 섞여 있었다.
'혹시 나도 회귀나 환생 하는 건가?' 하는 기대감도 슬쩍 고개를 들었다.
"저기요." 나는 아무한테나 말을 걸어보았다.
목소리가 이상하게 울렸다.
반사되는 벽도 없는데 에코가 걸리는 느낌이었다.
대답은 없었다.
대신 저 멀리서 작은 형체 하나가 허둥지둥 걸어오는 게 보였다.
하얀 날개.
꿀색 생머리.
머리 위로 은은하게 도는 동그란 광환.
딱 봐도 다섯 살짜리 어린애 같은 외형이었는데, 등에 날개가 달려 있고 머리 위엔 링이 떠 있었다.
'천사다.' 나는 확신했다.
무슨 게임 캐릭터 뽑기 배너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비주얼이었다.
아니, 그거보다 더 완성도가 높았다.
디자이너가 야근하면서 정성 들여 뽑은 원화 그 자체였다.
"츄릅..." 나도 모르게 소리가 나왔다.
너무 귀여웠다.
이 상황에서도 귀여운 건 귀여운 거였다.
사람이 죽어서도 못 고치는 병이 있다면, 그게 바로 이거였다.
그 아이는 손에 뭔가를 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작은 지팡이 같은 물건이었는데, 옆구리에 낀 서류 뭉치와 함께 균형을 잘 못 잡는 눈치였다.
서류가 자꾸 미끄러지려는 걸 팔꿈치로 눌러가면서 걷는 모습이, 딱 봐도 신입 티가 났다.
저 표정 알지, 나도 신입 때 저랬는데.
"어, 죄송, 잠시만요, 통과하실 대상님이시죠..." 아이는 서류를 뒤적이며 중얼거렸다.
걸음이 빨라졌다.
서류가 흔들렸다.
그리고 발이 걸렸다.
"으앗!" 아이가 앞으로 넘어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무릎 굽히고 손 뻗는 거, 이건 몸에 새겨진 습관이었다.
고양이든 아이든 넘어지는 걸 보면 몸이 먼저 나갔다.
방금 그 습관 때문에 죽었는데도, 죽은 다음에도 똑같은 짓을 하고 있었다.
'역시 사람은 안 변하는구나.' 스스로에게 헛웃음이 나왔다.
그 결과, 나는 아이가 들고 있던 지팡이 끝을 그대로 붙잡아버렸다.
그리고... 세상이 멈췄다.
정말로 멈췄다.
아이의 머리카락이 흩날리던 게 그대로 정지 화면처럼 굳었다.
공기 중에 떠 있던 서류 한 장도 그대로 얼어붙었다.
[경고] 라는 글자가 허공에 떴다.
명조체로, 아주 위압적으로.
[비인가 대상의 신기(神器) 접촉이 확인되었습니다.]
'응?' 나는 눈을 깜빡였다.
'신기? 무슨 게임 아이템 등급 같은 이름인데.' 하는 생각이 스쳤다.
지금 이 상황에 별걸 다 신경 쓰고 있었다.
아이의 표정이 새하얗게 굳었다.
방금까지 넘어졌던 것도 잊은 얼굴이었다.
눈에는 벌써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아, 안 돼요, 이건, 그거, 놓으세요, 지금 당장요!" 아이가 다급하게 외쳤다.
나는 놓으려고 손을 폈다.
늦었다.
[해당 영혼은 지구 표준 윤회 대기열에서 즉시 제외됩니다.]
찌잉- 하는 소리와 함께 눈앞이 아득해졌다.
'이게 뭔 소리야.'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윤회 대기열? 표준? 지구 표준이면 다른 표준도 있단 소리야?' 온갖 의문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방금 넘어지는 애 잡아준 게 죄냐고 묻고 싶었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입은 벌어졌는데 소리가 안 나오는, 꿈속에서 소리치는 것 같은 그 느낌이었다.
아이는 지팡이를 품에 꼭 끌어안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표정이... 아까와는 다르게 아주 심각했다.
딱 상사한테 큰 실수 저지른 신입사원 얼굴이었다.
어라, 왠지 그 표정에 되게 공감이 갔다.
나도 첫 회사에서 견적서 자릿수 하나 잘못 넣었다가 부장님한테 불려간 적 있었는데, 그때 내 얼굴이 딱 저랬을 것 같았다.
"저기요, 저 그냥 넘어지는 거 잡아준 거밖에 없는데요." 나는 억울함을 담아 말했다.
목소리가 겨우 나왔다.
그것도 되게 다급하게.
"그건 알아요, 아는데..." 아이는 말을 흐렸다.
"그런데요?"
"이거... 신기예요. 사람이 함부로 만지면 안 되는 물건이라서요." 아이가 지팡이를 등 뒤로 숨기며 말했다.
'그럼 애초에 그걸 흔들면서 오지 말지.' 나는 속으로 태클을 걸었다.
입 밖으로는 안 냈다.
죽은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눈치 게임을 하고 있었다.
사회생활 짬바는 죽어서도 안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저... 큰일 났어요." 아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울음이 터지기 직전의 그 톤이었다.
"큰일이 어느 정도로 큰일인데요?" 나는 물었다.
솔직히 궁금했다.
내가 뭘 잘못 만졌길래 세상이 멈추고 시스템 메시지까지 뜨는지.
"그게... 설명하기가 좀..." 아이가 시선을 피했다.
주변 공간이 웅웅거리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뭔가, 아주 커다란 게 이쪽으로 오는 느낌이었다.
공기 자체가 무거워지는 느낌, 마치 거대한 존재가 다가올 때 압력이 먼저 도착하는 그런 느낌이었다.
[상급 관리자 호출됨.]
'상급 관리자?' 나는 그 단어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회사에서 팀장 위에 부장, 부장 위에 상무 있는 것처럼 여기도 그런 체계가 있는 건가.' 별 생각을 다 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상황을 이해하려는 발악이었다.
아이의 얼굴이 더 새하얗게 질렸다.
날개가 파닥거렸다.
불안할 때 나오는 습관인 것 같았다.
"저... 저 지금 엄청 혼날 거예요." 아이가 울먹였다.
목소리가 완전히 갈라졌다.
이제 진짜 울기 시작할 것 같았다.
덩달아 나도 손이 떨렸다.
죽은 지 5분도 안 됐는데, 벌써 사고를 친 느낌이었다.
이거 원, 참 아이러니했다.
살아있을 때도 이랬는데, 죽어서도 똑같이 사고를 치는구나.
운명이란 게 참 일관성 있다고 해야 할지, 나란 인간이 참 한결같다고 해야 할지.
공간이 점점 더 크게 진동했다.
발밑이 없는데도 발밑이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저 멀리, 하얀 공간의 끝에서 뭔가... 아주 거대한 그림자가 서서히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