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용사님, 저한테 기대세요

3화

야월골의 아침은 늘 안개가 먼저 도착했다. 낮게 깔린 회색 안개가 골목 사이사이를 채우고 나서야 겨우 사람들의 발소리가 뒤따르는, 그런 동네였고, 하준의 가게는 그 안개가 채 가시기도 전에 문을 여는 몇 안 되는 곳 중 하나였다. 가게 문이 열리기도 전, 뒷문 쪽에서 익숙한 인기척이 났다. 달캉— 문틀이 살짝 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빵집 점원 정민아가 살그머니 들어왔는데, 그녀는 늘 그렇듯 밀가루가 하얗게 묻은 앞치마도 벗지 않은 채였고, 볼에는 아직 화덕의 열기가 남은 듯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오빠, 어제 손님 많았어요?" 민아는 인사도 하기 전에 팔을 뻗어 하준의 목을 감았고, 그 동작이 얼마나 자연스러운지, 마치 매일 아침 반복해온 의식처럼 몸에 배어 있었다. 활기찬 목소리에 하준은 무심하게 그녀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추고는, 곧바로 몸을 떼며 대답했다. "그럭저럭. 넌 오늘도 빵 남았니." 그 짧은 대답 속에는 다정함도, 그렇다고 차가움도 없었으나, 민아는 그 담담한 온도를 이미 오래전부터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있었으니, 처음 몇 번은 서운함을 느꼈을지 몰라도 지금은 오히려 그 무심함이 편안하다는 걸 그녀도 알고 있는 듯했다. 민아는 앞치마 주머니에서 아직 온기가 남은 빵 하나를 꺼내 내밀었고, 손끝에 닿는 온도가 마치 그녀 자신의 마음 같아서, 하준은 그것을 받아 카운터 뒤 선반에 올려놓으며 대신 작은 포션 병 하나를 그녀 손에 쥐여주었는데, 그 안에는 피로 회복에 쓰이는 저급 포션이 들어 있었다. "이거, 요즘 다리 아프다고 했잖아." 민아의 눈이 순간 커졌다가, 곧 감사와 미안함이 섞인 표정으로 바뀌었다. "이런 거 자꾸 주면 안 되는데…… 오빠도 벌어야 사는 사람인데." 말끝을 흐리는 그녀에게 하준은 별일 아니라는 듯 웃어 보였지만, 속으로는 이미 다른 계산이 돌아가고 있었다. '이런 애정은 부담스럽지 않아서 좋아. 딱 이 정도가 적당해.' 민아는 포션 병을 두 손으로 감싸 쥐더니 앞치마 주머니에 조심스럽게 넣었고, 그 손길이 마치 보물을 다루듯 조심스러워서, 하준은 잠시 그녀의 표정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거두었다. 민아와의 관계는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주고받는 거래에 가까웠으니, 그녀는 외로움을 달래고 하준은 몸의 긴장을 풀 상대가 필요했을 뿐, 어느 쪽도 그 이상을 바라지 않았기에 오히려 편안했다. '그러니까 이대로면 돼. 서로 상처받을 일도 없고.' 민아가 가게 안쪽 창문으로 슬쩍 밖을 내다보더니, 벌써 화덕 앞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됐다는 듯 하준의 뺨에 짧게 입술을 대고는 서둘러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고, 하준은 그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카운터 위에 놓인 장부를 펼쳐 오늘 들어올 재고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민아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골목 저편에서 또 다른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엔 걸음걸이부터 달랐는데, 또각또각 울리는 굽 소리가 마치 자신의 존재를 알아달라는 듯 일부러 크고 느리게 울렸으니, 하준은 그 소리만으로도 누가 오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포목상의 아내인 최여사였다. 그녀는 늘 그렇듯 화려한 옷차림에 향수를 진하게 뿌리고 있었지만, 표정에는 감출 수 없는 공허함이 배어 있었는데, 값비싼 옷깃 위로 드리운 그림자가 마치 그녀의 속마음을 대신 말해주는 듯했다. "요즘 남편이 밤늦게까지 안 들어와서 말이야." 최여사가 진열대를 둘러보며 흘리듯 내뱉은 말에, 하준은 놓치지 않고 반응했다. "그렇게 바쁘신가요? 사모님 건강도 챙기셔야 하는데." 그 한마디에 최여사의 눈빛이 순식간에 부드러워졌고, 마치 오랫동안 아무도 자신의 안부를 묻지 않았다는 듯, 그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렇지…… 다들 내 겉모습만 보고 부러워하지, 속이 이렇게 텅 빈 줄은 아무도 몰라." 최여사는 진열대 유리를 손끝으로 쓸어내리며 말을 이었고, 그 손끝이 유리 위에 남긴 자국이 마치 그녀가 지나온 시간의 흔적처럼 흐릿하게 남았다. "남편은 요즘 젊은 아가씨들 만나느라 정신없나 봐. 나는 그냥 집에서 화초처럼 앉아 있으면 되는 사람이고." 하준은 그 말속에 숨은 씁쓸함을 읽어내며, 잠시 뜸을 들이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사모님 같은 분이 그런 대우를 받으시면 안 되죠." 짧은 위로였지만, 그 말이 최여사의 마음속 어딘가를 정확히 건드렸는지, 그녀는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하준은 그 틈을 타 값이 가장 비싼 회복 포션을 슬쩍 내밀었다. "이건 마음의 피로에도 도움이 된다고들 하더라고요. 한번 드셔보세요." 효능이 다소 과장된 설명이었지만, 최여사는 이미 그 말에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이며 지갑을 열었고, 하준은 속으로 담담하게 계산을 마쳤다. '외로운 사람일수록 값을 따지지 않는다.' 최여사는 포션 병을 소중하게 두 손으로 감싸 쥐고는, 마치 그것이 정말로 자신의 마음을 치유해줄 것처럼 가슴에 품었으며, 지갑에서 꺼낸 동전을 세는 손끝이 살짝 떨리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고마워요. 여기 오면 그나마 숨이 좀 트이는 것 같아." 그 말을 남기고 최여사가 값을 치르고 가게를 나선 뒤, 하준은 카운터에 놓인 동전을 세며 옅게 웃었는데, 이런 하루하루가 그에게는 안정이었고 동시에 그가 세운 방어벽의 일부였다. 동전이 쌓이는 소리, 딸그락— 그 소리를 들으며 하준은 잠시 눈을 감았고, 이 작은 반복이 자신을 지탱해주는 유일한 리듬이라는 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고, 오직 필요한 만큼의 온기와 이익만 주고받는 관계, 그것이야말로 야월골에서 살아온 그가 터득한 유일한 생존법이었으니까. '마음을 주면 결국 빼앗기게 돼. 그러니……' 그 다짐은 이미 수백 번도 넘게 되풀이해온 것이었는데, 그럴 때마다 하준의 머릿속에는 언제나 같은 장면이 떠올랐다. 누군가의 냉소적인 목소리, 그리고 등을 돌리던 뒷모습. "넌 그냥 쓰다 버리면 되는 거잖아." 오래전 누군가 그렇게 말했을 때, 하준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서 있었고, 그날 이후로 그는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다시는 누구에게도 그런 취급을 받지 않겠다고, 아니, 그보다 먼저 누구에게도 그런 마음을 주지 않겠다고. 그러니 지금처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그가 지킬 수 있는 최선의 방식이었다. 가게 안은 다시 조용해졌고, 하준은 선반을 정리하며 오후 손님들을 맞을 준비를 했는데, 창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유리창 위로 어른거리며 오늘 하루도 별다를 것 없이 흘러갈 거라는 안도감을 주었다. 그러나 그날 오후,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검은 갑옷의 잔영을 보았을 때, 하준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그 자신도 눈치채지 못한 채 지나갔다. 그 갑옷은 아주 짧은 순간, 거의 눈 깜빡할 사이에 나타났다가 사라졌을 뿐인데도, 하준의 심장은 이유도 모른 채 빠르게 뛰기 시작했고, 손에 들고 있던 포션 병이 하마터면 바닥으로 떨어질 뻔했다. '저건…… 왜……' 그는 저도 모르게 창가로 다가가 밖을 살폈지만, 이미 그 검은 잔영은 골목 끝으로 사라진 뒤였고, 안개만이 다시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분명 잘못 본 거겠지. 그런 게 여기 있을 리가……' 그렇게 되뇌면서도, 하준의 가슴 한구석에는 설명할 수 없는 불안이 서서히 스며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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