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치트 직업, 자유인

3화

눈을 떴을 때, 준호는 낯선 공간에 서 있었다. 돌벽으로 둘러싸인 좁은 회랑, 축축한 공기가 코끝을 스쳤다. 이끼 냄새. 어딘가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똑똑 울렸다. [특수 공간: 균열 잔재 - 시험의 회랑] [클리어 조건: 모든 관문 통과] 관문이라니. 또 시작이네. 준호는 목을 좌우로 꺾었다. 우드득. 관절 소리가 회랑 안에 낮게 퍼졌다. 준호는 앞으로 걸었다. 발밑에서 자갈 부딪는 소리가 났다. 첫 번째 관문은 그림자 늑대 세 마리였다. 눈이 붉은 그것들이 낮게 몸을 낮췄다. 으르렁. 대단할 것도 없었다. 준호는 검을 뽑았다. 첫 번째 늑대가 달려들었다. 검이 한 번 그었다. 늑대의 몸이 스르륵 검은 재로 흩어졌다. 두 번째 늑대가 옆구리를 노리고 뛰어올랐다. 준호는 반보 물러서며 검을 아래에서 위로 올려쳤다. 두 번째 늑대도 재가 되어 흩어졌다. 세 번째 늑대는 그 자리에서 뒷걸음질을 쳤다. 준호는 그쪽으로 걸어갔다. 도망갈 데는 없어. 검이 세 번째로 움직였다. 늑대들이 차례로 쓰러졌다. 준호는 검을 검집에 넣으며 손등으로 이마를 훔쳤다. 땀도 안 나는데 왜 이런 습관이 남아있나. 두 번째 관문은 화살이 사방에서 날아오는 좁은 통로였다. 통로 양쪽 벽에 작은 구멍들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퍽. 돌바닥에 화살 하나가 박혔다. 준호는 벽을 타고 움직였다. 발끝으로 벽을 짚고, 몸을 낮추고, 다시 벽을 짚었다. 퍽. 퍽. 화살이 옷깃만 스치고 지나갔다. 옷깃이 살짝 찢어졌다. 이거 잘못하면 진짜 맞겠는데. 준호는 속도를 더 올렸다. 통로 끝에 다다랐을 때, 마지막 화살 하나가 뒤통수를 노리고 날아왔다. 준호는 몸을 반쯤 틀어 화살을 피하며 그대로 바닥에 미끄러지듯 굴렀다. 화살이 벽에 박혔다. 떠억. 준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털었다. 귀찮게 됐네. 세 번째 관문은 커다란 돌문이었다. 문 전체에 복잡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그 위로 글자가 빛을 냈다. [수수께끼: 하나이면서 모두인 것은?] 준호는 문 앞에 서서 잠시 생각했다. 하나이면서 모두인 것. 물이라고 해야 하나. 흘러가면서 어디든 스며드니까. 아니, 그건 좀 억지 같고. 시간이라고 해야 하나. 누구에게나 똑같이 흐르니까. 그것도 뭔가 아닌 것 같은데. 준호는 팔짱을 끼고 문을 올려다보았다. 자기 자신이라고 해야 하나. 하나의 존재이면서, 그 안에 수많은 순간과 생각과 얼굴을 담고 있으니까. 준호는 답을 말했다. 문에 새겨진 글자가 한 번 크게 빛났다. 그러자 문이 스르륵 열렸다. 맞혔네. 준호는 어깨를 으쓱이며 문 안으로 들어갔다. 끝에는 낡은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받침대 위에 덩그러니. [클리어 보상: 상자를 개봉하시겠습니까?] 뭔가 대단한 게 나오길 바랐다. 검이든, 갑옷이든. 전설급 반지 같은 것도 괜찮고. 준호는 상자로 다가가 뚜껑에 손을 얹었다. 나무 뚜껑은 오래되어 삐걱거렸다. 준호는 상자를 열었다. 끼이익. [획득: 낡은 낚싯대] 낚싯대? 준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게 뭐야. 준호는 낚싯대를 들어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손잡이는 갈라져 있었고, 낚싯줄은 반쯤은 삭아 있었다. 낚싯바늘은 녹이 슬어 붉게 변색되어 있었다. 이걸 보상이라고 준다고. 세 개의 관문을 뚫고, 늑대를 썰고, 화살을 피하고, 수수께끼까지 맞혔는데. 낚싯대라니. [특수 공간 클리어. 밖으로 이동합니다.] 빛이 다시 시야를 덮었다. 눈을 떴을 때, 준호는 마을 입구 근처에 서 있었다. 마을로 돌아왔을 때, 정도현이 아직도 입구 앞에 서 있었다. 팔짱을 낀 채로 벽에 기대선 자세였다. 뭐 나왔냐. 정도현이 물었다. 낚싯대요. 준호가 낚싯대를 들어 보였다. 정도현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그다음 입꼬리가 슬쩍 비틀어졌다. 낚싯대? 그거 진짜야? 정도현이 다가와 낚싯대를 살폈다. 몰라요. 상자 열었더니 이게 나왔어요. 준호가 말했다. 정도현이 픽 웃었다. 운도 지지리 없네. 정도현이 낚싯대를 손끝으로 툭툭 건드렸다. 이거 들고 낚시나 다니게 생겼다. 준호는 미간을 찌푸렸다. 웃을 일이에요? 준호가 되물었다. 웃을 일이지. 남들은 무기 나오고 갑옷 나오는데 넌 낚싯대잖아. 정도현이 돌아섰다. 가면서도 어깨를 들썩이며 웃는 게 등 뒤로 보였다. 준호는 그 뒷모습을 향해 낮게 혀를 찼다. 저러니까 정이 안 가지. 준호는 그 낚싯대를 들고 태호의 도구점으로 향했다. 도구점은 마을 골목 안쪽, 낡은 목조 건물이었다. 짙은 원두 냄새와 쇠 냄새가 뒤섞여 났다. 문 앞에 서서 준호는 문을 밀었다. 덜그럭. 문에 달린 방울이 울렸다. 태호가 계산대 뒤에서 고개를 들었다. 뭐야, 이거. 태호가 낚싯대를 받아 들었다. 특수 공간에서 나온 보상이야. 준호가 말했다. 태호의 손가락이 낚싯대 표면을 훑었다. 손끝이 낚싯대의 갈라진 부분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 이거 예사 물건이 아닌데. 태호가 낮게 말했다. 뭐가 예사 물건이 아닌데, 다 삭았잖아. 준호가 어깨를 으쓱였다. 겉만 봐서 그래. 태호가 낚싯대를 불빛 쪽으로 들어 올렸다. 손잡이 안에 뭔가 새겨져 있어. 태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준호는 낚싯대를 다시 살펴보았다. 손잡이 안쪽, 아주 작게 새겨진 문양이 보였다. 가느다란 선들이 얽혀 만든 원형 문양이었다. 이게 뭔데. 준호가 물었다. 나도 몰라. 근데 이런 문양은 아무 데나 새기지 않아. 태호가 대답했다. 태호는 서랍을 열어 낡은 확대경을 꺼냈다. 렌즈로 문양을 다시 들여다보며 미간을 좁혔다. 이거 봐, 이 선들. 규칙이 있어. 아무렇게나 그린 게 아니야. 태호가 손끝으로 문양의 흐름을 짚었다. 준호는 옆으로 몸을 기울여 문양을 다시 보았다. 그냥 낚싯대에 웬 이런 게 있나 싶었다. 이거 팔면 값 좀 쳐줘? 준호가 물었다. 팔지 마. 태호가 딱 잘라 말했다. 왜. 준호가 되물었다. 이런 문양 새겨진 물건은 그냥 도구가 아니야. 뭔가에 쓰이던 물건이야. 태호가 말했다. 한번 써봐. 태호가 낚싯대를 다시 건넸다. 준호는 낚싯대를 받았다. 손에 쥔 순간, 뭔가 이질적인 감각이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뭐지 이거. 손바닥에 닿은 손잡이가 서늘하게 식어 있었다. 낚싯대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마치 뭔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준호는 낚싯대를 든 채로 굳었다. 태호도 그 떨림을 눈치챈 듯 표정이 딱딱해졌다. 지금... 떨리는 거 맞지. 태호가 물었다. 준호는 대답하지 못했다. 낚싯줄 끝이 저절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마치 물속에 던져진 것처럼.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