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정원에서의 그 대화 이후, 서아와 나는 서로에게 조금 더 편해졌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밤이면, 우리는 신전 뒤편 정원 벤치에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 벤치는 오래된 돌벤치였는데, 표면이 매끈하게 닳아 있어서 앉으면 서늘한 감촉이 옷 위로도 느껴졌다.
정원에는 신전 사제들이 심은 흰 꽃나무가 몇 그루 서 있었고, 밤이 되면 그 꽃향기가 더 짙어졌다.
서아는 그 향기를 좋아했다.
"이 냄새 맡으면 마음이 편해져요."
서아가 그렇게 말할 때마다 나는 별다른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우리는 대개 그날 있었던 임무 이야기, 파티원들의 실없는 다툼, 다음 전투에 대한 걱정 같은 것들을 주고받았다.
깊은 이야기는 잘 하지 않았다.
서아도 나도, 서로의 사정을 캐묻는 성격이 아니었다.
어느 늦가을 밤, 서아가 먼저 물었다.
그날은 유난히 바람이 찼고, 서아는 두 손을 무릎 위에 겹쳐 올린 채 조금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도윤 씨는 가족이 있으세요?"
나는 그 질문에 한참 대답하지 못했다.
바람이 나무 사이를 지나가는 소리만 한동안 이어졌다.
서아는 내 침묵을 눈치채고, 화제를 돌리려 했다.
"아, 대답 안 하셔도..."
"괜찮아요."
나는 그렇게 말을 끊었다.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었다.
"저는 다섯 살 때 시장 골목에서 발견됐어요."
서아의 눈이 커졌다.
서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부모가 누군지, 이름이 뭐였는지도 몰라요. 지금 이름은 저를 거둬준 기사단장님이 지어주신 거예요."
나는 담담하게 그렇게 말을 이어갔다.
"강씨 성을 가진 기사단장님이 저를 거둬주셔서 강도윤이 됐죠."
"그럼... 도윤 씨는 원래 이름이 없었던 거예요?"
서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네. 지금까지 원래 이름을 찾을 방법도 없었고요."
나는 그렇게 대답하며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별은 몇 개 보이지 않았고,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다.
"용사로 선택된 것도, 사실 실력보다는 운이 좋았던 거예요. 그날 마침 신전에 있었던 게 저였을 뿐이지."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서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목소리가 아까보다 조금 커져 있었다.
"운이 좋아서 선택된 게 아니라, 도윤 씨가 그럴 만한 사람이라서 선택된 거예요."
나는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대신 서아의 옆얼굴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서아의 뺨은 바람에 조금 붉어져 있었고, 입술은 꾹 다물려 있었다.
한참 정적이 흘렀다.
"저도 비슷해요."
서아가 나직하게 말했다.
"신전 문 앞에 놓여 있었대요. 그것도 아기 때 이야기라, 저는 기억도 못 하고요."
나는 고개를 돌려 서아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사제들이 저를 무시하는 거예요. 진짜 신의 아이가 아니라, 그냥 버려진 아이라고."
서아의 목소리가 아주 조금 떨렸다.
"어릴 때는 그게 너무 억울해서 밤에 혼자 울기도 했어요."
서아가 덧붙였다.
"지금은...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살아요."
나는 그 손을 조용히 잡았다.
손끝이 차가웠다.
서아는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곧 그 손을 마주 쥐었다.
우리는 한동안 그렇게 손을 맞잡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원의 흰 꽃나무 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만 들렸다.
"우리 둘 다,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사람들이네요."
내가 그렇게 말했다.
서아가 작게 웃었다.
"그러니까 서로 알아봤나 봐요."
그날 밤, 서아는 늦게까지 정원을 떠나지 않았다.
우리는 별다른 말 없이 그저 나란히 앉아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느꼈다.
그날 밤 이후, 우리는 서로에게 가장 깊은 곳까지 나눈 사이가 되었다.
다른 파티원들도, 심지어 박현우도, 우리 두 사람 사이의 그런 이야기는 알지 못했다.
그건 오직 우리 둘만의 비밀이었다.
가끔 파티 안에서 누군가 내 과거를 캐물으면, 서아는 슬쩍 화제를 돌려주었다.
나도 서아가 사제들에게 무시당하는 순간을 보면, 굳이 나서지 않고 조용히 곁에 서 있어 주었다.
그것이 우리가 서로를 지키는 방식이었다.
동굴 안, 물방울 소리가 여전히 똑, 똑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그 기억에서 서서히 빠져나와 눈을 떴다.
동굴 벽은 축축했고, 이끼 냄새가 코끝에 스며 있었다.
몸을 조금 움직이자, 비늘 같은 감촉이 바위에 스치는 소리가 났다.
동굴 입구로 새벽빛이 희미하게 스며들고 있었다.
서아가 다시 올 시간까지는 아직 몇 시간이 남아 있었다.
나는 몸을 일으켜 동굴 밖으로 나갔다.
바깥은 아직 서늘했고, 풀잎마다 이슬이 맺혀 있었다.
어제 박현우가 다녀간 흔적, 발자국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었다.
발자국은 동굴 입구에서부터 숲 쪽으로 이어져 있었는데, 크기와 걸음 간격을 보니 서두른 흔적이 역력했다.
나는 그 발자국을 한참 내려다보다가, 발톱으로 조심스레 그 위를 지워버렸다.
한 발짝씩 신중하게 흙을 긁어 흔적을 뭉개는 동안, 머릿속으로는 계속 같은 생각이 맴돌았다.
'서아가 이 흔적을 보면 또 걱정할 테니까.'
'박현우가 또 왔다는 걸 알면, 서아는 분명 나를 다그칠 거야.'
'괜히 불안하게 만들 필요 없어.'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흔적을 모두 지운 뒤 동굴 안으로 돌아왔다.
동굴 안에 자리를 잡고 앉아, 나는 다시 눈을 감고 서아가 올 시간을 가늠해 보았다.
'정오쯤이면 올 텐데.'
'오늘은 무슨 이야기를 할까.'
시간은 더디게 흘러갔다.
물방울 소리, 바람이 동굴 입구를 스치는 소리, 멀리서 새가 우는 소리가 번갈아 들려왔다.
나는 그 소리들을 하나씩 세듯 들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날 정오, 서아는 예정보다 늦게 도착했다.
숨을 몰아쉬며 뛰어온 듯한 모습이었다.
이마에는 땀이 흥건했고, 머리카락 몇 가닥이 얼굴에 달라붙어 있었다.
손에 들린 바구니도 평소와 달리 마구 흔들려, 안에 든 것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도윤아, 큰일 났어."
서아가 바구니를 내려놓기도 전에 다급하게 말했다.
목소리가 잔뜩 갈라져 있었다.
나는 그 표정에서 이미 좋지 않은 일이 있음을 직감했다.
서아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고, 그 눈빛만으로도 상황이 얼마나 급박한지 짐작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