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악역인데 제자가 여신급이라니

3화

숲의 채집로는 매일 조금씩 달라진다. 어제는 멀찍이서 산딸기 덤불을 확인했고, 오늘은 그 옆 능선을 따라 약초 군락을 살피러 나온 길이었다. 이 계절엔 해독초가 잘 자란다. 뿌리째 캐서 말려두면 겨울까지 쓸 수 있는 재료였다. 바구니 절반쯤 채웠을 때, 멀리서 들린 희미한 울음소리를 따라 능선 아래로 내려가자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피 냄새. 나는 걸음을 멈췄다. 이 숲에서 피 냄새는 드문 일이 아니다. 몬스터끼리 싸운 흔적일 수도 있고, 사냥꾼이 놓친 짐승의 흔적일 수도 있었다. 그 울음소리와 관련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냄새가 나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냄새가 너무 진했다. 짐승의 피 냄새와는 결이 달랐다. 나무뿌리 사이, 낙엽이 유난히 짙게 젖어 있는 곳이 보였다. 여자는 그 자리에 쓰러져 있었다. 찢어진 갈색 로브, 왼팔에서부터 옆구리까지 이어진 상처, 이미 상당한 양의 피가 낙엽을 물들이고 있었다. 상처의 모양을 보니 발톱형 몬스터에게 당한 것이었다. 세 갈래로 파고든 자국, 그리고 그 사이로 드러난 근육의 결. 얕지 않았다. 나는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관여하지 않는다. 나는 원칙을 되새겼다. 이 여자를 구한다고 해서 내가 얻는 건 없다. 오히려 존재를 노출시킬 위험만 생긴다. 이 세계에 넘어온 뒤로 지켜온 규칙이었다. 몬스터를 피하고, 사람을 피하고, 오두막과 숲 사이만 오가며 조용히 살아왔다. 그 원칙 덕분에 여기까지 무사히 버텼다. 하지만 여자의 눈이 희미하게 떠졌다. 초점 없는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입술이 뭔가를 말하려는 듯 움직였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됐다. 어쩔 수 없다. 원칙이고 나발이고, 눈이 마주친 이상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그건 원칙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었다. 나는 무릎을 꿇고 가방에서 응급 처치용 물약을 꺼냈다. 게임에서 초급 회복 포션이라 불리던 조합식으로 만든 것이었다. 은엽초 즙에 정화수를 섞고, 응고제 역할을 하는 붉은 이끼 가루를 더해 만든 것. 상처를 완전히 아물게는 못해도, 출혈을 멈추고 감염을 막을 수는 있었다. 병뚜껑을 열자 알싸한 풀 냄새가 코를 찔렀다. 물약을 상처에 붓고, 남은 걸 억지로 입에 흘려 넣었다. 여자의 몸이 미약하게 떨렸다. 숨소리가 조금씩 길어졌다. 다행이다. 붕대가 없어서 로브 자락을 찢어 대신 감았다. 지혈은 됐지만 여기서 밤을 보낼 수는 없었다. 오두막까지는 걸어서 이십 분. 짐이 있는 몸으로 옮기기엔 애매한 거리였지만, 두고 갈 수도 없었다. 나는 여자를 업고 오두막으로 돌아갔다. 무게가 가벼웠다. 체구가 유난히 작고 마른 몸이었다. 등에 닿는 숨결이 뜨거웠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낙엽이 부스럭거렸다. 부스럭. 부스럭. 그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오두막 문을 발로 밀어 열고, 여자를 눕혔다. 상처를 다시 붕대로 감싸고, 화로에 불을 붙였다. 장작이 마르지 않아서 불을 붙이는 데 애를 먹었다. 세 번 실패하고 나서야 불씨가 붙었다. 밤이 되자 여자는 열이 올랐다. 이마가 손을 대기 힘들 정도로 뜨거웠다. 나는 밤새 물수건을 갈아주며 상태를 살폈다. 한 시간에 한 번씩 이마를 짚고, 숨소리를 확인하고, 물약이 남았는지 재료 상자를 뒤졌다. 이렇게까지 할 이유는 없었지만, 손을 놓으면 이 여자가 죽는다는 게 눈에 보였다. 중간에 여자가 잠꼬대처럼 뭔가를 중얼거렸다. "…엄마, 뛰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그게 다였다. 나는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그냥 물수건을 갈아줬을 뿐이다. 괜찮다. 하룻밤만 버티면 된다. 밤은 길었다. 화로의 불이 사그라들 때마다 장작을 더 넣었고, 창밖으로 짐승 울음소리가 몇 번 들렸다. 늑대인지 다른 무언가인지는 알 수 없었다. 오두막 문을 확인하고 다시 여자 곁으로 돌아왔다. 이틀 뒤, 여자는 눈을 떴다. "…살았어?"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나는 물그릇을 내밀며 답했다. "운이 좋았습니다." 여자는 한동안 나를 빤히 쳐다봤다. 눈에 아직 초점이 흐릿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몸을 일으키려다 상처 때문에 다시 쓰러졌다. "아, 씨. 아파." 반말이었다. 나는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상처 입고 깨어난 사람이라면 그럴 만했다. "움직이지 마세요.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습니다." "당신 뭐야? 여기 사람 사는 데 아니잖아." 여자는 오두막 안을 둘러보며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벽에 걸린 약초 다발, 구석에 쌓인 재료 상자, 화로 위의 냄비.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어쩌다 보니 살고 있습니다." "어쩌다 보니?" "긴 얘기입니다." 여자는 더 캐묻지 않았다. 대신 자기 몸 상태를 확인하는 데 집중했다. 붕대를 만지고, 팔을 조금씩 움직이고, 통증에 얼굴을 찌푸렸다. 여자는 이름을 윤서아라고 밝혔다. 스물두 살, 근처 마을 출신, 초급 모험가 등록증을 딴 지 얼마 안 됐다고 했다. 마을 사람들과 함께 약초 채집을 나왔다가 늑대 무리에게 습격당해 혼자 숲 안쪽까지 밀려났다는 것이었다. "몇 명이었습니까?" "채집조는 여덟 명. 늑대는… 세는 것도 포기했어. 열 마리는 넘었을걸." "그런데 혼자 도망쳤다는 겁니까?" "다들 죽었어. 나만 도망쳤어." 말투는 무덤덤했다. 하지만 붕대를 감은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별다른 위로를 하지 않았다. 위로해줄 자신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도 허공에 뜨는 소리가 될 게 뻔했다. 대신 죽을 한 그릇 끓여 내밀었다. "먹으세요. 회복이 먼저입니다." 서아는 죽을 받아먹으며 오두막 안을 두리번거렸다. 화로, 재료 상자, 벽에 걸린 제작 노트. "이거 다 아저씨가 만든 거야?" "…아저씨는 좀 그렇고, 이도현입니다." "이도현 아저씨." 결국 아저씨는 그대로였다. 나는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몇 번 더 정정해봐도 소용없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서아는 회복하는 동안에도 계속 화로 근처를 맴돌았다. 재료를 만지고, 조합 노트를 훔쳐보고, 완성된 물약을 신기하게 들여다봤다. 다친 팔로도 어떻게든 몸을 일으켜서 상자 속 재료를 하나씩 꺼내 보기까지 했다. "이건 뭐야?" "은엽초입니다. 지혈에 씁니다." "이건?" "붉은 이끼. 응고제로 씁니다. 만지지 마세요, 손에 닿으면 가렵습니다." 서아는 그 말을 듣고서야 손을 뗐다. 뗀 손을 코에 대고 킁킁거렸다. "이거 나도 가르쳐줘." "위험합니다. 여긴 숲입니다. 모험가로 등록됐다면 마을로 돌아가시는 게 맞습니다." "마을엔 아무도 없어." 서아의 목소리가 잠깐 낮아졌다. "습격당한 그날, 마을도 같이 당했어. 살아남은 사람이 몇 없을 거야. 돌아갈 곳이 없어." 나는 그 말에 별다른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 세계에서 마을 하나가 통째로 사라지는 건 드문 일이 아니었지만, 그걸 직접 겪은 사람 앞에서 담담할 수는 없었다. 서아는 죽 그릇을 내려다보며 숟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김이 식어가는 게 보였다. "그러니까 여기 있게 해줘. 밥값은 할게. 채집도 할 수 있고, 사냥도 조금은 해봤어." "제자로 받아달라는 겁니까?" "뭐가 됐든. 아저씨 밑에 있으면 안 죽을 것 같아." 확신에 찬 말투였다. 나는 잠시 서아를 내려다봤다. 관여하지 않는다는 원칙은, 이미 서아를 업고 오는 순간 깨져 있었다. 이제 와서 되돌릴 방법도 없었다. 애초에 원칙이란 게 처음부터 지켜질 수 있는 성질이 아니었던 것 같기도 했다. "규칙이 있습니다." 나는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정한 채집 구역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위험 신호가 있으면 무조건 저에게 알린다. 그리고, 저를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저는 마력이 없습니다." 서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저 물약이나 노트는 뭔데?" "손재주입니다." "그 손재주로 나 살렸잖아." 반박할 말이 없었다. 나는 그냥 화로 쪽으로 돌아섰다. "규칙만 지키면 됩니다." "규칙 몇 개인데?" "방금 말한 게 전부입니다. 어기면 그날로 마을 방향 나갈 길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쫑알쫑알 말은 많은데 결국 규칙 세 개잖아." "…네." 서아는 웃었다. 처음 보는 웃음이었다. "알겠어, 사부님." 그날 이후로 나는 사부라는 호칭을 얻었다. 원한 적 없는 직함이었지만, 이미 되돌릴 수 없었다. 며칠이 지나며 서아의 상처는 눈에 띄게 아물었다. 붕대를 갈 때마다 상처 가장자리가 조금씩 좁아지는 게 보였다. 서아는 몸이 회복되는 만큼 오두막을 뒤지고 다니는 시간도 늘어났다. 재료 상자를 정리해준다고 했다가 순서를 다 뒤섞어놓기도 하고, 화로 불씨를 살리는 법을 알려달라고 조르기도 했다. "이거 왜 이렇게 안 붙어? 아저씨는 한 번에 붙이잖아." "장작이 마르지 않으면 세 번은 실패합니다. 저도 처음엔 열 번쯤 실패했습니다." "거짓말." "진짭니다." 그런 식의 대화가 며칠 반복됐다. 나는 딱히 즐겁지도, 딱히 귀찮지도 않았다. 다만 오두막 안의 정적이 조금 옅어졌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채집을 나갈 때는 서아를 오두막에 두고 갔다. 아직 걷는 것도 조심스러운 상태였다. 그런데도 서아는 매번 문 앞까지 따라나와 배웅인지 감시인지 모를 자세로 서 있었다. "빨리 와." "오래 안 걸립니다." "안 오면 찾으러 갈 거야." "상처 다 안 아물었습니다." "그럼 빨리 오라니까." 말이 안 되는 논리였지만, 딱히 반박하지 않았다. 반박해봤자 이길 것 같지도 않았다. 그리고 며칠 뒤, 서아를 습격한 늑대 무리와는 다른 발자국이 오두막 주변에서 발견됐다. 아침 채집을 나가려고 문을 열었을 때였다. 오두막 뒤편, 물을 길어오는 개울가로 가는 길목에 흙이 깊게 파여 있었다. 훨씬 크고, 훨씬 깊게 박힌 발자국이었다. 늑대의 발자국보다 발가락 사이 폭이 넓었고, 발톱 흔적은 손가락 한 마디만큼 길게 찍혀 있었다. 나는 그 앞에 한동안 서 있었다. 서아가 뒤에서 다가와 발자국을 내려다보다가,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이거… 나 이거 알아." 목소리가 낮아졌다. "마을 습격당한 날, 늑대들 사이에서 이런 발자국도 봤어." 바람이 불었다.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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