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빵집 유리창에 붙은 가격표를 보다가 나는 오늘도 조용히 한숨을 삼켰다. 호밀빵 한 덩이에 은화 세 닢이라니, 전생에 프랜차이즈 빵집에서 알바를 하던 시절이 떠올라서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그때는 밀가루 한 포대로 백 개는 구워냈던 것 같은데, 이 세계에서는 밀가루 한 포대가 아예 금괴처럼 취급받는 모양이었다. '이 세계 물가는 누가 짠 거야. 재료비 대비 마진이 미쳤군. 유통 마진을 계산하는 놈이 있기는 한 건가.'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나는 지갑을 열어 동화를 꺼냈는데, 그 안에는 딱 한 덩이 살 돈밖에 없었다. 손끝으로 동화를 세는 동안 옆에서 지나가던 아이가 통통한 크루아상을 오물거리며 걸어갔고, 나는 그 광경을 애써 못 본 척했다. 오늘도 브론즈 등급 의뢰료로는 배부르게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한 셈이었다. 저번 주에 잡은 광견 세 마리 값이 통틀어 은화 다섯 닢이었으니, 계산해보면 시급으로 치자면 전생의 최저임금보다도 처참한 수준이었다.
"도현 씨, 오늘도 그냥 지나가려고?" 빵집 문을 열고 나온 최순자 아주머니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눈을 흘겼다. 그 목소리에는 이미 몇 년 치의 정이 쌓여 있었는데, 실은 반가움보다는 판매 압박이 더 크게 느껴졌다. "아유, 이 청년아, 사냥한 고기는 그렇게 잘 팔면서 빵 한 조각은 왜 그렇게 아까워해." 그녀가 팔짱을 끼며 다가오자 나는 슬쩍 뒷걸음질을 쳤고, 등 뒤로 진열대 유리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이 아주머니는 왜 항상 내 지갑 사정을 자기 사정처럼 걱정하는 걸까. 이 정도면 거의 가족 수준인데.' "저번에 만든 건포도빵 남았는데 반만 값 쳐줄게. 늙은 몸으로 밤새 구운 거야." 그녀가 은근슬쩍 다른 빵까지 끼워 팔려는 걸 보고 나는 웃음이 나왔다. 결국 나는 동화를 내밀고 호밀빵 한 덩이를 받아 들었는데, 손바닥에 닿는 빵의 온기가 그럭저럭 위안이 되었다.
"왕도에서 기사님이 오셨다는 얘기 들었어?" 최순자 아주머니가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나는 빵을 씹으며 대충 고개를 끄덕였는데, 사실 왕도에서 오는 기사든 귀족이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높은 사람들 얘기는 들어봤자 골치만 아파지지. 이 세계에서 유명해지는 것만큼 위험한 일도 없다는 게 내 신념 아니었나.' 그러나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길드장님 만나러 오셨다는데, 뭔가 큰일이 생긴 게 아니겠어? 요즘 던전 근처에서 이상한 소문도 돌고 말이야. 어제는 순찰병들이 밤새 안 자고 성벽을 돌았다더라니까." 그 말에 나는 잠시 씹던 것을 멈췄지만, 이내 별일 아니라는 듯 다시 빵을 씹으며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나는 저수익 의뢰만 골라 받는 브론즈 등급이었고, 그런 큰 사건들은 나와는 다른 세상 이야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왕도의 기사가 오든 마왕이 부활하든, 내 알람은 오늘도 고블린 한 마리 잡는 일로 채워질 게 뻔했으니까.
성문에 다다르자 박덕수가 창을 어깨에 걸치고 서 있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손을 들어 보였다. "도현이 형, 오늘도 통용문으로 가는 거지?" 그가 씩 웃으며 묻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속으로는 매번 같은 질문을 하는 그가 신기했다. '정문으로 가면 뭐 특별한 게 있나. 그냥 통용문이 지름길인데. 저 녀석은 왜 매일 확인하는 걸까, 혹시 나한테 관심 있는 건 아니겠지.' "정문으로 가면 신원 검사가 빠른데, 형은 꼭 통용문으로 돌아가더라니까. 정문 쪽에 요즘 순찰 인원도 늘려서 진짜 금방 통과할 수 있는데." 그가 다시 한 번 권했지만 나는 손을 흔들며 사양했다. 정문 쪽에는 늘 귀족이나 상인들의 마차가 줄지어 서 있었고, 그 틈에서 시선을 받는 것 자체가 피곤한 일이었다. 마차 문양이 새겨진 금박이 반짝일 때마다 나는 괜히 위축되는 기분이 들었는데, 그건 전생의 습관인지 이 세계에서 새로 생긴 버릇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눈에 띄지 않는 삶을 원했다. 그게 이 세계에서 오래 살아남는 가장 안전한 방법이라고 믿었으니까. 통용문을 지나면서 나는 습관처럼 주변을 살폈고, 별다른 낌새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안심하고 걸음을 옮겼다.
길드 건물에 들어서자 익숙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젖은 가죽과 쇠 냄새, 그리고 누군가 흘린 술 냄새가 섞인, 어딘가 정겨우면서도 촌스러운 그 공기 속에서 나는 접수처로 걸어갔다. 나무 바닥이 삐걱거리는 소리와 게시판 앞에서 웅성거리는 신입 모험가들의 목소리가 뒤섞여 아침부터 활기가 넘쳤다. 그곳에는 늘 그렇듯 윤소하가 서류를 정리하며 앉아 있었는데, 그녀의 단정한 자세와 흐트러짐 없는 표정을 볼 때마다 나는 이 세계에도 저런 완벽주의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새삼 감탄했다. 머리카락 한 올도 흐트러지지 않은 채, 잉크가 채 마르지 않은 서류 위로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모습이 마치 전생의 은행 창구 직원 같았다. "이도현 씨." 그녀가 서류를 내려놓지 않은 채 나를 불렀다. "어제 광견 사냥 의뢰 완료 보고서, 확인했습니다." 사무적인 어조였지만 그 안에는 어딘가 날카로운 뉘앙스가 섞여 있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녀가 서류철을 넘기며 눈을 들었다. "광견 세 마리를 상대로 부상 하나 없이, 십 분 만에 처리했다고 되어 있는데요. 보통 광견 한 마리를 상대하는 데도 최소 두 명이 필요하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운이 좋았습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웃어 보였는데, 속으로는 식은땀이 살짝 배어나는 걸 느꼈다. '운이라고 우기는 것도 이제 슬슬 한계가 오는군. 이 사람 눈빛이 벌써 세 번째 경고를 보내고 있는데.' "운이 매번 좋으신 것 같아서 신기할 따름입니다." 그녀가 서류를 탁 소리 나게 덮으며 말했다. 그 짧은 대사 속에 담긴 의구심의 무게가 만만치 않아서, 나는 서둘러 다른 화제로 넘어가려 했다.
"그보다 오늘 받을 만한 저수익 의뢰가 있습니까?" 내가 묻자 윤소하는 서랍에서 새 서류를 꺼내며 짧게 답했다. "이도현 씨의 실력이라면 실버 등급 의뢰도 충분히 감당하실 텐데요. 이번 달만 벌써 세 번째 권유입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건조했지만, 그 안에 담긴 답답함까지는 숨기지 못했다. 종이를 정리하는 손끝이 아주 살짝 빨라진 것 같기도 했는데, 그게 짜증의 표현인지 아니면 단순한 습관인지 나는 구분할 수 없었다. "실버가 되면 위험한 임무가 늘어나지 않습니까." 내가 반문하자 그녀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답했다. "위험한 임무를 피하고 싶으시면, 애초에 그런 실력을 갖추지 않으셨어야죠." 그 말에 나는 잠시 말이 막혔다가, 픽 웃으며 넘겼다. '이 사람은 대체 어디까지 눈치챈 걸까. 설마 내가 이 세계 사람이 아니라는 것까지 짐작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나는 애써 태연한 얼굴로 브론즈 등급 게시판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등 뒤로 그녀의 시선이 계속 따라오는 것 같아서, 나는 괜히 뒷목을 매만지며 걸음을 서둘렀다.
게시판에는 여전히 고블린 토벌이나 성문 밖 잡초 제거 같은, 벌이는 적지만 위험도도 낮은 의뢰들이 붙어 있었다. 종이마다 붙은 서명과 도장을 훑어보며 나는 그중 가장 조용해 보이는 것을 골라 뜯어냈는데, 그 순간 손끝에서 미세한 전율이 스치고 지나가는 걸 느꼈다. 마치 종이 자체가 살짝 떨리는 듯한 감각이었다. 전기가 통하는 것도 아니고, 벌레가 기어가는 것도 아닌,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이물감이었다. '또 이거군.' 나는 손을 몇 번 털면서 그 감각을 억눌렀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기묘한 힘은 아무 때나 불쑥 튀어나와서 나를 곤란하게 만들었고, 나는 그것이 나타날 때마다 애써 무시하는 법을 익히고 있었다. 처음 이 증상이 나타났을 때는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서 밤새 잠도 못 잤지만, 이제는 그저 성가신 잔병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나 오늘의 이 작은 떨림이, 앞으로 벌어질 일들의 아주 작은 서곡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때의 나는 알지 못했다.
의뢰서를 접어 주머니에 넣으며 뒤를 돌아보니, 윤소하는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는 방금 전의 의구심과는 조금 다른, 뭔가를 확인하려는 듯한 기색이 섞여 있었는데, 나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척하며 길드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문을 나서기 직전, 등 뒤에서 그녀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도현 씨, 조심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 한마디가 유난히 오래 귓가에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