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브론즈인데 왜 자꾸 들켜

2화

고태산의 술집은 늘 그렇듯 벽난로 옆 구석 자리가 그의 자리였다. 나무 탁자는 오래된 기름과 술이 배어들어 반질반질했고, 벽난로에서 튀는 불티가 가끔 그의 어깨 너머로 날아와 스러지는 게 보였다. 그가 앉아서 손짓하는 걸 보고 나는 빵 조각을 씹으며 다가갔는데, 그의 수염 사이로 이미 벌써 한 잔을 비운 흔적이 보였다. 입가에 말라붙은 거품 자국까지, 이 형은 정말이지 숨기는 법을 모른다. "도현이, 여기 앉아." 그가 소형 방패를 벽에 기대 세워놓으며 자리를 권했다. 방패 표면에 남은 긁힌 자국들이 오늘도 그가 뭔가와 부딪혔다는 걸 말해주고 있었는데, 굳이 묻지는 않았다. 물으면 또 삼십 분짜리 무용담이 나올 게 뻔했으니까. 나는 맞은편에 앉으며 술잔을 받아 들었고, 시큼하면서도 은근히 향긋한 에일 냄새가 코끝을 스치자 오랜만에 마음이 조금 편해지는 걸 느꼈다. 온도는 미묘하게 미지근했고 거품은 이미 가라앉은 뒤였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입맛에 맞는 게 이 술이랑 사냥한 고기 정도인가.' 전생에서는 편의점 맥주 한 캔에도 만족했던 걸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란 말이 딱 맞았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잔을 부딪히며 인사를 건넸다. 쨍, 하는 가벼운 소리가 벽난로 타는 소리에 섞여 들었다. "소하가 또 등급 얘기 꺼냈다며?" 고태산이 씩 웃으며 물었다. 그의 정보력은 늘 놀라울 정도로 빨랐는데, 그건 아마 그가 실버 등급 베테랑으로 오랫동안 길드를 드나든 덕분일 터였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내가 되묻자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술을 한 모금 넘겼다. "소하가 그 얘기를 꺼내는 날은 표정부터 다르거든. 서류철 넘기는 소리도 유난히 크고. 오늘 아침에 접수처 앞에서 봤는데, 딱 그 얼굴이더라." 그가 낮게 웃으면서 덧붙였다. 나는 소하의 그 특유의 딱딱한 표정을 떠올리며 속으로 혀를 찼다.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사람인데 형은 어떻게 그걸 다 잡아내는 건지.' "그런데 도현이 너, 왜 그렇게 등급 올리는 걸 싫어해?" "위험해지니까요." 나는 술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짧게 답했다. 고태산은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그 눈빛에 미묘한 이해가 스치는 걸 나는 놓치지 않았다. 술집 안의 다른 소음들, 옆 테이블의 웃음소리와 주방에서 들려오는 냄비 부딪히는 소리마저 잠깐 멀어진 듯했다. "넌 참 이상한 놈이야. 실력은 좋은데 겁이 많은 것도 아니고, 그냥 조용히 살고 싶어 하는 것 같단 말이지." 그의 말에 나는 애매하게 웃으며 대답을 피했다. '이 형은 눈치가 너무 빠른 게 문제군.' 실력이 좋다는 건 알아준다는 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로선 판단이 서지 않았다. 조용히 브론즈에 머물면서 눈에 띄지 않는 게 목표인 나에게, 남들 눈에 실력이 도드라지는 건 오히려 골칫거리였다. "이 세계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게 별로 없습니다." 나는 화제를 돌리려 일부러 그렇게 말했다. 실제로는 전생의 기억 덕분에 이 세계의 시스템적인 부분은 대충 감이 잡혔지만, 세력 관계나 각국의 정치적 지형까지는 아직 아는 게 부족했다. 던전이나 등급, 마력 같은 개념은 게임에서 보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적응이 빨랐지만, 정치는 게임 튜토리얼에 나오지 않으니까. 고태산은 그 말에 흥미가 생긴 듯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 바람에 탁자 위 촛불이 흔들리며 그의 얼굴에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다. "뭐가 궁금한데?" "해동왕국과 서라 성왕국이 지금 어떤 관계입니까?" 내가 묻자 그는 술잔을 내려놓고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평소의 껄렁한 표정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걸 보니, 가벼운 이야기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해동왕국은 지금 왕위 계승 문제로 내부가 어수선해. 서라 성왕국은 그 틈을 타서 국경 쪽 영토를 조금씩 넘겨받고 있고. 전쟁이 다시 터질 거라는 소문도 있어." 그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을 이었다. "귀족들 사이에서도 말이 많아. 해동 쪽에서는 서라 성왕국이 먼저 도발했다고 하고, 서라 쪽에서는 해동이 내부 문제를 덮으려고 핑계를 찾는다고 하고. 어느 쪽 말이 진짜인지는 나 같은 놈이 알 도리가 없지." 그 말에 나는 잠시 숨이 막히는 걸 느꼈다. 내 아버지가 해동왕국인이고 어머니가 서라 성왕국인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 두 나라의 전쟁이 결국 부모를 앗아갔던 과거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불에 타버린 마을과 흙먼지 속에서 울부짖던 소리들이 잠깐 귓가에 되살아났다. '또 시작이군, 그 지긋지긋한 전쟁이.' 나는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다음 질문을 던졌다. 손끝이 살짝 차가워지는 걸 느꼈지만, 굳이 그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길드 등급은 정확히 어떻게 나뉩니까?" "브론즈, 실버, 골드, 그 위로는 미스릴까지 있는데, 미스릴은 나라 전체에 몇 명 안 돼." 고태산이 손가락을 접으며 설명했다. "브론즈는 저수익 의뢰만 받을 수 있지만 대신 안전하지. 실버부터는 던전 심층부나 위협 등급 몬스터 토벌 같은 의뢰가 붙어. 골드는 아예 왕실 직속 임무까지 맡게 되고." 그가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뒤 덧붙였다. "미스릴은 뭐, 나도 실물로 본 게 딱 한 번이야. 그때 그 사람이 혼자서 웨어울프 무리를 정리하는 걸 봤는데, 사람이 아니라 재해 같더라고." 그의 설명을 들으며 나는 속으로 계산을 해보았다. '역시 등급이 올라갈수록 목숨 걸 일이 늘어나는 구조군. 브론즈에 눌러앉는 게 최선이야.' 나는 그렇게 결론을 내리며 술을 한 모금 넘겼다. 미스릴 등급이라는 게 재해 취급을 받을 정도라면, 나는 평생 브론즈에서 늙어 죽어도 상관없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데 말이야." 고태산이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며 몸을 기울였다. 벽난로 불빛이 그의 눈동자에 반사되어 묘하게 진지한 느낌을 더했다. "요즘 왕도에서 기사가 내려왔다는 얘기, 들었지?" 나는 최순자 아주머니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는 그냥 흘려들었던 소문이었는데, 고태산의 입에서 다시 나오니 묘하게 무게가 실렸다. "던전 근처에서 이상한 마력 반응이 감지됐다더라. 그것 때문에 조사단이 온 거라던데, 아직 정확한 건 알려진 게 없어."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맺었다. "왕도 기사단이 지방 던전까지 직접 내려오는 건 흔한 일이 아니거든. 뭔가 큰 게 걸린 게 아닌가 싶어." 나는 그 말을 들으며 별생각 없이 넘기려 했지만, 손끝에서 다시 그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마치 그 정보 자체가 내 몸속 어딘가와 공명하는 것 같은 이상한 감각이었다. 심장 근처가 살짝 저릿한 느낌마저 들었는데, 이유를 알 수 없어서 더 불편했다. '이건 또 뭐야.' 나는 술잔을 꽉 쥐며 그 감각을 억눌렀다. 손끝의 떨림이 잔 표면에 남은 물방울을 타고 흘러내리는 걸 보면서도,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술을 넘겼다. "내일 나랑 같이 의뢰 하나 뛸래?" 고태산이 화제를 바꾸며 물었다. 그 순간 그의 표정이 다시 평소의 능글맞은 얼굴로 돌아온 걸 보니, 방금까지의 진지함은 이미 뒤로 밀어둔 모양이었다. "저수익이지만 안전한 걸로. 고블린 무리 좀 정리하는 건데, 성문 밖 초입이라 별 위험은 없을 거야. 요즘 그쪽에서 농작물 피해 신고가 좀 들어왔대." 그의 제안에 나는 잠시 고민했다. 고블린 정도라면 나에게는 눈감고도 처리할 수 있는 수준이었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문제는 언제나 예상치 못한 곳에서 튀어나온다는 것, 이 세계에 온 이후로 몸으로 배운 유일한 진리였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함께라면 늘 마음이 편했다. 실버 등급 베테랑의 노련함이 곁에 있다는 사실이, 이 위험한 세계에서 내가 가진 가장 확실한 안전장치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좋습니다. 대신 끝나고 술은 형이 사는 겁니다." 내가 웃으며 말하자 그는 껄껄 웃으며 잔을 부딪혔다. "그래, 그래. 대신 고블린 대장 나오면 네가 앞장서는 거다." "그건 또 언제 정해진 규칙입니까." 내가 투덜거리듯 대꾸하자 그는 더 크게 웃으며 술을 들이켰다. 그 웃음소리가 술집 안에 퍼지며 몇몇 손님들이 힐끗 돌아보기까지 했다. 그 순간만큼은 나도 이 세계가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벽난로의 온기와 에일의 향, 그리고 눈치 빠른 형의 잔소리 섞인 호의까지, 전생에서는 느껴보지 못했던 종류의 편안함이었다. 하지만 그 평온함이 내일 아침이면 얼마나 빨리 깨질지는, 그때의 나는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손끝에 남아 있던 그 미세한 떨림이, 실은 앞으로 벌어질 일의 서곡이었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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