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브론즈인데 왜 자꾸 들켜

3화

성문을 나서자마자 마주친 것은 이슬 맺힌 풀숲이 완만하게 이어지는 구릉지였다. 밤새 내린 이슬이 아직 마르지 않아 발끝이 젖어들었고, 이른 아침 공기 속에서 흙냄새와 풀 비린내가 섞여 코끝을 스쳤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새소리마저 한가로워서, 이게 몬스터 사냥을 나온 길인지 산책을 나온 길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고태산은 단창을 어깨에 걸친 채 앞장서서 걸음을 옮기고 있었는데, 그 뒷모습이 어쩐지 동네 마실 나온 아저씨 같아서 나는 속으로 픽 웃었다. "고블린 무리는 보통 저 언덕 너머 바위굴 근처에 자리를 잡아." 그가 손가락으로 방향을 짚으며 말했다. "그거 몇 번이나 잡아봤나?" 내가 물었다. "이 근방에서만 열 번은 넘게 잡았습니다. 개체 수는 보통 다섯에서 일곱, 위협 등급은 브론즈 하급." "그럼 오늘도 편하게 다녀오는 셈이군." 나는 바스타드 소드의 손잡이를 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느껴지는 이 익숙한 무게감이 오히려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었다. '저수익이지만 이런 게 딱 좋아. 목숨 걸 일도 없고 말이지.' 전생에는 매출표 앞에서 목숨을 걸었지, 이번 생엔 고블린 앞에서 목숨을 걸 일은 없겠지.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바위굴 근처에 도착하자 예상대로 고블린 몇 마리가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초록빛 피부에 누런 이를 드러낸 그 작은 몸뚱이들은 위협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귀엽게 보이는 구석이 있었다. 굴 앞에 쭈그려 앉아 서로 머리를 긁어주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저것들도 나름 사회생활을 하는구나' 싶은 헛생각까지 들었는데, 그 생각도 곧 사라졌다. 고태산이 손가락 두 개를 세워 신호를 보내자 우리는 동시에 움직였다. 그의 소형 방패가 앞장선 고블린의 몸통을 밀쳐내는 사이 나는 뒤따르던 두 마리의 목을 향해 검을 그어 내렸다. 검날이 살과 뼈를 가르는 감각이 손목을 타고 올라왔지만, 그건 이제 익숙해진 통증이라기보다는 그저 지나가는 감각에 불과했다. 세 번째 놈이 몽둥이를 들고 달려들자 나는 몸을 반보 틀어 옆구리를 파고들었고, 네 번째 놈은 고태산의 창끝에 목이 꿰뚫려 발버둥 치다가 그대로 늘어졌다. 다섯 번째 놈은 도망치려다 내가 던진 단검에 뒤통수를 맞고 고꾸라졌다. 순식간에 굴 앞의 고블린 다섯 마리가 정리되었고, 나는 검을 털며 안심의 숨을 내쉬었다. 검날에 묻은 초록빛 핏물이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게 묘하게 낭만적이라고 생각했다면 내 정신 상태를 의심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딱 이 정도가 좋지." 나는 검집에 검을 꽂으며 중얼거렸다. "저도 동의합니다." 고태산이 창날에 묻은 피를 풀잎으로 닦으며 대답했다. "이 정도면 반나절 안에 복귀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무사히 끝나는군.'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땅이 미세하게 울렸다. 처음엔 발밑의 진동으로만 느껴졌던 그것이, 곧 굴 안쪽에서 육중한 발소리로 바뀌며 점점 커졌다. 마치 누군가 커다란 돌덩이를 굴리며 걸어오는 듯한 소리였는데, 그 리듬이 일정한 걸 보니 발소리가 확실했다. 고태산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는 걸 보며 나는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이건 예상한 규모가 아니야." 그가 낮게 중얼거리며 방패를 고쳐 잡았다. "규모가 어느 정도인데?" 내가 물었다. "발소리의 간격과 무게로 추정하면, 최소 일반 고블린의 두 배 이상입니다." "그럼 그거, 고블린 우두머리 아닌가?"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만 이 근방에서 우두머리급이 출현한 기록은 없었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굴 안쪽에서 거대한 형체가 튀어나왔는데, 일반 고블린보다 두 배는 큰 몸집에 붉은 눈이 번뜩이는 고블린 우두머리였다. 몸집만 큰 게 아니라 온몸에 두른 낡은 가죽 갑옷과, 어디서 주워왔는지 모를 녹슨 쇠사슬이 목에 걸려 있는 모습이 제법 위압적이었다. 놈의 붉은 눈동자가 우리를 훑는 순간, 나는 저것이 단순한 브론즈급이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놈의 손에 들린 몽둥이가 허공을 가르며 우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흩어져!" 고태산이 외치는 순간, 나는 몸을 옆으로 굴려 몽둥이의 궤적을 피했고, 흙먼지가 시야를 가득 채우며 얼굴로 튀어 올랐다. 몽둥이가 지나간 자리의 땅이 움푹 파여 있는 걸 보고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저걸 정면으로 맞았으면 아마 즉사각이었을 거다. 그 와중에도 내 머릿속 한구석에서는 '위협 등급이 최소 실버 이상이잖아, 이거'라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고태산, 이거 브론즈급 맞나?" 나는 흙바닥에서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제 판단이 틀렸던 것 같습니다." 그의 대답은 여전히 사무적이었지만, 방패를 쥔 손등에 힘줄이 잔뜩 서 있는 게 보였다. "실버 하급, 혹은 그 이상으로 재평가해야 합니다." "이제 와서 재평가해봐야 무슨 소용인가." 나는 검을 다잡으며 중얼거렸다. 죽을 판인데 등급 매기고 있을 여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고태산이 방패로 몽둥이의 두 번째 공격을 막아내며 몸을 낮췄고, 그 반동으로 단창을 우두머리의 다리를 향해 찔러 넣었는데, 상대가 그 창을 붙잡아 통째로 뜯어내려는 힘을 쓰자 그의 팔뚝이 부들부들 떨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놈의 손아귀 힘만으로 창대가 뿌드득 소리를 내며 휘어지는 게 보였다. 저건 사람이 버틸 수 있는 힘이 아니다. "도현아, 지금이야!" 그가 이를 악물고 외치는 소리에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날렸고, 검을 두 손으로 쥔 채 우두머리의 옆구리를 향해 찔러 넣었다. 검날이 두꺼운 가죽을 파고드는 순간, 상대가 포효하며 몸을 뒤틀었고, 그 반동으로 나는 몸이 붕 떠올라 몇 미터 밖으로 나뒹굴었다. 등짝으로 전해지는 충격에 잠시 숨이 막혔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다시 일어섰다. 갈비뼈 하나가 나갔는지 숨을 들이쉴 때마다 옆구리가 찌릿했지만, 지금 통증 타령할 때가 아니었다. "괜찮나, 고태산?" 나는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버틸 만합니다." 그가 방패 뒤에서 대답했다. 방패 표면에는 이미 몽둥이에 맞아 움푹 파인 흔적이 여러 개 나 있었다. 저 방패가 없었으면 그의 몸이 저 상태였을 거라는 생각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 순간이었다. 손끝에서 시작된 미세한 떨림이 이번에는 팔 전체를 타고 올라오며 뜨거운 열기로 바뀌었다. 검을 쥔 손바닥이 화끈거리기 시작했고, 시야 한구석이 흐릿하게 붉은빛으로 번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거, 또 이 감각이잖아.' 예전에도 이랬다. 벽에 몰려 죽기 직전이었을 때, 뭔가 몸속에서 끓어오르며 힘이 넘쳐났던 그 순간과 똑같은 감각이었다. 나는 그 이상한 힘을 억누르려 안간힘을 썼지만, 이번엔 평소보다 훨씬 강렬하게 몸속에서 무언가가 요동치고 있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이상하게 차분해지면서 시야만 붉게 물드는 이 감각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나조차 알 수 없었다. 고태산이 다시 방패로 공격을 막아내며 소리쳤다. "괜찮아, 도현아?" 나는 대답할 겨를도 없이 다시 검을 들어 올렸는데, 그 순간 우두머리의 몽둥이가 방향을 바꿔 나를 향해 곧장 날아들었다. 놈의 붉은 눈동자가 정확히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방금 전 내 몸에서 일어난 이상한 기운을 감지한 것처럼. 피할 시간은 없었다. 나는 검을 들어 그것을 막으려 했지만, 육중한 충격이 검을 타고 전신으로 퍼지면서 몸이 통째로 튕겨져 나갔다. 등이 바위에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울렸고, 시야가 흔들리며 세상이 뒤집히는 듯한 감각이 밀려왔다. 입안 가득 피맛이 퍼졌고, 팔다리에 감각이 사라져가는 게 느껴졌다. 고태산이 다급하게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지만, 그 목소리마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이대로 죽는 건가.' 실없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두 번째 생인데, 이번엔 좀 더 오래 살았어야 하는데 말이지. 그런 생각과 함께, 마지막으로 눈에 들어온 건 고태산이 방패를 내던지고 맨몸으로 우두머리에게 달려드는 모습이었다. 저 무모한 인간, 저러다 같이 죽을 거면서. 그 말을 소리 내어 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이내 시야가 완전히 검게 물들면서 나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