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전생했더니 악역 삼촌입니다

1화

야근이 문제였다. 강도훈은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자정을 넘긴 사무실, 모니터 불빛만 남아 있던 풍경이 마지막으로 스친 기억이었다. 팀장이 던진 보고서 더미를 다 처리하고 나온 게 밤 열한 시 반. 지친 다리를 끌고 편의점에 들어가 삼각김밥 하나를 집어 들었다. 씹으면서 걸었다. 맛이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다. 건널목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신호는 분명 파란불이었다. 왼쪽을 봤다. 오른쪽도 봤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발을 뗐다. 트럭 헤드라이트가 시야를 가득 채운 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쿵. 그리고 그 다음엔 아무것도 없었다. 소리도, 통증도, 생각도 없었다. 그냥 암전이었다. 눈을 떴을 때 천장이 낯설었다. 금박을 두른 조각이 촘촘히 새겨진 천장이었다. 천사 같은 것들이 날개를 펴고 있었고, 그 사이사이로 포도송이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여기가 어디야. 사무실 천장은 절대 이렇지 않았다. 병원 천장도 이렇지 않았다. 몸을 일으키려는데 팔이 말을 듣지 않았다. 가늘고, 하얗고, 낯선 팔이었다. 손등에 잡힌 뼈마디가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자기 팔이 이렇게 가느다랐던가. 아니, 자기 팔이었나. 찰싹. 뺨에 뭔가 닿았다. 손바닥이었다.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찰싹. 일어나십시오, 왕자님. 해가 중천입니다. 중년의 사내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비웃음이 얼굴에 그대로 걸려 있었다. 관자놀이 옆으로 흰머리가 삐죽 솟아 있었고, 눈매는 처음부터 사람을 아래로 내려다보는 데 익숙한 눈매였다. 강도훈은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머릿속으로 낯선 정보가 쏟아져 들어오는 걸 느꼈다. 이곳은 대현국. 이 몸은 방계 왕자 이제하. 그리고 저 사내는 시종장 곽대득. 십 년째 이 몸을 때리고, 굶기고, 짓밟아온 자였다. 뭐야 이거. 강도훈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디서 본 이름들인데. 머릿속에서 정보가 계속 쏟아졌다. 방계 왕자, 정비의 자식이 아니라는 이유로 궁 안에서 없는 사람처럼 취급받았다는 것. 식사를 거르는 날이 밥 먹는 날보다 많았다는 것. 매일 아침 이런 식으로 뺨을 맞으며 시작되는 하루였다는 것. 그리고 곧바로 확신했다. 이건 자신이 밤마다 침대에 누워 읽던 웹소설이었다. 제목은 「멸망의 마지막 밤」. 주인공 이라온이 복수귀가 되어 왕국을 불태우는 이야기. 완결까지 다섯 번은 넘게 정독한 작품이었다. 그리고 이제하는 그 이야기의 최종 악역이었다. 이라온의 이복형, 소년의 삶을 짓밟다가 결국 그 손에 목이 잘리는 자. 하필 이 자식이야. 강도훈은 헛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았다. 악역으로 죽는 캐릭터에 들어왔다는 것도 기가 막힌데, 그것도 가장 비참하게 죽는 놈이었다. 소설 후반부, 이라온의 검에 목이 떨어지는 장면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는지 기억이 났다. 그때는 그냥 사이다였다. 지금은 아니었다. 곽대득이 다시 손을 들었다. 익숙한 동작이었다. 백 번은 넘게 해본 사람의 동작이었다. 또 맞겠거니 하다가 안 맞습니다, 하고 그 손을 잡아챘다. 손목을 붙잡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몸은 약했지만 반응 속도는 이상하게 빨랐다. 뭐, 뭡니까. 곽대득의 눈이 커졌다. 십 년 동안 한 번도 없던 반항이었다. 강도훈은 곽대득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원작에서 이 인물이 어떻게 몰락했는지 기억이 났다. 왕실 창고에서 은식기를 빼돌린 죄로 참수당했다. 증거는 창고 뒤편 마룻바닥 밑에 숨겨져 있었다. 소설에서는 몇 줄로 스쳐 지나가는 조연의 결말이었지만, 지금은 그 몇 줄이 무기가 되어 있었다. 곽대득. 창고 뒤편 마룻바닥, 세 번째 판자. 곽대득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표정이 완전히 굳었다. 방금까지 사람을 내려다보던 눈이 이제는 흔들리고 있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목소리가 떨렸다. 모른 척은 됐고. 강도훈은 손을 놓아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원래 몸의 주인이 얼마나 굶었는지 뼈마디에서 느껴졌다. 일어서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핑 돌았다. 그래도 버텼다. 지금 무너지면 이 판이 뒤집힌다는 감이 왔다. 오늘부로 손버릇 고치세요. 안 고치면 그 판자, 제가 직접 뜯어서 아버지께 보여드릴 겁니다. 곽대득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입술이 몇 번 벌어졌다가 다시 닫혔다. 왕자님, 어디서 그런 헛소리를. 목소리는 여전히 위협하려는 투였지만 힘이 빠져 있었다. 헛소리인지 아닌지는 가서 확인해보시고요. 안 그러면 저야 편하고요. 강도훈은 등을 돌리며 하품을 했다. 오십 평생 회사에서 상사한테 당한 게 얼만데. 이 정도 협박은 숨쉬듯 나오는 거였다. 직급으로 사람 짓누르는 인간들, 자기 자리 위태로워지면 어떻게 변하는지 지겹도록 봐온 강도훈이었다. 곽대득 같은 부류는 딱 한 가지에 약했다. 자기 목숨줄. 곽대득이 뒤에서 무릎을 꿇는 소리가 들렸다. 바닥에 무릎이 닿는 소리가 제법 크게 울렸다. 왕자님, 제가 실수했습니다. 부디. 목소리가 거의 애원에 가까웠다. 다음부턴 밥이나 제때 주세요. 강도훈, 아니 이제하는 그 말을 남기고 방문을 나섰다. 등 뒤에서 곽대득이 뭔가 더 말하려는 기색이었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복도의 대리석 바닥이 발끝에 차갑게 닿았다. 걸을 때마다 발바닥에 냉기가 스몄다. 창밖으로 낯선 궁궐이 펼쳐져 있었다. 하늘은 파랬고 정원엔 처음 보는 붉은 나무가 서 있었다. 잎사귀 하나하나가 핏빛에 가까운 색이었다. 바람이 불자 나무가 흔들리며 붉은 잎이 몇 장 떨어졌다. 이거 진짜네. 강도훈은 손끝으로 대리석 기둥을 쓸어보았다. 차갑고 단단했다. 꿈이라면 이렇게 오래 갈 리가 없었다. 꿈이라면 이렇게 자세할 리가 없었다.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는데, 저 멀리 종소리가 울렸다. 댕. 댕. 댕. 다급한 리듬이었다. 평소 궁에서 울리는 종소리와는 확실히 다른 박자였다. 누군가 복도를 뛰어오는 발소리가 이어졌다. 급하게 뛰는 발소리, 여러 명의 발소리가 겹쳐서 들렸다. 신전에서 급보가 왔습니다! 전령의 목소리가 궁 전체에 퍼졌다. 갈라진 목소리였다. 숨이 찬 채 소리치는 것 같았다. 이제하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섰다. 원작에서 이 사건을 본 기억이 있었다. 분명 이 대목을 읽은 적이 있었다. 장 초반부, 별로 중요하지 않게 지나가던 사건이었다. 그런데 지금 서 있는 이 자리에서 그 기억이 갑자기 무겁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 기억은 그다지 좋은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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