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대전의 공기가 무거웠다.
이제하는 그 문턱을 넘으며 코를 찌르는 향냄새를 맡았다.
신전에서 급히 태운 정화향이었다.
평소라면 이런 시간에 대신들이 이렇게 모일 일이 없었다.
대신들이 서로의 얼굴을 살피며 수군거렸다.
성수가 어찌 그리되었단 말이오.
이런 일이 건국 이래 있었소이까.
늙은 대신 하나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이제하는 그 뒤편 구석에서 조용히 서 있었다.
방계 왕자라 앞줄에 낄 자리는 없었다.
오히려 다행이었다.
눈에 띄지 않는 게 지금은 최선이었다.
시선을 낮추고 숨을 죽였다.
누구도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
원래 그런 존재였다.
신전 대사제가 무릎을 꿇은 채 떨고 있었다.
늙은 손이 바닥을 짚었다가 미끄러졌다.
성수가, 붉게 변했습니다.
하루아침에 그리되었습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대신들이 서로 눈치를 보았다.
국왕의 얼굴이 굳었다.
턱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성수가 붉어졌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 자리에 있는 자라면 모를 수가 없었다.
신탁의 재앙.
그 첫 징조였다.
성녀는 어떠한가.
국왕이 물었다.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대사제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다미 님께서, 최근 열이 오르십니다.
원인을 알 수 없습니다.
이제하는 그 이름을 듣고 손끝이 저릿했다.
다미.
원작에서 결국 세상을 멸망시키는 복수의 성녀.
지금은 다섯 살짜리 아이일 뿐이었다.
대신 하나가 헛기침을 하며 끼어들었다.
사생아 신분으로 신력을 지녔다는 것부터가 불경한 일이오.
그런 아이가 성녀 노릇을 한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 아니겠소.
주변에서 몇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하는 그 말을 들으며 속으로 혀를 찼다.
사생아라서 문제고, 신력이 있어서 문제고.
결국 다 필요 없다는 소리를 참 길게 하는군.
원작에서도 저런 자들이 다미를 방치했다.
그 방치가 결국 무엇을 낳았는지, 이 자리의 누구도 알지 못했다.
알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때는 이미 세상이 다 타버린 뒤였으니까.
대전이 소란해지는 사이, 이제하는 조용히 뒷문으로 빠져나왔다.
아무도 그를 붙잡지 않았다.
신전은 궁 뒤편에 붙어 있었다.
낡은 회랑을 따라 걷다 보니 조그만 문이 하나 보였다.
회랑의 돌바닥은 냉기가 올라와 발끝이 시렸다.
벽에 붙은 등불 몇 개만이 흐릿하게 길을 밝혔다.
갇혀 있는 방.
원작 3장에서 딱 한 줄 언급됐던 장소였다.
성녀는 신관들에게 보호받는 존재가 아니라, 사생아라는 이유로 감금된 채 방치되고 있었다.
그 한 줄을 읽었을 때는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겼다.
지금 그 문 앞에 서 있으니 느낌이 전혀 달랐다.
문을 두드렸다.
똑, 똑.
대답이 없었다.
손잡이를 돌리니 잠기지 않은 문이 힘없이 열렸다.
경첩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좁은 방 안, 마른 아이가 벽에 등을 붙이고 앉아 있었다.
금빛이 도는 은발, 창백한 얼굴.
눈만 유난히 크게 반짝였다.
방 안에는 침구랄 것도 없었다.
낡은 담요 한 장과, 물이 담긴 나무 잔 하나가 전부였다.
창문도 없어서 공기가 답답하게 갇혀 있었다.
누구세요.
다미의 목소리는 작았다.
경계심이 잔뜩 묻어 있었다.
지나가던 아저씨.
이제하는 대답하며 품에서 아까 챙긴 빵을 꺼냈다.
대전 앞 시종들 상에서 슬쩍 집어온 거였다.
소란한 틈을 타서 아무렇지 않게 손을 뻗은 것뿐이었다.
훈련이 아니라 순전히 오랜 습관이었다.
먹을래.
다미는 잠시 눈치를 보다가 손을 뻗었다.
손톱이 새하얗게 말라 있었다.
손목도 유난히 얇았다.
감사합니다, 아저씨.
빵을 받아 든 아이는 곧바로 먹지 않았다.
품에 꼭 끌어안고 이제하를 다시 한번 살폈다.
안 뺏어가세요.
이제하는 그 물음에 잠깐 말을 잃었다.
빵 하나를 두고도 빼앗길 걱정을 하는 다섯 살짜리 아이라니.
안 뺏어.
먹어.
다미가 그제야 빵을 뜯어 조금씩 입에 넣었다.
급하게 삼키다 목이 걸린 듯 콜록거렸다.
이제하가 옆에 놓인 나무 잔을 들어 건넸다.
천천히 먹어.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니고.
다미는 물을 받아 마시고 나서야 숨을 골랐다.
빵을 뜯어 먹는 아이를 보며 이제하는 속으로 계산했다.
이 아이가 각성하면 어떻게 되는지, 그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버림받은 원한이 신력으로 변질되고, 그 힘이 결국 이라온과 함께 세상을 태운다.
루프의 시작점이 바로 이 방이었다.
원작을 읽을 때는 그저 안타까운 서사였다.
지금은 눈앞에서 빵을 씹고 있는 진짜 아이였다.
서사와 실제 사이의 거리가 이렇게 가까울 줄은 몰랐다.
다미가 빵을 반쯤 남기고 조심스레 물었다.
아저씨는, 저 무서워요.
이제하는 순간 멈췄다.
무섭냐니,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다들 저 무서워해요.
신관님들도, 시녀님들도.
빨간 눈이라서 그런가봐요.
이제하는 아이의 눈을 다시 들여다봤다.
붉은빛이 도는 눈동자였다.
신력을 지닌 성녀의 표식이라고 원작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무섭긴.
그냥 눈 색깔이 특이한 거지.
이제하는 대충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오래 있을 수는 없었다.
누가 봐도 이상할 상황이었다.
다음에 또 올게.
일부러 가볍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미가 옷깃을 살짝 붙잡았다.
진짜로요.
작은 손이 놓지 않으려는 듯 옷자락을 꼭 쥐고 있었다.
진짜로.
이제하는 그 작은 손을 떼어내며 문을 닫았다.
복도로 나오자 등 뒤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방금 그 약속, 지킬 수 있을까.
지켜야 한다는 것보다, 지키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가 더 선명하게 떠올랐다.
원작대로 흘러가게 두면 안 된다.
그건 이미 확실했다.
문제는 방법이었다.
회랑을 되돌아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방금까지 아이의 온기가 남아 있던 손이 유난히 차게 느껴졌다.
대전 쪽에서 또 다른 소란이 들렸다.
이번엔 다른 이름이 튀어나왔다.
이라온 왕자님께서 신전 침범 죄로 조사를 받으셔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이제하의 걸음이 멈췄다.
너무 빠르잖아.
원작대로라면 이 반역 누명은 몇 달 뒤에 씌워질 사건이었다.
성수가 붉어진 사건과 성녀의 발열, 그리고 이라온의 신전 침범 죄.
이 세 개가 이렇게 한날한시에 한꺼번에 겹칠 리가 없었다.
그런데 벌써 시동이 걸리고 있었다.
이야기가, 예정보다 빠르게 굴러가고 있었다.
이제하는 대전 쪽으로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심장이 이상하게 빠르게 뛰었다.
원작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그 시작점에 자신이 있다는 걸,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문제는, 그게 좋은 신호인지 나쁜 신호인지조차 아직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