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이라온의 방은 신전과 가장 먼 별채에 있었다.
가는 길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회랑 하나를 지나면 또 회랑이었다.
벽에 걸린 초상화들이 죄다 무표정한 얼굴로 이제하를 내려다봤다.
이제하가 문을 두드렸을 때, 안에서 아무 반응이 없었다.
똑똑.
다시 두드렸다.
여전히 조용했다.
무시하는 건가.
세 번째로 두드리려는데 문이 벌컥 열렸다.
형님이 여기 왜 오셨습니까.
문이 열리며 나온 목소리에는 날이 서 있었다.
금발의 소년이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또래보다 큰 키, 경계심이 가득한 눈.
원작 표지에 그려졌던 얼굴 그대로였다.
용건이 있어 왔다.
형님하고 저 사이에 용건이 있을 리가요.
이라온이 비꼬듯 되받았다.
원작에서도 이 둘의 관계는 최악이었다.
형이라는 자가 시비를 걸어 매질을 하게 만든 적도 있었다.
다행히 이제하는 그 기억을 몸이 아니라 머릿속으로만 가지고 있었다.
십 년 동안 형이라고 부른 적도 없었잖습니까.
이라온의 말투는 여전히 가시투성이였다.
그건 이제부터 고칠 생각이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갑자기.
너 곧 반역 누명을 쓴다.
이제하는 돌아가지 않고 직진했다.
이라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지금 저를 위협하시는 겁니까.
경고하는 거다.
이라온이 팔짱을 낀 손에 힘을 줬다.
손끝이 하얗게 변했다.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시는 겁니까.
대신들이 신전 침범을 트집 잡을 거다.
그 죄를 씌워 흑철광산으로 보낼 거야.
이라온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신전 침범이라니, 저는 그런 짓을 한 적이 없습니다.
지금은 없지.
이라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떻게 그걸 아십니까.
알아.
대답이 그거뿐입니까.
지금은 그게 다야.
이라온이 헛웃음을 지었다.
비웃음에 가까운 웃음이었다.
형님이 저를 도와줄 이유가 없는데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죠.
이유는 나중에 설명하지.
나중이라뇨.
그때 가서 흑철광산에서 죽어 있으면 무슨 소용입니까.
이제하는 잠시 말을 멈췄다.
이 녀석 말투가 만만치 않다.
죽기 전에 막으면 될 일이다.
지금 당장 유건 경한테는 말하지 마.
이라온의 눈이 가늘어졌다.
제 근위기사한테 왜.
그냥 하는 말이야.
왜 하필 그 사람 얘기를 꺼내시는 겁니까.
이라온의 목소리에 경계심이 더 짙어졌다.
이제하는 등을 돌렸다.
더 캐물으면 곤란해질 질문이었다.
뒤에서 이라온의 시선이 화살처럼 꽂히는 게 느껴졌다.
형님.
부르는 소리에 다시 돌아봤다.
왜 갑자기 이러십니까.
지금까지 저를 없는 사람처럼 대하셨잖아요.
이라온의 목소리가 살짝 갈라졌다.
분노인지, 서운함인지 구분이 안 되는 톤이었다.
그건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다.
너무 뻔뻔한 답이었다.
하지만 사실이었다.
곽대득에게 맞던 몸으로 살아온 이제하와, 지금 눈앞에 서 있는 강도훈의 정신은 이미 다른 사람이었다.
몸이 바뀐 것도 아닌데 사람이 바뀌었다는 게 말이 됩니까.
이라온이 코웃음을 쳤다.
말이 되든 안 되든, 지금 하는 말은 다 진짜다.
이라온은 여전히 팔짱을 풀지 않았다.
못 믿겠습니다.
당연히 그렇겠지.
안 믿어도 상관없어.
다만 몸조심은 해.
이제하는 그 말만 남기고 걸음을 옮겼다.
등 뒤에서 이라온이 한동안 서 있는 게 느껴졌다.
문이 닫히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냥 서서 이쪽을 보고 있는 게 분명했다.
신뢰는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는다.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이 정도면 씨는 뿌린 셈이다.
회랑 끝에서 유건이 서 있었다.
키가 크고 갑주를 두른 근위기사였다.
표정이 딱딱했다.
갑주 위로 반사된 빛이 눈을 찔렀다.
왕자님.
유건이 목례했다.
이라온 왕자님 방에는 무슨 일로.
그냥 인사차.
십 년 동안 안 하시던 인사를요.
유건의 눈초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원작에서 이 기사는 이라온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 시선이 지금 이제하를 훑는 방식이 묘했다.
의심이라기보다는, 뭔가를 이미 알고 있는 자의 눈빛에 가까웠다.
뭐 보고 있는 겁니까.
아뇨.
유건이 짧게 대답하고 지나쳤다.
발소리가 규칙적이었다.
갑주 부딪히는 소리가 챙, 챙 울렸다.
이제하는 그 뒷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원작에는 없던 반응이었다.
뭔가 이상한데.
유건이 완전히 사라진 뒤에도 그 자리에 잠시 서 있었다.
원작 설정대로라면 유건은 이라온 외의 인물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성격이었다.
왕세자든 누구든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런데 방금 그 시선은 분명 자신을 향해 있었다.
의심? 경계? 아니면.
설마 뭔가 알고 있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회귀 사실을 아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
그건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저 눈빛은 자꾸 걸렸다.
별채를 벗어나 본궁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그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발걸음이 자연히 느려졌다.
그날 밤, 이제하는 낡은 지도 한 장을 손에 넣었다.
시종 하나가 청소하다 흘린 물건이었다.
바닥에 떨어진 걸 우연히 주웠을 뿐이었다.
이게 뭐야.
접힌 종이를 펼쳤다.
낡고 색이 바랜 지도였다.
군데군데 얼룩이 져 있었다.
지도 귀퉁이에 붉은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금서고, 서궁 지하 삼층.
이제하의 눈이 그 문장에서 멈췄다.
금서고.
원작에서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은 장소였다.
서궁 지하 삼층이라는 위치도 생소했다.
누가, 왜 이런 걸 흘렸을까.
시종이 흘렸다고 했지.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이라온을 만나고 온 날, 유건의 이상한 시선을 받은 날, 하필 이런 지도가 손에 들어왔다.
우연이 아니면 뭔데.
지도를 다시 접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 안에 뭐가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그런데 확인하려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건 함정일 수도 있다.
하지만 확인하지 않고 넘길 수도 없었다.
지도를 손에 쥔 채, 이제하는 오랫동안 창밖을 바라봤다.
어두운 서궁 쪽 하늘에 유난히 짙은 구름이 걸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