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징집 통지서를 받은 날, 나는 낮잠을 자고 있었다.
볕이 좋았다. 창문 틈으로 들어온 빛이 이불 위에 네모난 자국을 그리고 있었고, 나는 그 안에 몸을 웅크리고 누워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게으른 자세로. 그게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평화였다.
똑똑, 하는 노크 소리가 들렸을 때 나는 몽롱한 정신으로 문을 열었다. 관리 두 명이 서 있었다. 표정이 없었다. 웃지도, 화나지도 않은, 그냥 업무를 처리하는 얼굴.
관리는 서류를 내 코앞에 들이밀며 말했다.
"이도훈, 만 나이 확인됐고. 신체 등급 최하."
"저기요."
"질문은 안 받습니다."
목소리에 억양이랄 게 없었다. 사무적이었다. 마치 우편물을 전달하듯, 내 인생을 통보하고 있었다.
"잠깐만요, 저 지금 낮잠 자다가—"
"짐 챙기실 시간 십 분 드립니다."
그렇게 끝이었다. 항변도, 설명도 없었다. 나는 그날로 트럭 짐칸에 실려 최전선으로 끌려갔다.
트럭 짐칸 안에는 나 말고도 세 명이 더 있었다. 다들 표정이 비슷했다. 방금 뭘 잃어버린 사람들 같은 얼굴. 서로 눈도 못 마주치고 각자 창밖만 봤다.
덜컹거리는 트럭 안에서 나는 생각했다. 이건 뭔가 잘못된 거다.
나는 싸움을 잘하지 못한다. 아니, 해본 적조차 없다. 학창 시절에 주먹다짐 한 번 해본 적이 없고, 체육 시간에도 늘 뒤에서 어슬렁거리던 쪽이었다. 그런데도 등급표에는 최하위 소모 인력이라는 도장이 찍혀 있었다.
소모 인력. 그 단어를 처음 봤을 때는 그냥 서류상의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도착해서야 알았다. 그건 표현이 아니라 계획이었다.
부대 배치소는 흙먼지 냄새가 진동했다. 사람보다 무기가 더 많이 쌓여 있었다. 창고처럼 늘어선 막사들, 녹슨 철제 상자들, 그리고 그 사이를 무표정하게 오가는 병사들. 다들 눈빛이 비어 있었다. 나는 그게 뭘 뜻하는지 아직 몰랐다.
"신병 이도훈."
보급 담당이 이름을 부르며 내 앞에 뭔가를 던졌다.
쿵.
바닥이 흔들렸다.
대검이었다. 내 키보다 반 뼘은 더 길고, 두께는 내 팔뚝 세 개를 합친 것 같았다. 표면에는 이미 여러 번 사용된 흔적이 남아 있었는데, 그게 전 주인이 어떻게 됐는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이걸... 저한테요?"
"신병용 표준 무기다. 불만 있나."
"들 수가 없는데요."
진짜였다. 손잡이를 잡아보려고 손을 뻗었지만, 무게중심조차 가늠이 안 됐다.
담당은 대답 없이 다음 신병을 불렀다. 내 존재는 이미 관심 밖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대검을 내려다봤다. 손을 대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저걸 들고 싸우라고? 나 이거 들다가 발등 찍히면 그게 첫 전투 부상이 되는 거 아닌가.
"야, 그거 못 드는 거 자랑이냐."
금발 머리 병사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얼굴엔 뭐라 설명하기 힘든 압박감이 있었다. 웃는데도 웃는 것 같지 않은 얼굴이었다. 뭔가를 많이 본 사람의 눈이었다.
"박지훈이다. 3기 신병."
"이도훈입니다."
"존댓말 안 써도 돼. 여기 계급장 없어. 죽으면 다 똑같아."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이 안 되는 말이었다. 나는 어색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이 사람은 대체 몇 기수부터 살아남은 거야. 3기라고 했지만 눈빛만 보면 30기쯤 겪은 사람 같았다.
박지훈은 내 대검을 슬쩍 밀어봤다.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거 무게가 미쳤네. 너 이거 진짜 들 수 있어?"
"모르겠어요."
"모른다고?"
"들어본 적이 없어서요."
박지훈이 픽 웃었다.
"재밌는 놈이네."
그 웃음에 왠지 모를 안도감이 섞여 있었다. 적어도 이 사람은 나를 죽을 놈이라고 대놓고 무시하지는 않았다.
"일단 따라와. 배정된 막사 알려줄게."
박지훈을 따라 걸으며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흙바닥, 녹슨 철조망, 저 멀리서 들리는 훈련 소리인지 뭔지 모를 고함들. 이게 내가 앞으로 살아야 할 곳이라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날 밤, 배정된 막사에서 나는 처음으로 동기들의 얼굴을 제대로 봤다.
한쪽 구석에는 갈색 머리 여자가 앉아 있었다. 피부와 머리카락이 유난히 상해 있었는데, 그와 대조적으로 표정만은 이상하게 밝았다. 마치 이 상황이 재밌는 여행이라도 되는 듯한 표정.
"안녕! 김하늬야."
손을 흔드는 그녀에게 나는 겨우 목례만 했다.
"말이 없네. 괜찮아, 나도 처음엔 그랬어."
처음엔 그랬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그럼 지금은 아니라는 뜻인가. 그 밝은 표정이 원래 저 사람 성격이 아니라 여기서 만들어진 거라면, 그게 더 무서운 일 아닌가.
"여긴 얼마나 있었어요?"
"음... 그런 거 세는 거 그만뒀어. 세다 보면 미쳐."
그 말을 웃으면서 했다.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저 사람 좀 봐."
박지훈이 턱짓으로 막사 밖을 가리켰다.
창밖으로, 멀리서 뭔가가 지나가고 있었다. 사람이라기엔 너무 크고, 짐승이라기엔 너무 정연한 걸음이었다. 걸음마다 지면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 같았는데, 그게 착각인지 실제인지 구분이 안 됐다.
"저게 뭐예요?"
"장무결."
박지훈의 목소리가 살짝 낮아졌다. 방금 전까지의 장난스러운 어조가 사라져 있었다.
"청명국 최전선의 전설. 흑마군 간부를 혼자서 죽인 적도 있다는 사람이야."
어둠 속에서 그 거대한 등이 지나가는 걸 지켜봤다. 등에 진 대검이, 내가 받은 것보다도 더 컸다. 어떻게 저런 걸 등에 지고 저렇게 걸을 수가 있지. 사람 맞나.
"실제로 본 적 있어요?"
"가까이서는 없어. 가까이 가면 안 된다는 얘기가 있으니까."
"근데 저 사람 눈에 들면 안 돼."
김하늬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췄다. 방금까지의 명랑한 어조와는 완전히 다른 톤이었다.
"왜요."
"저 사람한테 호의 받은 사람은... 다 죽었대."
농담 같은 말투였지만, 눈빛은 그렇지 않았다. 웃고 있는데 눈만 웃지 않는 얼굴. 어디서 많이 본 표정이었다. 아, 박지훈이었다.
"어떻게 죽었는데요?"
"몰라. 다들 그냥 그렇게 됐대. 소문이니까 믿을 필요는 없어."
"근데 조심하라면서요."
"그러니까. 안 믿는데 조심은 해야지. 그런 게 여기서 사는 방법이야."
나는 다시 그 거대한 등을 바라봤다. 이미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눈으로 좇을 수 있는 시간은 짧았지만, 그 잔상은 오래 남았다.
왜인지 모르게 속이 뒤틀렸다. 별다른 이유 없이, 그냥 그랬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 처음 듣는 이름인데, 뭔가가 마음에 걸렸다.
"그런 얘기 믿어요?"
"안 믿는데."
김하늬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도 조심은 해야지."
박지훈이 옆에서 한마디 더 붙였다.
"어차피 여기선 다 조심해야 돼. 저 사람 문제가 아니라, 그냥 여기가 그런 곳이야."
그 말이 유독 무겁게 들렸다. 창밖은 이제 완전히 어둠뿐이었다. 흙먼지 냄새와 함께 어딘가에서 희미하게 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훈련인지, 다른 뭔가인지 알 수 없었다.
그날 밤, 나는 대검 옆에 누워 잠을 청했다. 대검은 여전히 손 하나 대기 무서운 크기로 옆에 놓여 있었고, 그걸 보고 있자니 잠이 더 안 왔다.
잠은 오지 않았다.
낮잠이나 자고 싶었는데. 그 볕 좋던 오후로 돌아가고 싶었는데. 여기선 그것조차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천장을 보며 나는 오늘 본 것들을 하나씩 되짚었다. 대검, 박지훈의 웃음, 김하늬의 눈빛, 그리고 어둠 속으로 사라진 그 거대한 등.
호의를 받은 사람은 다 죽었다고 했다. 웃기는 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자꾸 그 등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걸까.
멀리서 또 한 번, 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눈을 감았지만, 잠은 여전히 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