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전장의 죽음 징크스

5화

협곡에서의 후퇴는 조용했다. 살아남은 자들의 발소리만이 낮게 이어졌다. 갑옷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 누군가의 거친 숨소리, 그리고 그 사이사이 스며드는 침묵.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말을 하면 뭔가가 무너질 것 같았다. 윤성민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그의 유품이라 할 만한 것도 남지 않았다. 마법이 남긴 건 재조차 없었다. 그가 서 있던 자리를 몇 번이나 눈으로 훑었다. 발자국조차 지워진 흙바닥. 그냥, 원래부터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이상한 기분이었다. 사람이 죽었는데 죽음의 흔적이 없다는 것. 시체도, 피 웅덩이도, 부서진 무기 한 조각도. 그냥 지워졌다. 그게 더 무서웠다. 박지훈이 내 곁으로 다가왔다. "괜찮아?" "모르겠어요." 솔직한 대답이었다. 슬픈 건지, 화난 건지, 그냥 멍한 건지 스스로도 구분이 안 됐다. 가슴 안쪽이 텅 빈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뭔가로 꽉 막혀 있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이상한 균형. "성민이 걔, 진짜 좋은 놈이었는데." 박지훈이 낮게 말했다. 목소리에 웃음기 같은 게 섞여 있었는데, 그게 더 아팠다. "영웅 되겠다고 노래를 부르더니." 영웅. 그 말이 이상하게 목에 걸렸다. 삼키지도 뱉지도 못하는 뭔가처럼. "전장은 영웅을 원하지 않아." 박지훈이 이어 말했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윤성민이 서 있던 그 빈자리를 향해 있었다. "그냥 살아남는 놈만 원하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말이 틀렸다고 반박하고 싶었는데, 반박할 근거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날 밤, 부대는 재정비를 위해 후방 진지로 이동했다. 이동 중에도 누구 하나 제대로 말을 섞지 않았다. 간부는 완전히 격퇴되지 않았고, 흑마군은 언제든 다시 밀고 들어올 수 있다는 경고가 내려졌다. 분대장은 그 경고를 전달하면서도 표정이 굳어 있었다. 그도 뭔가 확신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후방 진지는 낮의 소음이 사라진 채 낮게 웅웅거렸다. 부상병들의 신음, 치유 마법사들의 낮은 읽조림, 병장기 정비하는 소리. 그 모든 소리가 한데 섞여 하나의 무거운 배경음이 되었다. 막사에 누워 눈을 감았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자꾸 그 하얀 빛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윤성민을 삼켜버린 그 빛.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그냥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는 듯한 빛. 몇 번이나 눈을 떴다가 다시 감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의식이 흐려졌다. 꿈속에서, 윤성민이 웃고 있었다. 살아있을 때 그대로의 모습으로. 어깨를 툭툭 치던 그 버릇 그대로. "도훈아, 나 영웅 됐어?" "...몰라." "전장은 영웅을 원하지 않는대." 그가 내가 낮에 들었던 말을 그대로 따라 했다. 억양까지 비슷했다. 마치 어디선가 그 말을 이미 들은 것처럼. "근데 넌 좀 다를 것 같아. 살아. 그냥 살아." 그가 손을 흔들며 멀어졌다. 붙잡으려 했지만 손이 허공을 헤집었다. 목소리를 내려 했지만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눈을 뜨자 새벽이었다. 이마에 식은땀이 배어 있었다. 막사 밖에서 김하늬의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아?" 나는 대답하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대답할 힘이 없었다. 그냥, 밖의 찬 공기가 필요했다. 서은하가 막사 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담배 대신 뭔가 향이 나는 스틱을 물고 있었다. 새벽 안개 속에서 그 연기가 천천히 흩어졌다. "잠은 잘 잤어?" "아니요." "당연하지." 그녀가 나를 훑어봤다. 뭔가를 재는 눈빛이었다. 마치 내 몸 어딘가에 붙은 표식을 확인하는 것처럼. "대병사가 널 계속 신경 쓰고 있어." "신경 안 써도 되는데요." "그건 걔가 결정할 일이지, 네가 결정할 일이 아니야." 그녀의 말투에는 냉소가 짙게 배어 있었다. 마치 이런 대화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는 듯한, 지친 듯한 냉소. "징크스라는 거, 진짜예요?" 내 질문에 그녀가 잠시 멈췄다. 스틱의 연기가 그녀의 얼굴 앞을 지나갔다. 그 짧은 순간, 그녀의 표정에서 뭔가 스쳐 지나갔다. 확신인지, 회한인지 구분이 안 됐다. "믿고 싶은 대로 믿어. 근데 하나는 확실해." "뭔데요." "그 사람 곁에 있던 사람들 명단이랑, 죽은 사람들 명단이 이상하게 많이 겹쳐." 그 말이 가슴에 박혔다. 윤성민의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그리고 그전에, 그전에 있었던 다른 이름들도. "그럼 저는요." 내가 물었지만 그녀는 이미 돌아서고 있었다. "저도 그 명단에 있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돌아섰다.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발걸음 소리가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혼자 남은 나는 그 자리에 한참을 서 있었다. 새벽 공기가 폐 깊숙이까지 차갑게 스며들었다. 오전이 되자, 다시 출격 명령이 내려왔다. 격퇴되지 않은 간부가 재정비된 병력을 이끌고 진영을 향해 오고 있다는 보고였다. 보고를 전하는 전령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번엔 규모가 다르다." 분대장의 목소리에는 긴장이 짙게 배어 있었다. "전 병력 총동원. 흑마군 본대급 병력이 접근 중." 막사 안이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무기를 챙기는 소리, 갑옷을 조이는 소리, 누군가 낮게 욕설을 내뱉는 소리. 어제 협곡에서의 후퇴가 무색할 만큼 빠르게 다시 전열이 갖춰졌다. 박지훈이 내게 다가와 짧게 말했다. 그의 손이 내 어깨를 잡았다. 평소보다 힘이 셌다. "이번엔 나도 무슨 일 있을지 몰라. 근데 하나만 기억해." "뭘요." "네 대검 이상한 거, 그거 나쁜 게 아니야. 그냥 네가 뭔가 다른 거야."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다 이해하지도 못한 채, 나는 대검을 등에 짊어졌다. 등에 닿는 그 무게가 평소와는 다르게 느껴졌다. 마치 대검이 나에게 뭔가 말을 걸어오는 것 같은, 그런 이상한 감각이었다. 진영을 나서면서 뒤를 한 번 돌아봤다. 후방 진지의 부상병들, 그 사이를 오가는 치유 마법사들. 저들 중 몇이나 오늘 밤에도 무사히 이 자리로 돌아올 수 있을까. 협곡 저편에서, 검은 물결처럼 흑마군 병력이 몰려오고 있었다. 지평선을 뒤덮은 검은 그림자가 서서히 다가오는 모습은, 마치 바다가 밀려오는 것처럼 보였다. 거스를 수 없는, 압도적인 규모였다. 그 속에서, 가면을 쓴 간부의 형체가 뚜렷이 드러났다. 그는 완전히 물러난 게 아니었다. 오히려 더 큰 걸음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 가면 뒤에 숨겨진 표정이 어떨지 궁금했다. 승리를 확신하는 웃음일까, 아니면 무표정한 계산일까. 서은하가 지팡이를 다잡으며 낮게 중얼거렸다. "이번엔 안 봐줄 것 같은데." 그녀의 목소리에서 평소의 냉소가 사라져 있었다. 그게 더 불안했다. 장무결이 대검을 뽑아 들었다. 그의 눈이 나를 향했다. 잠깐이었지만 그 시선이 내 몸 전체를 훑는 것 같았다. "이번엔 뒤로 빠지지 마라." 그 말이 명령인지, 부탁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협곡 전체가 곧 다가올 충돌을 예감하듯 무겁게 가라앉았다. 바람 한 점 없는데도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처럼 느껴졌다. 나는 대검의 손잡이를 다시 한번 힘주어 쥐었다. 손바닥에 배는 땀이 손잡이와 살갗 사이를 미끄럽게 만들었다. 이 검이 정말 나에게 뭔가 다른 걸 원하고 있는 걸까. 그 질문에 답할 시간은 없었다. 검은 물결은 이미 협곡의 절반을 넘어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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