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끼익.
서재 문이 바람에 밀려 살짝 열렸다가 다시 닫혔다. 그 소리에 나는 숨을 참았다. 회계석 뒤에 웅크린 자세로, 무릎이 저려오는 것도 잊고 있었다.
"거기 누구 있어?"
다시 물었다. 이번엔 조금 더 짜증 섞인 목소리였다. 나는 회계석 뒤에서 몸을 일으켰다. 숨어봤자 소용없었다. 방금 창문 사이로 달빛이 내 얼굴을 정확히 비추고 있었다.
들켰다. 됐다, 이제.
"저는... 이 집 딸입니다." 나는 겨우 그렇게 대답했다.
목소리가 서재의 텅 빈 공기 속에서 이상하게 크게 울렸다. 나는 손바닥에 땀이 나는 걸 느끼며 천천히 몸을 폈다.
달빛 속에서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나이는 나보다 한두 살 많아 보였다. 은색에 가까운 밝은 금발이 어깨 아래로 흘러내렸고, 야회복 차림에 목에는 큼직한 보석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목걸이 하나만 팔아도 이 남작가 저택을 다시 지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시골 남작가 저택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사치스러운 차림이었다.
"딸이라... 근데 왜 이 시간에 여기 숨어 있어?"
"그건... 그쪽이 먼저 대답해야 할 것 같은데요. 여긴 저희 집 서재입니다."
내 목소리가 떨렸던가. 아니면 안 떨렸던가. 나도 모르겠다. 다만 이 상황이 최악이라는 건 확실했다. 새벽 두 시, 손에는 아직 마력 냄새가 남아 있고, 등 뒤에는 방금까지 만지고 있던 코드 격자가 반쯤 남은 채로 떠 있었다. 다행히 저 여자는 아직 그걸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녀가 웃었다. 짧고 낮은 웃음. 어딘가 재밌어하는 것 같은, 아니면 상대를 가늠하는 것 같은 웃음이었다.
"이시은. 대공작가 셋째 딸. 아버지가 이 근방 지도 측량 관계로 남작님을 뵈러 왔는데, 마차가 늦어서 먼저 저택 안을 좀 구경하고 있었어."
대공작가. 그 이름이 머릿속에서 경보를 울렸다. 이 나라에서 왕가 다음으로 힘 있는 가문. 그런 집안 영애가 예고도 없이, 이 밤에, 우리 서재에 서 있었다. 남작가 서재 구경이라니. 대공작가 영애가 흥미를 가질 만한 물건이 여기 있을 리 없는데. 아니, 사실은 하나 있긴 하다. 방금까지 내가 만지고 있던 그 회계석.
"실례가 많았습니다." 나는 최대한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회계석. 지금 회계석 위에 코드 격자가 아직 남아 있나. 저 애가 그걸 봤을까. 봤다면, 몇 초나 봤을까. 그 몇 초 사이에 뭘 알아챌 수 있는 사람일까.
계산이 끝나기도 전에 이시은의 시선이 회계석으로 향했다. 정확히, 내가 방금까지 만지고 있던 그 수정구로.
"저거, 뭐 하고 있었어?"
"장부 정리요." 나는 대답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정확한 표현은 아니었지만. 원래 회계석이 하는 일이 장부 정리 비슷한 거니까,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스스로도 궁색하다는 걸 알았다.
"이 시간에? 촛불도 없이?"
말문이 막혔다. 그러고 보니 초 하나 켜놓지 않았다. 달빛만으로 코드를 읽을 수 있으니 촛불 따위 필요 없었는데, 보통 사람 눈에는 그게 더 수상해 보이겠지. 나는 뭐라도 대답을 짜내려 했지만, 그 사이 이시은은 회계석 쪽으로 걸어가더니, 손을 뻗어 그 표면을 훑었다. 나는 얼어붙었다.
"이상하네." 그녀가 중얼거렸다. "이 수정구, 마력 흐름이 이상해. 방금 뭔가 건드린 것처럼—"
손끝이 회계석 표면을 따라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나는 그 움직임을 눈으로 쫓으며, 저 손이 어디까지 코드를 읽어낼 수 있을지 계산했다. 계산이 자꾸 틀렸다. 이 사람이 뭘 감지하는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녀가 나를 돌아봤다. 눈이 마주쳤다. 그 눈빛에서 나는 확신했다. 이 사람은 마력을 느낄 수 있는 감각이 상당히 예민했다. 어쩌면 마력의 코드까지 어느 정도 감지할 수도 있었다. 그 정도 감각을 가진 사람이 흔치 않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재수가 없었다는 뜻이다.
"너." 그녀가 천천히 말했다. "마력이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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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을 새도 없었다. 이시은은 팔짱을 끼고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그 시선이 발끝에서 시작해 얼굴까지 천천히 올라오는 동안, 나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마력이 없는데 마법 도구를 만졌어. 그런데 반응이 있었어. 이건 흔한 경우가 아니야."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말이 없었다. 도망칠 수도 없었다. 상대는 대공작가 영애였다. 여기서 어설프게 도망치면 오히려 의심만 커진다. 게다가 이 서재는 출구가 하나뿐이고, 그 출구는 그녀 등 뒤에 있었다. 도망친다는 선택지 자체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머리를 굴렸다. 여기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뭘까. 부정해봐야 소용없다. 이미 저 사람은 확신하고 있는 눈치였다. 그렇다면 부정보다는—
"저를 신전에 넘길 건가요." 나는 최대한 담담하게 물었다. 속으로는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게 신경 썼다. 이 세계에서 마력 없이 마법 도구를 다룬다는 게 얼마나 위험한 소문거리인지, 신전이 그런 존재를 어떻게 취급하는지, 나는 이미 지겹도록 들어 알고 있었다.
이시은은 잠깐 침묵했다. 그러다 피식 웃었다.
"그럴 이유가 없지. 나도 지금 남한테 보여줄 수 없는 게 있으니까."
그 말투가 이상하게 자연스러웠다. 마치 오래 알던 사람과 대화하는 것처럼. 대공작가 영애치고는 지나치게 솔직하다 싶었다. 아니면 이런 식으로 상대를 무장 해제시키는 게 익숙한 사람이거나.
"무슨 뜻이죠."
그녀는 대답 대신 자기 손등을 걷어 올렸다. 소맷단이 스르륵 밀려 올라가면서, 그 아래로 옅은 흉터 같은 자국이 보였는데, 자세히 보니 흉터가 아니었다. 마력이 피부 아래에서 미세하게 흘러나오면서 남긴, 화상 비슷한 흔적이었다. 손목에서 팔꿈치까지, 마치 나뭇가지가 갈라지는 모양으로 뻗어 있었다.
"내 마력이 좀 이상해. 예전부터 그랬어. 요즘은 더 심해지고 있고. 그래서 다들 나를 조심스럽게 대하지. 만약 내가 여기서 너를 신전에 넘기면, 너도 나에 대해 뭔가 흘릴 수 있잖아. 그럼 서로 손해야."
계산적인 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안심이 됐다. 계산으로 움직이는 사람은, 적어도 예측이 가능하니까. 감정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제일 무섭다. 뭘 할지 예측이 안 되니까. 이 여자는 그런 부류는 아닌 것 같았다. 일단은.
"그럼 서로 모르는 척하기로 하죠." 나는 제안했다. 최선의 시나리오였다. 이대로 각자 갈 길 가고, 다시는 마주치지 않는 것.
"아니." 이시은이 고개를 저었다. "모르는 척은 재미없어. 나는 네가 뭘 하는지 알고 싶어. 마력 없이 마법 도구를 어떻게 건드린 건지."
"...알려드릴 이유가 없는데요."
"이유는 만들면 돼."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내가 네 비밀을 지켜주는 대신, 너는 내 비밀도 지켜줘. 그리고—" 그녀가 회계석을 다시 손끝으로 툭 쳤다. 표면에서 희미하게 코드가 일렁였다가 사라졌다. "이거, 나도 보여줘. 뭘 어떻게 한 건지."
이런 식의 거래를 좋아하지 않는다. 상대가 나보다 훨씬 큰 패를 쥐고 있는 거래는 애초에 거래가 아니다. 그냥 통보다. 하지만 지금 이 방에서 나에게 다른 패가 있을 것 같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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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나는 설명했다. 아주 조심스럽게, 최소한의 정보만.
"저는 마법의 구조를 볼 수 있어요. 마력을 다룰 순 없지만, 어디가 잘못됐는지는 보여요. 그래서 아주 가끔, 그 잘못된 부분이 저절로 고쳐지기도 해요."
말하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이렇게 간단히 말할 수 있는 걸, 몇 년 동안 아무한테도 못 했다니. 전생을 통틀어도 이렇게 짧게 내 일을 설명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시스템 점검 보고서를 세 줄로 요약하는 기분이었다.
이시은은 눈을 크게 뜨더니, 곧 흥미로운 표정으로 바뀌었다. 방금까지 나를 심문하던 표정과는 완전히 다른, 어린아이가 새로운 장난감을 발견했을 때 짓는 표정이었다.
"그럼 내 것도 볼 수 있어?"
"뭘요?"
"내 마력. 왜 이렇게 이상한지."
그녀가 팔뚝의 흉터를 다시 내밀어 보였다. 달빛 아래에서 그 자국이 아주 희미하게,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눈의 착각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었다.
나는 잠깐 그녀를 쳐다봤다. 대공작가 영애의 마력 문제에 개입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는 알고 있었다. 잘못 건드리면 그 즉시 대공작가와 얽히는 거고, 대공작가와 얽히는 순간부터 내 인생은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궤도를 그리게 될 게 뻔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 격자를 한 번이라도 보고 싶다는 욕구가 더 컸다. 전생의 직업병이 또 발동하고 있었다. 이상 신호를 보면 원인을 찾아야 잠이 오는 병.
망했다. 이건 나쁜 버릇이라는 걸 알면서도, 손이 먼저 나가고 있었다.
"...한 번만요."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손끝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겉으로는 태연했지만, 저 사람도 이걸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게 처음이라는 게 느껴졌다. 나는 그 손을 잡았다. 손바닥이 예상보다 뜨거웠다.
그 순간, 나는 처음으로 사람의 몸 안에 흐르는 코드를 봤다.
지금까지 내가 본 건 전부 물건이었다. 수정구, 마법 도구, 결계석. 죽어 있는 재료 안에 새겨진 죽은 코드들. 그런데 사람 몸 안의 코드는 완전히 달랐다. 살아 움직였다. 심장 박동에 맞춰 격자 전체가 맥박치듯 일렁였고, 손목에서 어깨로, 어깨에서 가슴으로 이어지는 통로마다 코드 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마치 혈관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다만 그 혈관 어딘가에, 있어서는 안 될 매듭이 있었다.
그리고 그걸 본 순간, 나는 알았다. 이건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가슴 근처, 정확히 심장 바로 옆에서 코드 하나가 완전히 뒤틀려 있었다. 원래는 곧게 흘러야 할 선이 스스로 자기 몸을 물어뜯듯 엉켜 있었고, 그 매듭 주변으로 다른 코드들이 조금씩 밀려나면서 전체 구조가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저 여자가 느끼는 그 화상 자국들, 그게 우연이 아니었다. 심장 옆 매듭에서 새어 나온 마력이 갈 곳을 못 찾고 피부 밖으로 억지로 뿜어져 나오고 있는 거였다.
나는 손을 놓지 못했다. 놓아야 하는데, 눈이 그 매듭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왜 그래?" 이시은이 물었다. 목소리에 처음으로 긴장이 섞였다. "표정이 이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