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이시은은 정말로 며칠 뒤 다시 왔다. 이번엔 마차도 안 타고, 근처까지 걸어와서 저택 뒷문으로 몰래 들어왔다.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방식이었지만, 그녀는 그런 걸 신경 쓰는 성격이 아니었다.
뒷문 담벼락에 붙어 서서 손짓하는 그녀를 보자마자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귀족가 영애가 하녀도 없이 혼자 골목을 돌아왔다는 게 알려지면 무슨 소문이 날지 상상만 해도 머리가 아팠다. 하지만 이제 와서 예의범절을 가르칠 처지도 아니었다. 나는 그냥 문을 열어줬다.
"손목 상태는 괜찮은데, 요즘 좀 어지러워." 그녀가 정원 구석, 사람 눈에 안 띄는 나무 그늘 아래서 말했다.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무심했지만, 얼굴빛이 조금 창백했다. 눈 밑에 옅은 그늘이 있었다. 잠을 제대로 못 잔 사람의 얼굴이었다.
나는 다시 그녀의 손을 잡고 코드를 살폈다. 억제 함수는 여전히 활성화된 상태였지만, 뭔가 이상했다. 함수 호출 빈도가 이전보다 더 불규칙했다. 억제가 걸려 있는데도 순환이 완전히 눌리지 않고, 오히려 부분적으로 튕겨 나오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뚜껑을 눌러놓은 냄비에서 김이 옆구리로 새는 모양새였다.
"열이 좀 있어요?" 나는 물었다.
"몰라. 재본 적 없어."
"어지러운 게 언제부터예요."
"이틀 전부터. 자다가 깬 적도 있어."
나는 손끝으로 격자를 따라가며 함수 호출 지점을 하나씩 확인했다. 정상이라면 순환 함수가 억제 함수를 만나 값이 0에 가깝게 눌려야 했다. 그런데 지금은 값이 0 근처에서 계속 흔들렸다. 억제가 걸린 채로 미세하게 떨리는 느낌이었다.
"억제 강도를 좀 더 올려야 할 것 같아요." 나는 말했다. "근데 그러려면 다른 부분을 손대야 해요. 지금 걸린 억제는 원래 응급용으로 짜인 거라, 오래 버티는 구조가 아니에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해."
"모르겠어요. 저도 지금 이게 왜 이렇게 즉시 반영되는지도 원리를 모르는데, 강화하는 건 더 어려워요."
솔직히 말하면 무서웠다. 응급 처치로 걸어둔 코드에 손을 더 대는 건, 이미 위태로운 구조물에 못 하나를 더 박는 일과 비슷했다. 잘못 박으면 전체가 무너질 수도 있었다.
이시은은 잠깐 침묵하다가 물었다.
"넌 왜 이렇게 나를 도와주는데."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나는 손을 그녀의 손목에서 떼지 않은 채로 잠깐 생각했다.
"...비효율적인 걸 못 참아서요." 나는 사실대로 대답했다. "당신 몸 안의 코드가 잘못 짜여 있는 걸 보고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어요."
이시은이 웃었다. 이번엔 좀 다른 웃음이었다. 평소의 삐딱한 웃음이 아니라, 약간 어이없다는 듯한, 그러면서도 부드러운 웃음이었다.
"이상한 이유네. 근데 마음에 들어."
나는 그 말에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손목을 놓았다. 그녀는 소매를 다시 내리면서 나무 그늘 밖으로 걸어 나갔다. 뒷모습이 담을 넘어 사라질 때까지, 나는 그 자리에 서서 코드의 잔상을 계속 떠올렸다. 뭔가 놓치고 있다는 느낌이 가시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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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며칠간, 나는 밤마다 저택 재무 시스템을 고치는 일과 이시은의 마력 억제를 유지하는 일을 병행했다. 둘 다 은밀하게 진행해야 하는 일이라 체력이 남아나지 않았다. 낮에는 마력 측정을 자꾸 미루는 것 때문에 아버지 눈치를 봐야 했고, 밤에는 촛불 아래서 코드를 읽어야 했다.
낮 동안은 평범한 귀족가 자제처럼 굴어야 했다. 식사 예절, 인사법, 시답잖은 잡담. 아버지가 지나가듯 "마력 측정은 언제 할 거냐"고 물을 때마다 나는 배가 아프다거나 컨디션이 안 좋다는 핑계를 댔다. 몇 번은 통했지만, 매번 통할 리는 없었다. 눈치 빠른 하인 하나가 슬쩍 웃던 게 마음에 걸렸다. 저 도련님이 자꾸 아프다고 하시네, 하는 그런 웃음이었다.
밤이 되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촛불 하나만 켜놓고 책상에 앉아, 낮에 슬쩍 베껴온 저택 회계 기록을 코드로 옮겼다. 세금 계산 로직은 예상보다 복잡했다. 영지에서 걷는 세금 항목이 열 몇 가지가 넘었고, 각 항목마다 계산 방식이 조금씩 달랐다. 누가 이렇게 짜놨는지 몰라도, 효율은 개나 줘버린 구조였다. 나는 그걸 하나씩 정리하면서 속으로 몇 번이나 육두문자를 삼켰다.
다행히 마력 측정은 어머니가 슬쩍 나서서 '몸이 약해서 좀 더 미루는 게 낫겠다'고 아버지를 설득해준 덕에 조금 더 시간을 벌었다. 어머니가 정확히 뭘 알고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뭔가 알고 있는 눈치였다. 언젠가 어머니의 방을 지나갈 때, 방 안에서 낮게 흘러나오는 혼잣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 아이가 뭘 하고 다니는지는 몰라도, 남 도와주는 성격은 어디서 물려받았을꼬." 나는 그 말을 못 들은 척 지나쳤다.
다행이다. 그런데 동시에 불안하다. 어머니가 알면서 모른 척하는 거라면, 그 침묵이 언제까지 유지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언젠가는 이 균형이 깨질 거라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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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나는 저택 재무 시스템의 마지막 단계를 손대고 있었다. 세금 계산 로직. 여기만 고치면 큰 틀은 거의 완성이었다.
촛불이 반쯤 타들어간 시간이었다. 나는 회계석 아래 숨겨둔 서판에 마지막 조건문을 적어넣고 있었다. 조세율 계산에서 소수점 오차가 계속 발생하던 부분을 겨우 잡아낸 참이었다. 이거 하나 잡느라 사흘을 썼다. 됐다, 하나 남았다, 속으로 그렇게 되뇌던 참이었다.
그런데 회계석 앞에서 코드를 살피던 도중, 저택 저편에서 비명이 들렸다.
"으악!"
하녀의 목소리였다. 나는 회계석을 그대로 두고 뛰어나갔다. 서판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뒤에서 들렸지만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소리가 난 곳은 뒤뜰 창고 근처였다.
복도를 뛰어가는 동안 심장이 이상하게 뛰었다. 단순히 뛰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뭔가 잘못됐다는 감각이 몸 전체를 훑고 지나갔다.
뛰어가서 본 광경은, 예상보다 훨씬 나빴다.
이시은이 창고 앞에 서 있었고, 그녀 주변으로 옅은 빛이 불규칙하게 튀고 있었다. 마치 정전기가 튀는 것처럼, 하지만 그보다 훨씬 강하고 위험한 빛이었다. 빛이 튈 때마다 낮게 파직, 하는 소리가 났다.
파직. 파지직.
그 소리가 어둠 속에서 유독 크게 들렸다. 그리고 그 빛 근처에, 하녀 한 명이 바닥에 쓰러진 채 신음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나는 소리쳤다.
"모르겠어! 갑자기—" 이시은의 목소리가 떨렸다. 처음 듣는 떨림이었다. 평소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느껴본 적 없는 종류의 흔들림이었다. "억제가 갑자기 풀렸어. 그냥 지나가다가, 저 사람이 놀라서 소리 지르니까 뭔가 반응한 것처럼—"
나는 재빨리 쓰러진 하녀에게 다가갔다. 몸에 화상 비슷한 흔적이 여러 군데 나 있었다. 팔뚝과 목덜미, 손등에 붉게 부어오른 자국이 선명했다. 숨은 쉬고 있었다. 다행이다. 하지만 마력 화상이라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나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저 위험할 것 같다는 감이 강하게 들었다.
"의사를 불러야 해요." 나는 말했다.
"그럼 이게 다 드러나잖아." 이시은이 낮게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엔 두려움과 냉정함이 뒤섞여 있었다. 그 낙차가 오히려 상황의 심각성을 더 실감나게 만들었다. "내 마력이 폭주해서 하녀를 다치게 했다는 게 알려지면, 신전에서 나를 완전히 격리시킬 거야. 아니면 더 나쁜 일이 벌어질 수도 있어."
"그럼 이 사람은 어떻게 하고요."
"내가 직접 치료할게."
"...직접이요?"
이시은은 손목을 걷어 올렸다. 그 아래로 억제 코드가 다시 불규칙하게 튀고 있는 게 보였다. 촛불도 없는 어둠 속에서, 나는 그 코드의 불빛만으로도 그녀의 상태가 얼마나 위태로운지 알 수 있었다.
"신전 술사한테 배운 응급 치료 마법이 있어. 정식으로는 아직 못 쓰는 수준이지만, 지금은 그거밖에 방법이 없어."
나는 그 말이 위험하다는 걸 즉시 알아챘다. 마력이 불안정한 사람이, 정식으로 배우지 않은 치료 마법을 강행하는 것. 이건 하녀도 위험하고, 이시은 본인도 위험한 일이었다. 코드로 치자면, 이미 예외가 터진 상태에서 검증도 안 된 함수를 강제로 호출하는 것과 같았다. 잘못되면 스택 전체가 무너진다.
"하지 마세요."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 당신 코드 상태가 얼마나 불안정한지 몰라요? 그 상태로 마법을 쓰면 오히려 더 나빠질 수 있어요."
"그럼 대안이 있어?" 이시은이 나를 쳐다봤다. 그 눈빛엔 절박함이 있었다. 평소의 여유가 사라진, 날것의 눈빛이었다. "의사를 부르면 어차피 다 드러나. 방치하면 이 사람이 죽을 수도 있어. 지금 당장 뭘 할 수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다면, 내가 하는 게 맞잖아."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하녀의 신음 소리가 점점 낮아지고 있었다. 시간이 없다는 게 몸으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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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순간적으로 계산했다. 전생의 습관이었다. 위기 상황일수록 감정보다 논리가 먼저 움직였다.
의사를 부르면—외부인이 개입한다. 이시은의 신분과 비밀이 드러날 위험이 크다. 신전이 개입하면 그녀는 앞으로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할 거다. 하지만 하녀의 생존 확률은 올라간다. 의사는 최소한 정식으로 훈련받은 사람이다.
이시은이 직접 치료하면—신분과 비밀은 지켜진다. 하지만 그녀의 불안정한 마력이 시술 중 다시 폭주할 위험이 있다. 하녀도, 이시은 본인도 위험해질 수 있다. 최악의 경우 둘 다 잃을 수도 있었다.
둘 다 완벽한 답이 아니었다. 그리고 나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하녀의 신음 소리가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세 번째 선택지가 있을까. 나는 짧은 순간 그것도 생각해봤다. 내가 코드를 붙잡고 직접 억제 강도를 임시로 올려버리는 것. 하지만 그건 너무 즉흥적이었다. 지금 당장 안전하게 조정할 자신이 없었다. 잘못 만지면 오히려 더 큰 폭주를 부를 수도 있었다.
"...제가 옆에서 코드를 계속 봐줄게요." 나는 결국 말했다. "이상해지면 바로 멈추세요. 제가 신호 줄게요."
이시은이 나를 쳐다봤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창고 옆 나무에서 바람에 잎이 흔들리는 소리만 낮게 들렸다.
"고마워." 그녀가 짧게 말하고, 하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나는 그녀의 손목에 손을 얹었다. 코드 격자가 눈앞에 펼쳐졌다. 억제 함수는 여전히 불규칙했지만, 치료 마법을 시작하는 순간 다른 함수 하나가 새로 호출되기 시작했다. 낯선 함수였다. 이름표도 없이, 그저 값만 흘러가는 임시 코드였다. 나는 그 함수를 최대한 집중해서 지켜봤다. 손가락 끝에 땀이 배어났다.
이시은의 손끝에서 옅은 녹색 빛이 흘러나와 하녀의 상처 위로 스며들었다. 빛이 스며들 때마다 하녀의 신음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억제 함수의 값도 함께 흔들렸다. 나는 그 값이 임계점을 넘지 않도록 눈을 떼지 않았다.
괜찮다. 지금까지는 괜찮다.
나는 그렇게 되뇌며 계속 코드를 지켜봤다. 손끝으로 이시은의 맥박이 조금씩 빨라지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속으로는 알고 있었다. 이건 시작일 뿐이라는 걸. 우리는 지금, 돌이킬 수 없는 선을 함께 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