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D-5]
숫자가 또 줄었다.
마음이 급해지는 만큼 몸도 급해졌다.
오늘도 새벽 훈련을 나가려는데, 방문 앞에 하윤이 서 있었다.
이 시간에 하윤이 서 있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평소엔 내가 몰래 빠져나가도 모르는 척 해주던 사람인데.
"도련님, 오늘은 검술 사범을 불러드리겠습니다."
"네?"
"혼자 훈련하시다 다치실까 걱정됩니다."
뭐지, 이 급전개는.
어제 손목 자세 좀 봐준 게 이렇게까지 발전할 일인가.
사람 하나 늘리는 게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이라고, 마치 편의점 아르바이트생 뽑듯 툭 던지듯 말하는 하윤의 태도가 더 이상했다.
일단 사범이라니, 나쁘지 않았다.
제대로 배울 수 있으면 좋았다.
어차피 나 혼자 유튜브 보고 익힌 자세로 검을 휘두르는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아니, 이 세계에 유튜브가 있을 리가 없지.
전생의 기억으로 어설프게 흉내 내는 수준이었으니, 사범이 붙는 건 오히려 감사할 일이었다.
그런데 뭔가 하윤의 표정이 평소보다 더 딱딱했다.
입꼬리는 웃고 있는데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마치 임대차 계약 갱신 안 해주겠다고 통보하는 건물주 얼굴이었다.
"저기,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요."
"...아닙니다. 이건 가문의 일입니다."
가문의 일?
어제 새벽 몰래 훈련하는 걸 목격당한 게 이렇게 큰 사건으로 번지는 건가.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혹시 이미 아버지한테 보고된 건 아닐까.
설마, 설마 그럴 리가.
아니, 이 집안 정보력을 보면 그럴 수도 있었다.
사용인들 사이의 눈빛 교환 몇 번이면 저택 안의 소식은 삼십 분도 안 돼서 당주 귀에 들어간다는 걸, 나는 이 몸으로 살아온 지난 며칠 동안 뼈저리게 체감했다.
답은 그날 저녁에 나왔다.
식사 시간, 아버지 무진혁이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무진혁은 이 변경 영지의 당주였다.
키가 크고 어깨가 넓었으며, 검을 오래 쥔 사람 특유의 굳은살이 손등까지 배어 있었다.
원작에서도 '냉정하지만 자식을 아끼는 아버지'로 짧게 묘사된 캐릭터였다.
그런데 지금, 그 냉정한 눈빛이 나를 향해 있었다.
숟가락을 들다가 그 눈빛을 마주친 순간, 나는 숟가락을 든 채로 그대로 얼어붙었다.
국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결아."
"네, 아버지."
"요즘 새벽에 검을 든다고 들었다."
올 것이 왔다.
숟가락을 슬며시 내려놓았다. 이럴 땐 손에 무기를 들고 있으면 왠지 더 죄인 같아 보이니까.
"...그, 그게, 그냥 좀 운동을 해야겠다 싶어서요."
"운동."
무진혁이 그 단어를 곱씹듯 되뇌었다.
마치 처음 들어보는 외국어라도 되는 양, 입안에서 그 단어를 두어 번 굴리는 것 같았다.
"아홉 살짜리가 새벽부터 목검을 들고 손목을 다치는 것도 아랑곳 않고 반복한다는 게, 단순한 운동으로 보이더냐."
오, 이거 생각보다 심각한 반응인데.
헬스장 PT 등록한 애한테 왜 그렇게까지 열심히 하냐고 다그치는 느낌이랄까.
나는 최대한 자연스러운 척 웃으며 말했다.
"제가 좀 몸이 약해서요. 강해지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
"..."
무진혁이 한동안 나를 쳐다봤다.
그 시선이 너무 진지해서 오히려 더 불안했다.
차라리 화를 내면 편할 텐데, 이 아저씨는 화도 안 내고 그냥 뚫어지게 쳐다보기만 했다.
"그래, 강해지고 싶다는 마음, 나쁘지 않다."
"그, 그렇죠? 별거 아니죠?"
"허나."
무진혁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하윤에게 들었다. 네가 새벽에, 마치 무언가를 두려워하듯 검을 휘두른다고."
하윤, 너 진짜 다 보고했구나.
아니 그럴 거면 애초에 왜 사범을 붙여주겠다고 웃으면서 말한 거야.
뒤에서는 다 아버지한테 이르면서.
이게 무슨 배신이야, 나름 정 붙였는데.
"...무서운 게 있어서요."
솔직하게 말했다. 거짓말할 이유가 없었다.
"무엇이 무섭더냐."
"...늑대요."
말이 튀어나온 순간, 나는 아차 싶었다.
너무 구체적이잖아.
차라리 그냥 "귀신이요" 라거나 "어둠이요" 같이 애매하게 뭉갤 수도 있었는데, 어쩐지 입에서 튀어나온 건 진짜 원인 그 자체였다.
하지만 이미 뱉은 말이었다.
주워 담을 수도 없고.
무진혁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아주 짧은 흔들림이었지만, 나는 분명히 봤다.
"늑대라니."
"그, 그냥 꿈에서 늑대한테 쫓기는 꿈을 꿔서요."
허접한 변명이었지만, 지금 상황에서 최선이었다.
꿈 얘기만큼 무난하게 넘어갈 수 있는 핑계가 어디 있겠는가.
꿈이라고 하면 다들 그냥 "어린애가 그렇지" 하고 넘어가주는 법이니까.
무진혁은 잠시 침묵했다.
식탁 위의 촛불이 흔들리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그러다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내 쪽으로 다가왔다.
덜컥.
의자가 뒤로 밀리는 소리가 났다.
뭐지, 설마 이 자리에서 진짜 정체를 캐물으려는 건가.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릴 지경이었다.
무진혁이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당주가, 이 저택에서 제일 높은 사람이, 아홉 살짜리 자식 앞에 무릎을 꿇는다는 게 얼마나 이상한 광경인지, 옆에서 시중을 들던 하녀들도 흠칫하며 눈을 굴리는 게 보였다.
그러고는 내 두 손을 자기 손으로 감쌌다.
크고 두꺼운 손이었다. 굳은살이 배긴 손바닥이 내 손을 덮으니 손이 통째로 사라진 것 같았다.
"결아. 아비에게 숨기는 게 있느냐."
으악.
이건 완전 정면 승부다.
숨기는 게 있냐고 물으면, 있다고 해야 할까 없다고 해야 할까.
실제로는 '저는 사실 30대 한국인 회사원이었고 이 몸의 원래 주인은 일주일 뒤 늑대한테 뜯겨 죽을 운명이라 벼락치기로 검술을 배우는 중입니다'라고 해야 하는데, 그걸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말하면 진짜 정신병자로 끌려갈 게 뻔했다.
아니, 이 세계관에 정신병원이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있다면 진짜 그 1호 입원 환자가 될 것 같았다.
아니면 뭔가 신성한 예언자나 무당 취급을 받아서 신전에 팔려갈 수도 있고.
어느 쪽이든 좋은 결말은 아니었다.
"...없어요."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다.
"그냥 무서운 게 있어서 강해지려고요."
무진혁은 한참을 내 눈을 들여다봤다.
그 시선을 피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눈을 피하면 더 의심받을 것 같았으니까.
면접장에서 압박 질문 받을 때처럼, 눈만은 절대 흔들리지 않게 버텼다.
그러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겠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전혀 '알겠다'는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뭔가 확신에 가까워진 듯한, 심각한 눈빛이었다.
마치 답을 이미 알고 있는데 굳이 다시 확인하는 사람처럼.
[관찰자 무진혁]
아들의 눈은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침묵 속에는 무언가 거대한 것이 눌려 있었다.
두려움이라 하기엔 지나치게 차분했고, 겁이라 하기엔 지나치게 단단했다.
마치 폭풍이 오기 전, 스스로를 억누르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무진혁은 오랜 세월 전장을 누빈 자였다. 그런 그의 감각이 경고음을 울리고 있었다.
아들이 무언가에 억눌려 있다.
혹은, 무언가를 억누르고 있다.
아홉 살 아이의 얼굴에서 그런 표정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전장에서 살아남은 노병들의 얼굴에서나 보았던 그것을.
무진혁은 손을 놓지 않은 채 오래도록 아들의 얼굴을 살폈다. 늑대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식사가 끝나고 방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넘어갔다."
어깨에 짊어졌던 체감 몸무게 이십 킬로그램짜리 짐이 그제야 좀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복도 모퉁이에서 하윤이 기다리고 있었다.
"도련님."
"네, 네?"
심장이 다시 철렁했다. 이번엔 또 뭐야.
"당주님께서 내일부터 사범을 정식으로 붙이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그렇게 빨리요?"
"네. 그리고."
하윤이 잠시 말을 끌었다.
그 뜸 들이는 시간이 유독 길게 느껴졌다. 마치 배달앱에서 '조리 중'이라는 문구만 뜨고 오지도 않는 음식을 기다리는 것 같은 답답함이었다.
"당주님께서, 아무래도 뭔가 큰 결심을 하신 듯합니다."
큰 결심?
뭔가 불안한 예감이 등을 타고 올라왔다.
"무슨 결심이요?"
"저도 정확히는 모릅니다. 다만 서재에서 편지를 쓰시는 모습을 봤습니다."
"편지요? 누구한테요?"
하윤은 고개를 저었다.
"모릅니다. 다만 그 봉인, 가문의 문양이 아니라 왕실 인장이었습니다."
하윤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고 조심스러웠다. 마치 자신도 뭔가 큰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직감한 사람처럼.
왕실 인장이라니,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안 그래도 일주일 시한부인데 갑자기 왕실까지 엮이면 상황이 더 커지는 거 아닌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건 마치 동네 편의점 알바 자리 구하려다가 갑자기 대기업 본사 임원 면접장으로 끌려간 느낌이었다.
스케일이 안 맞아, 스케일이.
불안이 조용히 목덜미를 타고 올라왔다.
그날 밤, 나는 잠을 설쳤다.
천장을 바라보며 몇 번이나 뒤척였다.
왕실 인장이 붙은 편지에 대체 뭐라고 썼을지, 상상하려 해도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설마 벌써 그 늑대 사건을 예감하고 왕실에 도움을 청한 걸까.
아니면 전혀 다른 이야기일까.
어느 쪽이든, 앞으로 남은 닷새 안에 뭔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일이 굴러가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