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히든보스로 오해받는 7일

4화

[D-4] 사범이 왔다. 이름은 최도경, 무진 가문 소속 기사단 부관이라고 했다. 덩치가 대문짝만 한 사람이었다. 어깨는 거의 문틀에 닿을 듯했고, 목소리는 저 멀리 마당까지 쩌렁쩌렁 울렸다. 전생에 다니던 회사 부장님도 목소리 하나는 우렁찼는데, 이 사람은 그거랑 비교하면 확성기 대 스피커폰 수준이었다. "도련님, 오늘부터 제가 검술을 가르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서른두 살 정신머리로 아홉 살 몸에 존댓말을 얹으니 뭔가 미묘하게 웃겼지만, 그런 티는 안 냈다. 원래 몸의 주인은 원작에서 딱히 검술 훈련을 받는 캐릭터가 아니었다. 조연 중에서도 배경 취급, 그러니까 무진혁 옆에서 어색하게 서 있다가 몇 화 지나면 사라지는 그런 위치였다. 그런데 이렇게 정식으로 배울 기회가 생기니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게임 시스템으로 치면 튜토리얼도 안 하고 본편 들어갔다가 뒤늦게 스킬트리를 얻은 느낌. * 첫 수업은 기본자세 교정이었다. 최도경이 시범을 보이며 말했다. "이렇게 서시고, 검을 이렇게 쥐십시오." 나는 하윤한테 배운 자세를 그대로 따라 했다. 발을 어깨너비로 벌리고, 무게중심을 낮추고, 검을 쥔 손목의 각도까지. 최도경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도련님, 이 자세는 누구한테 배우셨습니까?" "하윤 님이 좀 봐주셨어요." "메이드 하윤이... 검술을 안다고요?" 최도경의 목소리에 의아함이 섞였다. 뭐지, 그 반응은. 하윤이 그렇게 대단한 실력자였나? 생각해보니 그때도 좀 이상했다. 메이드가 어떻게 그렇게 자연스럽게 검을 다루는 자세를 봐줄 수 있지? 그때는 그냥 '아, 이 세계 메이드들은 다재다능하구나' 하고 넘겼는데, 지금 최도경 얼굴을 보니 그게 아닌 것 같았다. 편의점 알바생이 알고 보니 국가대표 출신이었다는 느낌? 일단 넘어갔다. 지금 파고들 여력이 없었다. * 찌르기, 베기, 회피를 배웠다. 서른두 살 아저씨 정신머리로 배우니 이해는 빨랐다. 최도경이 동작을 설명하면 머릿속에서는 이미 각도와 타이밍, 무게중심 이동까지 그림이 그려졌다. 문제는 그걸 실제로 구현하는 몸이었다. 몇 번 시범을 보고 나면 대충 감을 잡았는데, 그걸 실제로 재현하려면 근력과 반응속도가 필요했다. 그게 부족했다. 머리는 헬스장 트레이너처럼 완벽한 자세를 그리는데, 몸은 헬스장 첫날 온 회원처럼 삐걱거렸다. 검을 휘두르려고 하면 팔이 먼저 떨렸고, 발을 내디디려고 하면 균형이 흐트러졌다. "도련님, 방금 그 동작." 최도경이 손을 들어 나를 멈췄다. "머릿속으로는 이해하고 있는데, 몸이 아직 못 따라오는 느낌이군요." 정확한 진단이었다. 소름 돋게 정확했다. 마치 내 뇌를 스캔한 것 같았다. "...네, 맞아요." "드문 경우입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몸으로 먼저 배우고 머리로 나중에 이해하는데, 도련님은 반대시군요." 최도경이 턱을 문지르며 말했다. 그 표정이 마치 오늘 처음 보는 신종 벌레를 관찰하는 곤충학자 같았다. 아, 이게 문제구나. 서른두 해 살아온 성인의 이해력과 아홉 살 몸의 물리적 한계 사이의 간극. 이론은 만렙인데 캐릭터 레벨은 1인 상태. 이걸 어떻게 채워야 할지 고민이었다. 그렇다고 최도경한테 "사실 저는 전생에 서른두 살이었습니다"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 그날 오후, 정원에서 혼자 복습을 하던 중이었다. 나무 그늘 아래서 배운 대로 자세를 잡아보고, 검 대신 나뭇가지를 휘둘러보고 있었다. 땀이 이마에 송글송글 맺혔다. 아홉 살 몸으로 이 정도 움직인 것도 대단하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하윤이 다가와 물을 건넸다. "목이 마르시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물을 마시며 잠시 쉬었다. 하윤의 얼굴을 슬쩍 살폈다. 평소와 다름없는 무표정. 이 사람이 정말 검술을 안다면, 그 실력은 어느 정도일까. 궁금했지만 지금은 물어볼 타이밍이 아니었다. 그때, 뒤뜰에서 하인 하나가 큰 상자를 옮기다가 발을 헛디뎠다. "어어어!" 상자가 기울며 그 안의 도자기 병이 튀어나와 내 쪽으로 날아왔다. 촤앙! 순간, 몸이 먼저 반응했다. 서른두 해를 살아온 몸의 반사신경, 정확히는 예전에 배웠던 배드민턴 동호회 시절의 감각이었을까. 아니면 퇴근길 만원 지하철에서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자리 맡던 그 순발력이었을까. 어쨋든 손이 자동으로 뻗어 나가 병을 낚아챘다. 탁! "..." 주변이 조용해졌다. 하인도, 하윤도, 마침 그 자리를 지나가던 최도경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시간이 잠깐 멈춘 것 같은 정적. "어, 이거..." 나는 손에 든 병을 어색하게 흔들며 웃었다. "운이 좋았나 봐요." 그런데 아무도 웃지 않았다. 최도경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도련님, 방금... 그 병이 날아오는 속도가 상당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냥 반사적으로요." "반사적으로 그 궤적을, 그 속도로 정확히 잡아냈다는 겁니까?" 아 이거 실수했다. 그냥 병 하나 잡은 걸로 왜 이렇게 소란인지. 편의점에서 떨어지는 컵라면 잡은 걸로 국가대표 스카우트라도 온 줄. 나는 대충 넘기려고 손을 저었다. "제가 어릴 때부터 손이 좀 빨랐어요." "..." 최도경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나를, 정확히는 내 손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슬쩍 병을 뒤로 숨겼다. * [관찰자 최도경] 방금 그 동작은 단순한 반사가 아니었다. 날아오는 물체의 회전과 속도, 궤적을 순간적으로 계산해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정확히 낚아채는, 그것은 수십 년 검을 쥔 기사들도 쉽게 해내지 못하는 동체시력과 예측력의 결과물이었다. 최도경은 지난 이십 년간 검을 쥐었다. 전장에서 화살이 날아오는 것을 본 적도 있고, 창끝이 코앞까지 다가오는 것을 피한 적도 있다. 그 모든 경험 위에 쌓인 감각으로도, 방금 도련님이 보인 움직임은 설명이 되지 않았다. 병의 각도, 회전, 낙하 속도까지 계산해 정확히 손안에 가두는 그 궤적은 마치 수년간 그것만 훈련한 사람의 동작과 같았다. 아홉 살 도련님이 우연으로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최도경은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가설들이 스쳐 지나갔다. 숨겨진 천재? 아니면 몸속에 다른 무언가가 있는 것인가? 그도 아니면 가문의 피에 흐르는 무언가가 갑작스레 발현된 것인가. 어느 쪽이든, 이것은 당주님께 반드시 보고해야 할 사안이었다. "...도련님, 오늘 수업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최도경이 갑자기 수업을 종료했다. "네? 아직 시간이 남았는데요." "제가... 당주님께 보고할 사항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또 보고? 아니 병 하나 잡은 걸로 왜 자꾸 보고를 하냐고. 이 정도면 회사에서 오타 하나 냈다고 팀장한테 보고서 올라가는 느낌인데. 나는 머리를 싸매쥐었다. 이러다가 진짜 무슨 일 생기는 거 아닌가. * 그날 밤, 방에서 혼자 곰곰이 생각했다. 이러다가 정체 들키는 거 아니야? 아니, 정체를 들킨다는 게 정확히는 '전생자'라는 사실을 들킨다는 게 아니라, 뭔가 이 사람들이 나를 이상한 방향으로 오해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마치 내가 뭔가 대단한 힘을 숨기고 있는 존재인 것처럼. 실상은 전혀 그런 게 아니었다. 그냥 서른두 살 먹은 아저씨 정신머리로 아홉 살 애 몸을 굴리려니 반사신경이 어른 감각으로 튀어나온 것뿐이었다. 딱히 초능력이나 각성 같은 게 아니었다. 그런데 이 사람들 반응을 보면 자꾸 뭔가 대단한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오늘 있었던 일들을 하나씩 되짚어봤다. 하윤이 알려준 그 자세. 최도경의 의아한 표정. 병을 낚아챈 순간의 정적. 전부 이상했다. 아니, 정확히는 나만 이상하게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세계에서는 이게 정상이 아니라는 뜻이다. 전생에서 하던 대로, 그냥 습관처럼 몸이 반응한 것뿐인데. 근데 여기 사람들 기준으로는 그게 특별한 재능처럼 보이는 모양이었다. 마치 내가 김치찌개 끓이는 걸 미슐랭 셰프한테 보여준 느낌? 아니 이 비유도 좀 이상한데. [D-4] 남은 시간을 다시 확인했다. 나흘. 이제 나흘 남았다. 하지만 나흘 뒤보다 먼저 걱정되는 게 있었다. 바로 지금, 이 오해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다는 것. 이대로 가다가는 뭔가 큰일이 벌어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 그냥 조용히 지내다가 나흘 뒤에 조용히 처리하고 싶었는데, 자꾸 주변에서 이상한 소음이 커지는 느낌이었다. * 그리고 그날 늦은 밤, 서재 문틈으로 불빛이 새어나오는 걸 봤다. 잠도 안 오고, 방에만 있기도 답답해서 슬쩍 나온 참이었다. 조용히 다가가 문틈으로 안을 살폈다. 무진혁이 책상 앞에 앉아 편지를 쓰고 있었다. 촛불 아래, 그의 표정은 여느 때보다 굳어 있었다. 펜을 쥔 손이 몇 번이나 멈추고, 다시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뭔가 신중하게, 아주 조심스럽게 문장을 고르는 것처럼. "백강호에게..."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백강호. 어디서 들어본 이름 같은데. 순간 원작 게임 기억이 스쳤다. 검성. 왕국에서 검의 극의를 가장 많이 본 인물, 그리고 무진혁의 오랜 벗. 게임 설정집에서 딱 한 줄로 언급됐던 이름. 그런데 그게 왜 지금 여기서 나오는 거지.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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