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아기 마법사의 두 번째 삶

2화

눈을 떴는데 아무것도 없었다. 하얗지도 검지도 않은 공간이었다. 회색도 아니고, 그냥 색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는 곳 같았다. 김도윤은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 몸이 없었다. 손도 없고 발도 없었다. 뭔가 붕 떠 있는 느낌만 있었다. 이상하게 무섭지가 않았다. 죽었나. 혼잣말이 목소리로 나오는지도 알 수 없었다. 입이 없는데 어떻게 말을 하나, 그런 생각을 할 틈도 없었다. 그런데 대답이 돌아왔다. 죽었지. 앞에 뭔가 나타났다. 형체가 뚜렷하지 않았다. 사람 같기도 하고 빛 같기도 했다. 자세히 보려고 하면 눈이 시큰거렸다. 목소리는 나이도 성별도 짐작이 안 됐다. 젊은 것 같기도 하고 늙은 것 같기도 했다. 누구세요. 신이라고 하면 믿겠어. 김도윤은 잠시 침묵했다. 죽은 사람 앞에 나타난 게 신이라니, 어이가 없었다. 장난치는 거죠. 진짜인데. 이래서 다들 안 믿더라. 그럼 증명해보세요. 뭘로. 벼락 한 방 내려줄까. 여기서요? 여기서. 그것의 태도는 지나치게 가벼웠다. 세계를 관장하는 존재라기엔 말투가 동네 편의점 알바생 같았다. 손님이 담배 이름 잘못 말했을 때 짓는 그런 뉘앙스였다. 됐어요. 믿을게요. 빠르네. 빨리 믿어야 뭐라도 진행되지 않겠습니까. 왜 저를 부른 겁니까. 부른 게 아니라 처리하는 거야. 너 교통사고로 죽은 거 알지. 알아요. 방금 죽었으니까. 기억이 흐릿하긴 한데 트럭이었나. 아니면 버스였나. 정확히는 기억이 안 났다. 그냥 눈앞이 하얘졌던 순간만 남아 있었다. 그게 지구 쪽 담당 구역에서 일어난 사소한 이변이거든. 나는 그런 거 처리하는 신이야. 격이 낮다고 무시하면 안 돼. 누가 무시한다고 했습니까. 표정으로 하고 있잖아. 표정이 없는데요, 저는. 그것의 형체가 잠깐 일그러졌다. 웃는 건지 짜증 내는 건지 구분이 안 됐다. 김도윤은 뭐라 답할 말이 없었다. 신이라는 존재가 자신을 두고 사소한 이변이라고 부르는 걸 듣고 있자니 헛웃음이 나왔다. 삼십 년을 살았는데 사소한 이변이라니. 그 삼십 년이 누구한테는 통계 한 줄이었다는 게 좀 서글펐다. 그래서 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선택지가 있어. 소멸하거나, 다시 태어나거나. 소멸하면요. 그냥 없어져. 기억도 없어지고, 존재도 없어지고. 편해. 다시 태어나면요. 그건 안 편해. 근데 있잖아, 없어지는 것보단 낫지 않아? 당연하죠. 그럼 골라. 다시 태어나면 어디로 갑니까. 다른 세계. 마법도 있고 정령도 있고, 뭐 그런 세계. 김도윤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라이트노벨 같은 데서나 보던 설정이었다. 대학 시절 자취방에서 밤새 웹소설 읽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그때는 그런 세계로 가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아, 나도 저러면 좋겠다 하고 흘려 넘겼는데. 치트 능력 같은 것도 주는 겁니까. 그것의 형체가 잠깐 흔들렸다. 웃는 것 같았다. 너 그런 거 읽어봤구나. 미안한데 그런 거 없어. 세계 밸런스 깨지면 나 위에서 혼나. 위에 누가 있습니까. 있어. 나도 눈치 봐야 하는 상사 같은 거. 신도 상사가 있어요? 있으니까 이러고 있지. 안 그러면 내가 이런 잡일을 왜 하고 있겠어. 그럼 뭘 주는 겁니까. 조금만의 재능. 그게 뭡니까. 말 그대로야. 남들보다 조금 더 잘하는 정도. 그 이상은 안 돼. 조금이라는 게 어느 정도입니까. 이를테면, 옆집 애가 백 미터를 십오 초에 뛰면 너는 십사 초에 뛰는 정도. 그게 뭔 재능입니까. 그냥 좀 빠른 거지. 그게 재능이야. 세상 사람 대부분은 그 일 초도 못 만들어. 김도윤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전생에서 후회했던 건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참고 버티기만 했던 삼십 년이었다. 남들 눈치 보고, 상사 눈치 보고, 부모님 눈치 보고.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눈앞이 하얘졌다. 그게 끝이었다. 능력 같은 거 별로 안 바랍니다. 오, 특이하네. 다들 최강 능력 달라고 조르는데. 그거 받아서 뭐합니까. 세계 정복이라도 해요? 의외로 그런 애들 많아. 저는 그냥, 가족들이랑 평범하게 살다가 편하게 죽고 싶어요. 말하면서도 스스로 좀 웃겼다. 죽어서 다시 태어나겠다는 판에 바라는 게 평범한 삶이라니. 근데 진심이었다. 화려한 거 필요 없었다. 그냥 아침에 눈 뜨면 옆에 가족이 있고, 저녁에 눈 감을 때 걱정거리가 없는 삶. 그게 다였다. 신의 형체가 다시 흔들렸다. 이번엔 진짜로 흥미로워하는 것 같았다. 그거 의외로 어려운 조건인데. 왜요. 평범하게 산다는 게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거야. 대부분 뭐 하나 특별해지려고 발버둥 치다가 평범도 놓치거든. 그런 거 압니다. 살아봐서요. 좋아, 마음에 들어. 그 정도 소박한 소망이면 특별히 신경 좀 써줄게. 어떻게요. 말했잖아. 조금만의 재능. 정령 감지랑 마력 다루는 쪽으로 살짝 얹어줄게. 그거면 평범하게 살기엔 충분할 거야. 정령 감지요? 그 세계엔 정령이 많이 돌아다녀. 못 보는 사람이 대부분이고. 너는 보일 거야. 그게 왜 도움이 됩니까. 가서 살다 보면 알아. 사소한 게 목숨 구해주는 세계니까. 김도윤은 그 말이 묘하게 마음에 걸렸지만 더 묻지 않았다. 어차피 물어봐도 시원하게 답해줄 것 같지 않은 말투였다. 감사합니다. 감사는 됐고. 눈 감아. 다음에 뜨면 딴 세상이야. 김도윤은 순순히 눈을 감았다. 몸이 없는데도 눈을 감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어둠이 밀려왔다. 밀려오는 어둠 속에서도 이상하게 마음이 편했다. 적어도 다시 눈치 볼 상사는 없을 테니까. 마지막으로 신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참, 이번엔 아기부터 시작이야. 각오해. 아기요? 잠깐, 그게 무슨 소립니까. 목이 아직 안 가눠질 텐데. 걷는 것도 몇 년 걸리고. 그런 걸 지금 말해주면 어떡합니까! 미안, 시간 다 됐어. 다음에 봐. 그 말의 의미를 되물을 틈도 없이, 의식이 완전히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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