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학원 입학 준비는 예상보다 정신없이 흘러갔다.
노시라 님이 왕도의 재봉사를 불러 예복을 맞춰주었다.
재봉사는 백작 저택의 응접실 한쪽에 천을 잔뜩 펼쳐놓고, 내 어깨와 허리, 팔 길이를 몇 번이나 다시 재었다.
"체형이 특이하시네요. 어깨가 넓은데 허리는 가늘고..."
재봉사가 중얼거리며 줄자를 다시 감았다.
나는 팔을 든 채 가만히 서 있었다.
그날 하루 종일 서 있었던 탓에 다리가 뻐근했다.
백작 저택에서는 매일같이 왕도의 예법과 학원 규칙에 대한 교육이 이어졌다.
식사 예법, 인사법, 귀족들 사이의 서열 관계까지.
알아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나는 며칠째 밤늦게까지 예법서를 붙잡고 있었다.
방 안에는 촛불 하나만 켜져 있었고, 그 불빛 아래 예법서의 글자들이 흐릿하게 어른거렸다.
"이 자세가 아니라, 등을 좀 더 세워야 합니다."
예법 교사의 지적에 나는 몸을 곧게 폈다.
피로가 어깨를 무겁게 눌렀다.
"자세가 무너지면, 왕도의 귀족들은 그 사람의 출신을 의심합니다. 특히 백작님의 후원을 받는 입장이시니, 더더욱 흠 잡힐 일이 없어야 합니다."
교사의 말투는 딱딱했지만, 그 안에는 나름의 배려가 섞여 있었다.
나는 알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수업이 끝나고 나면 다리에 힘이 풀려 의자에 주저앉기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라비가 조용히 말을 걸어왔다.
[주인님, 오늘도 늦게까지 하시는 겁니까.]
라비가 낮게 물었다.
"조금만 더 하고 잘게."
나는 눈을 비비며 대답했다.
창밖은 이미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저 멀리서 풀벌레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체력 소모가 누적되고 있습니다. 학원 입학 전까지 최소한의 휴식이 필요합니다.]
"알아, 알아. 이것만 외우고 잘 거야."
나는 예법서의 한 문단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다시 소리 내어 읽었다.
같은 문장을 몇 번이나 되풀이하다 보니, 어느 순간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고 그냥 지나쳐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며칠이 흐르는 사이, 어깨의 상처는 자연스럽게 아물었다.
처음엔 옷깃이 스칠 때마다 따끔거렸는데, 이제는 흉터만 옅게 남아 있었다.
마수림에서의 그 정체불명의 그림자도, 잠시 잊혀지는 듯했다.
가끔 밤에 잠들기 전 그 형체가 떠오르긴 했지만, 낮 동안의 바쁜 일정 속에서 금세 다른 생각들에 밀려났다.
(그냥 헛것을 본 거였을지도 몰라.)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하루하루를 넘겼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백작 저택의 응접실로 불려갔다.
집사가 직접 내 방문을 두드리며 말을 전했을 때, 나는 순간적으로 무언가 잘못되었나 싶어 가슴이 뛰었다.
집사의 표정에서는 별다른 기색을 읽을 수 없었다.
응접실 문을 열자, 백작은 창가에 서서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이 평소보다 굳어 있었다.
늘 여유롭던 눈매가 오늘은 조금 날카롭게 보였다.
탁자 위에는 두꺼운 서류 뭉치가 놓여 있었는데, 몇 장은 이미 펼쳐져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그가 천천히 돌아섰다.
창밖에서 들어온 오후 햇살이 그의 등 뒤로 길게 그림자를 만들었다.
"왕도 인근에서 보고가 하나 올라왔다."
나는 긴장하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손끝이 저절로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정체불명의 마물, 혹은 그와 유사한 존재가 목격되었다는 보고다. 정확히는... 네가 마수림에서 봤던 것과 흡사한 형체라고 한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게 어떻게 왕도까지..."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떨렸다.
"확실하지 않다. 다만 학원 인근 숲에서 두 차례 발견되었다는 보고가 있다."
백작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안에 담긴 경계심은 뚜렷했다.
그는 서류 하나를 집어 들어 내게 건넸다.
목격자의 진술이 짧게 적혀 있었다.
'검붉은 형체, 사람보다 크고, 소리 없이 움직였다.'
글자를 읽는 동안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걸 보고한 자는, 지금 어떻게 됐습니까."
"다행히 크게 다치진 않았다. 놀라서 정신을 잃었을 뿐."
백작이 서류를 다시 받아들며 말했다.
"당분간 조심해라. 학원에 입학한 이후에도, 홀로 숲 근처에는 가지 않도록."
"...예."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속에서는 이미 다른 생각이 자라나고 있었다.
(같은 존재라면... 확인해봐야 해.)
백작은 내 표정을 잠시 살피더니,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저 창밖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을 뿐이었다.
그 뒷모습이 오늘따라 유독 무겁게 느껴졌다.
응접실을 나서면서도, 그 짧은 문장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검붉은 형체.
그날 마수림에서 본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날 저녁, 방으로 돌아온 나는 창밖의 어두운 하늘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별빛도 없이 그저 짙은 어둠만 깔려 있었다.
[주인님, 표정이 좋지 않으십니다.]
"그때 그 그림자, 왕도까지 갔다는 게 마음에 걸려서."
[제 기록에도 해당 존재의 특징이 저장되어 있습니다. 필요하시면 언제든 대조 가능합니다.]
"고마워."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잠시 눈을 감았다.
피로가 온몸을 짓눌렀지만, 머릿속은 오히려 또렷해졌다.
[휴식을 취하시는 것을 권장합니다. 내일 예법 수업이 이른 시간에 예정되어 있습니다.]
"알아... 근데 자꾸 그 생각이 나서."
[불안정한 감정 상태가 감지됩니다. 심호흡을 권장합니다.]
라비의 담백한 조언에, 나는 피식 웃음이 났다.
그 웃음이 조금이나마 긴장을 풀어주었다.
나는 눈을 뜨고 창밖을 다시 바라보았다.
정원의 나무들이 바람에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풍경이었지만, 어딘가 낯선 파문이 스며 있는 것 같았다.
그때, 창밖에서 낮은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나는 눈을 떴다.
소리는 문이 아니라 창문 쪽에서 났다.
(이 시간에?)
심장이 순간적으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백작 저택은 밤에 외부인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는 곳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창가로 다가가 밖을 살폈다.
어둠 속, 정원 한쪽에 낯선 인영이 서 있었다.
숨을 죽이고 자세히 살폈다.
여성이었다.
화려한 로브를 걸치고 있었고,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로브의 옷깃에는 은실로 학원의 문양이 새겨져 있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다.
[주인님, 저택 경비 마법에 걸리지 않은 침입입니다. 대상의 신원 미확인.]
라비의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
(경비 마법을 뚫었다고? 이 저택의 경계를?)
등줄기에 서늘한 감각이 스쳤다.
백작 저택의 경비는 결코 허술하지 않았다.
그런 곳을 아무 소리 없이 통과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 여성의 실력을 짐작하게 했다.
나는 창문을 살짝 열었다.
서늘한 밤공기가 방 안으로 흘러들었다.
"누구세요."
내 물음에, 그 여성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달빛 아래 드러난 얼굴에는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우아함이 있었다.
눈매는 부드러웠지만, 그 속에 담긴 눈빛만큼은 결코 온화하지 않았다.
마치 오랜 시간 무언가를 관찰해온 사람의 눈빛 같았다.
"왕립 귀족학원 부학원장, 조미현이라고 해요."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 아래 뭔가 계산된 것이 깔려 있는 듯했다.
"이런 시간에 이런 방식으로 찾아온 걸, 이해해주세요."
그녀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 동작조차 지나치게 정제되어 있어서, 오히려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나는 그녀를 경계하며 창틀에서 조금 물러섰다.
"백작님을 통하지 않고 저를 직접 찾아오신 이유가..."
"당신에게 개인적으로 드릴 이야기가 있어서요."
그녀가 한 걸음 다가섰다.
달빛이 그녀의 얼굴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정원의 나무 그림자가 그녀의 발밑에서 미묘하게 흔들리는 것도 보였다.
바람이 부는 것도 아닌데, 그 흔들림이 어딘가 삐걱거리는 듯한 인상을 남겼다.
"당신의 입학과 관련해서, 흥미로운 제안을 하나 드리고 싶어요."
그녀의 미소가 조금 더 깊어졌다.
심장이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이 사람, 뭔가 다른 목적이 있어.)
라비의 낮은 경고음이, 방 안에 조용히 울리고 있었다.
나는 창틀을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동안, 방 안의 공기마저 무겁게 가라앉는 것 같았다.
"제안이라니... 어떤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내 목소리가 낮게 흘러나왔다.
그녀는 대답 대신, 그저 미소만 지어 보였다.
그 미소 속에서, 나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점점 커지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