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회의라는 말을 들은 지 사흘 뒤, 나는 낙안 백작가의 대회의실로 불려 갔다. 시종 하나가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내가 다가오자 허리를 깊이 숙이며 문을 열어주었는데, 그 순간 훅 끼쳐오는 향냄새와 서늘한 공기에 나는 잠시 숨을 멈췄다. 대리석 바닥에 붉은 융단이 길게 깔려 있었고, 벽면에는 가문의 문장인 은빛 매가 새겨진 태피스트리가 걸려 있었는데, 그 규모가 어찌나 압도적이던지 여섯 살짜리 몸으로 걸어 들어가는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느려질 정도였다. 발바닥에 닿는 융단의 감촉이 푹신하다 못해 발목이 푹푹 빠지는 느낌이라, 나는 걸음마다 균형을 잃지 않으려고 은근히 애를 써야 했다. '이거 무슨 재벌가 이사회도 아니고.' 나는 속으로 그렇게 실없이 중얼거리면서도, 겉으로는 최대한 얌전한 표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이런 자리에서 여섯 살짜리가 두 눈을 반짝이며 사방을 두리번거리면 좋은 인상을 줄 리가 없다는 건, 마흔셋 인생 짬바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상석에 앉은 붉은 머리의 남자가 바로 내 아버지, 낙안 백작 이경헌이었는데, 그의 나이가 겨우 스물넷이라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고 나는 속으로 몇 번이나 되물었다. '스물넷에 백작이고, 애가 여섯이라니, 이 세계 조혼 풍습은 진짜 살벌하구나.' 얼굴만 보면 대학교 새내기 같은데 앉은 자세와 눈빛만은 회사 임원 회의에서 봤던 그 어떤 부장보다도 무겁고 단단했다. 그의 좌우로 자리한 여인 둘이 있었는데, 한쪽은 붉은 눈매가 도발적인 홍라연이었고 다른 한쪽은 차분한 인상의 서마리였다. 홍라연은 붉은 눈동자를 가늘게 뜬 채 나를 훑어보는 시선이 마치 값을 매기는 감정사 같았고, 서마리는 그와 반대로 시선을 거의 아래로 내린 채 손끝만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아버지의 측실이라는 것을, 어머니 강윤희의 짤막한 설명으로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속으로 헛웃음이 나왔다. '일가다처제라니, 이건 사극 촬영장에 잘못 들어온 기분인데.' 전생에서는 결혼 한 번 못 해보고 죽었는데, 이번 생은 아버지가 벌써 셋을 거느리고 있다니,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싶었다.
회의실 아래쪽 자리에는 아이들이 나란히 앉아 있었는데, 내 옆에는 나보다 한 살 어린 남동생 이겨울이 초조한 얼굴로 다리를 흔들고 있었고, 조금 떨어진 자리에는 이강, 이루리, 이파랑, 이태린, 이리에라는 이름의 배다른 형제자매들이 각자 다른 표정으로 나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이루리는 손톱을 물어뜯다가 내 시선을 느끼자마자 재빨리 손을 무릎 위로 내렸고, 이파랑은 아예 대놓고 팔짱을 낀 채 천장만 쳐다보고 있었다. '가족 모임인데 다들 눈빛이 무슨 오디션 심사장 같군.'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애써 태연한 얼굴을 유지했는데, 그 순간 아버지가 손을 들어 좌중을 조용히 시켰다. 손을 드는 동작 하나에 방 안의 웅성거림이 순식간에 잦아드는 걸 보면서, 나는 이 남자가 가진 위압감이 나이와는 별개로 얼마나 절대적인지를 새삼 느꼈다.
"오늘 이 자리를 연 것은 가문의 후계 문제를 정리하기 위함이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지만, 그 안에 실린 무게만큼은 방 안의 온도를 몇 도 떨어뜨리는 듯했다. 나는 저절로 등이 곧게 펴지는 걸 느끼며 침을 삼켰다. "한별이 지난 열병에서 회복한 것을 계기로, 나는 이 아이를 정식 후계자 후보로 공표하겠다."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회의실 안의 공기가 순간적으로 팽팽하게 당겨지는 걸 느꼈는데, 누군가의 숨소리마저 멈춘 것처럼 조용해졌다.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이봐요, 나 아직 이 세계 지리도 모르는데 후계자 후보라니.' 지도 한 장 못 본 신입한테 대뜬 지사장 자리를 던져주는 격이 아닌가.
홍라연의 눈매가 살짝 가늘어지는 걸 보았고, 그 붉은 눈동자 안에서 뭔가 계산이 빠르게 돌아가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서마리는 표정을 거의 바꾸지 않았지만 손끝으로 찻잔을 살짝 매만지는 게 보였는데, 그 손끝의 미세한 떨림이 오히려 그녀의 속내를 더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 같았다. 이강이라는 이름의 소년 — 아마 열 살쯤 되어 보이는 — 이 나를 향해 노골적으로 불쾌한 시선을 던졌는데, 그 눈빛에는 단순한 불만을 넘어선 적의 같은 것이 섞여 있었다. 나는 그 시선을 마주 받으면서도 애써 무해한 표정을 유지했다. '얘야, 나도 이 상황이 억울하단다.' 어차피 내가 원해서 얻은 자리도 아닌데, 그렇게 눈에 불을 켜고 봐도 나로선 딱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회의가 끝난 뒤,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 흩어지는 와중에도 이강의 시선은 방문을 나설 때까지 내 뒤통수에 꽂혀 있는 것 같았다. 어머니 강윤희가 내 손을 잡고 방으로 데려가면서 낮게 속삭였다. "놀라지 마라, 한별아. 후계자 후보로 공표되었다는 건 아직 결정된 게 아니야. 다만 가문의 관심이 네게로 향했다는 뜻이지." 그녀의 목소리에는 걱정과 자부심이 뒤섞여 있었는데, 걸음을 옮기는 내내 손을 놓지 않는 그 손끝의 힘에서 나는 그녀가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그 감정의 결을 읽으면서 이 여인이 나를 얼마나 아끼는지 새삼 느꼈다. '적자로서 첫째라는 게 이렇게 부담스러운 자리였구나.' 전생에서는 장남이라는 것도 그냥 호적상의 위치였을 뿐인데, 여기서는 그 한 글자가 목에 칼을 대고 있는 것 같은 무게로 느껴졌다.
방으로 돌아온 뒤, 나는 창가에 앉아 정원을 내려다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정원에는 붉은 장미 덩굴이 담벼락을 타고 올라가 있었고, 그 아래로 시종 두엇이 가위를 들고 오가는 모습이 보였다. 평화로운 풍경이었지만, 그 평화로움과는 별개로 내 머릿속은 태풍이 지나간 것처럼 어수선했다. 전생의 마흔셋 회사원이 하루아침에 대귀족가의 후계자 후보가 된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솔직히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이건 뭐, 인턴으로 입사했는데 갑자기 임원 후보라고 통보받은 격이군.' 그것도 사내 정치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사장님 아들딸들이 죄다 나를 견제하는 판에 던져진 셈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픽 웃음을 흘리는데, 문밖에서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들렸다.
"도련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낮고 정중한 목소리였다. 나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들어오게."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백발에 회색 수염을 기른 노년의 남자였는데, 그의 눈빛이 어찌나 날카롭던지 나는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시종 특유의 굽은 걸음이 아니라, 등을 곧게 세운 채 절도 있게 걸어오는 그 모습이 하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은퇴한 무관 같은 인상을 주었다. "저는 이 가문의 집사, 김덕수라고 합니다. 앞으로 도련님을 보필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허리를 숙이며 소개했을 때, 나는 이 노인이 단순한 하인이 아니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는데, 그 직감이 옳았다는 걸 알게 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보필이라, 좋은 말이군. 그런데 자네, 원래 하던 일이 뭐였나?" 나는 최대한 능글맞은 투로 물었다. 이런 노인이 그냥 집사로만 있었을 리 없다는 확신이 들어서였다. 김덕수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대답했다. "지난 십 년간 가문의 경비대를 총괄했습니다. 그전에는 백작님의 검술 사범이었습니다." 그 대답에 나는 속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검술 사범 출신 경비대장이 이제 와서 내 시중을 든다니, 이게 단순한 인사 배치일 리가 없었다. "그런 사람이 왜 갑자기 여섯 살배기 애 옆에 붙게 됐는지, 그 이유가 궁금한데." 내가 슬쩍 캐묻자, 김덕수는 잠시 말을 멈추고 나를 응시했다. 그 눈빛 안에 담긴 것이 단순한 충성심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인지 나는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다.
"백작님의 명입니다. 그 이상은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그의 대답은 짧고 건조했지만, 그 짧음 안에 뭔가 더 깊은 사정이 숨어 있다는 게 느껴졌다. 나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다시 픽 웃음을 흘렸다. '이거 그냥 시중드는 집사가 아니라, 감시자거나 아니면 방패거나겠군.' 어느 쪽이든 유쾌한 상상은 아니었다. 김덕수가 조용히 다시 허리를 숙이며 방을 나서려는 순간, 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문득 이상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가 문을 열기 직전, 아주 잠깐 멈춰 서서 낮게 중얼거린 말이 있었는데, 그 말이 내 심장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도련님, 앞으로는 홍 부인의 처소 쪽으로 걸음을 옮기실 일이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그 한마디를 남기고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방을 나갔고,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앉아 그 말의 의미를 곱씹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