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어둠 속에서 나는 익숙한 지하철 승강장에 서 있었다. 노란 안전선, 형광등의 깜빡임, 그리고 저 멀리서 다가오는 열차의 불빛까지 — 이건 분명 내가 죽던 그 순간의 재현이었다. 콧속으로 훅 끼쳐오는 쇠 냄새와 오래된 시멘트의 습기,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지지직거리는 안내 방송까지, 어느 것 하나 흐릿하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그날의 데이터를 통째로 복원해놓은 것처럼, 지나치게 선명했다. '아, 또 여긴가.'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면서도 이상하게 두렵지 않았는데, 이미 한 번 죽어본 사람에게 두 번째 죽음의 장면은 어쩐지 익숙한 재방송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이 장면의 다음 컷이 뭔지도 알고 있으니, 이건 공포 영화라기보다는 몇 번이나 돌려본 드라마의 재방송에 더 가까웠다.
저 앞에서 서아가 넘어지는 모습이 슬로우 모션처럼 펼쳐졌고, 나는 그 장면을 향해 걸어가면서도 발걸음이 무겁지 않았다. 그녀의 가방에서 쏟아진 책들이 승강장 바닥에 흩어지는 소리, 그 소리마저도 한 프레임씩 늘어져서 들려왔다. '그래, 이번에도 손을 뻗어야겠지.' 몇 번을 다시 봐도 결말은 똑같을 텐데, 왜 이 장면은 매번 이렇게 정성스럽게 재생되는 걸까 하는 실없는 생각까지 스쳤다. 그런데 이번에는 손을 뻗는 순간, 시야 전체가 새하얗게 밝아지며 승강장의 풍경이 마치 유리처럼 쪼개져 흩어졌다. 열차의 불빛도, 노란 선도, 서아의 뒷모습도 유리 파편처럼 사방으로 튕겨나갔다.
조각난 풍경 사이로 나는 낯선 문자들이 허공에 떠오르는 걸 보았는데, 그것은 한글도 아니고 이 세계의 문자도 아닌, 마치 두 세계의 언어가 뒤섞인 듯한 기이한 상징들이었다. 획은 한자처럼 복잡했지만 그 안에 알파벳의 곡선이 섞여 있었고, 어떤 것은 숫자처럼 규칙적으로 반복되며 빛을 냈다. '이건 또 뭔가.' 나는 그 상징들을 향해 손을 뻗었는데, 손끝이 닿는 순간 머릿속으로 방대한 정보가 쏟아져 들어오는 감각을 느꼈다. 마치 압축된 파일이 한꺼번에 풀리는 것처럼, 논리와 계산, 그리고 이 세계의 마법 구조에 대한 어렴풋한 이해가 뒤섞여 밀려들었는데, 그 감각이 너무 압도적이어서 나는 정신을 잃을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혔다. 관자놀이 안쪽에서 뭔가가 팽창하는 듯한 통증이 지나갔고, 나는 이가 갈릴 정도로 턱에 힘을 주면서 그 정보의 홍수를 버텨냈다. '이게 그 흔한 각성이라는 건가.' 나는 속으로 실없이 중얼거리면서도, 이 정보들이 훗날 내게 어떤 무기가 될지 어렴풋이 예감했다. 정보의 파편들 사이로 마력의 흐름, 원소의 배열, 그리고 뭔가 체계적인 계산식 같은 것들이 스쳐 지나갔는데, 지금 당장 그걸 이해하려 드는 건 무리였다. 나중에 천천히 뜯어보면 될 일이었다.
그 순간 서아의 얼굴이 눈앞에 클로즈업되었는데, 그녀가 나를 향해 입을 벙긋거렸지만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 입술의 움직임을 읽으려 애썼는데, 아무리 봐도 '고마워요'라는 말처럼 보였다. 그녀의 눈가가 젖어 있었고,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것까지 보였다. '고마워할 상황이 아닌데, 나 죽었잖아.' 나는 그렇게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이상하게 가슴 한쪽이 저릿해지는 걸 느꼈다. 죽은 사람한테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지만, 동시에 그 인사를 들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으니, 나도 참 모순덩어리였다. 그 감정을 곱씹을 새도 없이, 풍경은 다시 한번 크게 흔들렸고, 이번엔 낙안 백작가의 마구간과 오솔길, 그리고 폭주하던 보리의 모습이 겹쳐지며 떠올랐다. 말발굽이 흙을 파헤치는 소리,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 그리고 시야 한쪽을 스쳐 지나가던 검은 짐승의 형체까지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아, 맞다. 나 지금 또 죽을 뻔한 상황이었지.' 나는 그 사실을 새삼 깨달으며, 이 기이한 정신적 공간이 두 개의 삶 — 박정훈으로서의 죽음과 이한별로서의 위기 — 을 동시에 비추고 있다는 걸 이해했다. 마치 뇌 속에 두 개의 서버가 동시에 돌아가면서 지난 로그를 몰아서 재생해주는 느낌이었다.
의식이 서서히 떠오르는 감각과 함께, 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익숙한 백색 석고 천장이 눈에 들어왔고, 천장에 새겨진 낙안 백작가 특유의 문양 — 넝쿨처럼 이어진 푸른빛 무늬가 어렴풋하게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어머니 강윤희의 얼굴이 코앞에서 눈물범벅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별아! 한별아, 정신이 드니?" 그녀의 목소리가 갈라졌는데, 며칠을 제대로 자지 못한 듯 눈 밑이 퀭하게 그늘져 있었다. 나는 그 절박함에 응답하려 입을 열었지만 목이 바짝 말라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마른 침을 억지로 삼키자 목구멍 안쪽이 갈라지는 듯한 통증이 스쳤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시야의 왼쪽 절반이 완전히 어둠에 잠겨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그렇지. 그 일이 진짜였구나.' 손을 뻗어 왼쪽 얼굴을 만져보려 했지만, 붕대가 두껍게 감겨 있어서 그 아래의 상처를 확인할 수조차 없었다. 손끝에 닿는 거친 붕대의 질감이, 이 모든 게 꿈이 아니라는 걸 확인시켜주는 유일한 증거였다.
침대 곁에 서 있던 김덕수가 담담한 목소리로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의 표정은 평소와 다름없이 절제되어 있었지만, 두 손을 앞으로 모아 쥔 자세만큼은 평소보다 뻣뻣했다. "도련님께서는 나흘간 의식을 잃으셨습니다. 마물의 습격으로 놀란 말에서 낙마하시며 왼쪽 눈을 크게 상하셨고, 치료 마법사들이 최선을 다했으나 시력을 되살리지는 못했습니다."
나흘이라니. 지하철에서 죽고, 마차에서 떨어지고, 그러고도 나흘이나 누워 있었다는 건가. 이쯤이면 인생 통틀어 가장 다이내믹한 한 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이상하게도 절망보다 먼저 냉정한 계산이 머릿속을 스치는 걸 느꼈다. '한쪽 눈을 잃었다는 건 원근감이 완전히 망가진다는 뜻인데, 이 세계에 시력을 회복시키는 마법이나 기술이 있을까.' 검을 쥐어야 할 일이 생긴다면 거리 감각부터 다시 익혀야 할 판이었다. 그런 실용적인 생각을 하면서도, 여섯 살짜리 몸이 감당해야 할 상실감이 뒤늦게 밀려와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걸 참아야 했다. 이 몸은 아직 여섯 살이었고, 여섯 살짜리의 신경계는 어른의 이성으로 다 덮어버리기엔 너무 예민했다.
어머니가 내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 그 손은 차가웠고, 떨림이 완전히 가라앉지 않은 상태였다. "의원들이 그러더구나. 서쪽 끝, 빛의 성국에는 신성한 힘으로 잃어버린 것을 되돌리는 성녀가 있다고. 하지만 그곳은 여기서 너무나도 멀단다."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속으로 조용히 되뇌었다. '성녀라니, 이건 또 완전히 새로운 퀘스트로군.' 게임이었다면 지도 한쪽 구석에 반짝이는 마크라도 떴을 텐데, 현실은 그냥 어머니의 젖은 눈동자와 멀다는 한마디뿐이었다. 그 거리감이 주는 무게가, 방금 겪은 어떤 위기보다도 더 아득하게 느껴졌다.
그 순간 방문 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고, 낯선 기사 하나가 김덕수에게 무언가를 급히 보고하는 목소리가 새어 들어왔다. 발소리는 다급했지만 문 앞에서 멈춰 서는 타이밍만큼은 정확했다. 예의를 갖추려는 최소한의 노력과, 그럴 여유조차 없다는 다급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걸음걸이였다. "백작님께 급히 알려야 합니다. 습격에 사용된 마물의 흔적이, 단순한 야생종이 아니라는 게 밝혀졌습니다."
그 말에 김덕수의 표정이 처음으로 미세하게 굳는 걸 보면서, 나는 이 사고가 결코 우연한 재난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예감에 휩싸였다. 평소라면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을 사람의 얼굴에 그런 균열이 생겼다는 것 자체가, 이미 충분한 대답이었다. 나는 붕대로 가려진 왼쪽 시야의 어둠 속에서, 그보다 더 짙은 어둠이 이 저택 어딘가에 도사리고 있다는 걸 직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