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정해진 패배를 베다

1화

검이 허공을 갈랐다. 부웅— 목검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였다. 한 번, 두 번, 세 번. 내려치고 올리고 다시 내려치고.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귀족 도련님 몸인데 왜 이렇게 힘든 거야.' 전생에 헬스장 3개월 등록하고 한 번도 안 간 몸뚱이였다면 이해가 가는데, 지금 이 몸은 근육 하나하나가 예술품처럼 붙어 있는 몸이었다. 그런데도 목검을 제대로 못 다루고 있으니 문제였다. "도련님, 자세가 흐트러졌습니다." 박도윤이 낮게 말했다. '알아, 나도 알아.'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다시 자세를 잡았다. 이가(李家) 후작가의 첫째 도련님, 이하준. 그게 지금 내 이름이었다. 금발에 금안, 웬만한 초상화 속 왕자보다 낫다는 소리를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들었다. 열다섯 살, 몸은 근사했고 재능도 넘쳤다. 그런데 왜 목검 하나 제대로 못 휘두르냐고? 그건 내가 아직, 이 몸의 재능을 제대로 써먹을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이 몸에 들어온 지 아직 채 반년도 되지 않은 애송이라서 그랬다. 몸은 이하준이었지만, 안에 든 정신은 서울 어느 반지하 원룸에서 편의점 알바를 뛰던 인간이었으니까. 가끔 몸이 알아서 반응할 때가 있었다. 자세를 딱 잡거나, 검을 쥐는 손목의 각도가 저절로 맞춰지거나. 그럴 때마다 나는 신기해서 속으로 오호, 하고 감탄했다. 그런데 오늘은 그게 안 됐다. 머리가 복잡하니까 몸도 따라 삐걱대는 모양이었다. "오늘은 이만하지요." 박도윤이 목검을 거두며 말했다. "흥, 그럴까."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오만하게. 늘 오만하게. 그게 이 몸의 기본값이었다. 왜 그런지는 몰랐다. 그냥 그렇게 태어났고, 그렇게 자랐으니까. 박도윤은 아무 말 없이 검을 걸이에 걸었다. 이가의 집사이자, 이 저택에서 유일하게 나한테 존댓말 뒤로 숨지 않는 인간이었다. "도련님." 그가 다시 나를 불렀다. "뭐." "오늘따라 검이 무거워 보이십니다." '그거 네가 알아채면 안 되는데.' 나는 속으로 뜨끔했지만 겉으로는 태연하게 손을 저었다. "기분 탓이야." 그렇게 얼버무리고 훈련장을 나섰다. * 서재는 늘 조용했다. 이가 저택 3층, 아버지도 잘 오지 않는 낡은 책장들의 숲. 나는 딱히 책을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었는데, 그날은 왠지 발이 그쪽으로 향했다. 먼지 냄새가 훅 끼쳤다. 오래된 종이 냄새. 전생이었으면 알레르기 걸려서 콜록댔을 텐데, 이 몸은 그런 것도 없었다. '몸 좋은 건 인정한다.' 책장을 하나씩 훑었다. 역사서, 검술서, 지도책. 다 재미없어 보였다. 그런데 책장 맨 위, 먼지 쌓인 자리에 낯선 책 한 권이 꽂혀 있었다. 다른 책들과 좀 달랐다. 표지가 낡았고, 손을 많이 탄 흔적이 있었다. 누가 몰래 숨겨둔 것처럼 안쪽 구석에 삐뚜름하게 꽂혀 있었다. '뭐야, 이거 왜 여기 있어.' 궁금해서 손을 뻗었다. 표지에 적힌 제목을 본 순간, 나는 숨이 턱 막혔다. [무진의 검은 태양]. '이거... 내가 아는 제목인데?' 손이 먼저 움직였다. 책을 펼치는 순간, 머리가 쪼개지는 듯한 통증이 찾아왔다. 찌잉―! 눈앞이 하얘졌다. 다리가 풀려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홍수처럼 밀려드는 기억. 대한민국, 반지하 원룸, 편의점 알바, 그리고 밤마다 침대에 누워 태블릿으로 읽던 라노벨. 새벽 세 시까지 스크롤을 넘기다가 다음 날 지각했던 기억. 작가가 연중 예고 뜰까 봐 후원까지 결제했던 기억. 그 라노벨의 제목이 바로 [무진의 검은 태양]이었다. 주인공은 강태오. 검은 머리, 빨간 눈, 곱슬머리의 소년. 부드러운 얼굴 뒤에 광기 어린 각오를 숨긴, 전형적인 '고생하는 진짜 주인공'. 빈민가에서 태어나 온갖 시련을 겪고, 결국 왕국 최강의 검사가 되는 클리셰의 정석. 그리고 그 강태오를 끝없이 괴롭히는 오만한 라이벌 귀족의 이름이... '이하준.' 그게 나였다. 허...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올 뻔했다. 나는 전생에 이 소설을 세 번이나 정독한 골수 애독자였다. 작가가 결말 스포일러를 던지는 순간까지 실시간으로 댓글을 달던 인간이었다. "작가님 제발 이하준 죽이지 마세요" 같은 댓글도 남겼던 기억이 났다. 그런데 그 소설 속 조연도 아니고, 무려 '패배가 확정된 최종 악역'으로 환생했다니. '이건 뭐, 시험 성적표에 0점 받고도 웃어야 하는 상황이잖아.' 아니, 그것보다 더 나빴다. 시험은 재시험이 있잖아. 이건 재시험도 없이 바로 낙제 확정에, 낙제하면 목이 날아가는 시스템이었다. 원작에서 이하준은 강태오와 대립하며 승승장구하다가, 결국 15년 뒤 왕성 앞 광장에서 강태오에게 완전히 패배하고 모든 걸 잃는다. 영지도, 가문도, 목숨도. 책 속 문장이 머릿속에서 그대로 재생됐다. 전투 장면, 이하준이 마지막까지 자존심을 부리다가 패배하는 장면, 그리고 처형대. 처형대 위에서 마지막으로 남기는 대사까지 나는 기억하고 있었다. "이럴 리가 없다..." 그게 원작 이하준의 유언이었다. '참 없어 보이는 유언이네.' 죽는 순간까지 현실 부정이라니, 명대사 랭킹에도 못 들어갈 수준이었다. 나는 책을 덮으며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이건 게임 오버 확정 시나리오였다. 15년의 카운트다운이 이미 시작된 거고, 나는 그 시계를 못 보고 살고 있었던 거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무섭다는 감정보다 먼저 든 생각은 이거였다. '그럼 안 되지.' 나는 전생에 야근하다 과로로 죽은 인간이었다. 퇴근하고 집 가는 길에 갑자기 심장이 이상하다 싶더니, 그대로 쓰러져서 눈을 뜬 곳이 여기였다. 억울했다. 진짜 억울했다. 야근 수당도 제대로 못 받고 죽었는데, 그 억울한 죽음 뒤에 겨우 얻은 두 번째 인생인데, 그걸 소설 속 악역으로 끝내라고? 말이 되나.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그게 다였다. 거창한 목표 같은 거 없었다. 그냥 밥 잘 먹고, 잠 잘 자고, 목 안 잘리고 오래 살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이었다. 소설이 뭐라고 정해놨든, 나는 내 인생을 살기로 했다. '강태오든 뭐든, 내가 알아서 피해 다니면 될 거 아냐.' 그렇게 결심을 하고 서재를 나서는 길, 마침 박도윤과 마주쳤다. 그가 서재 앞에 서 있던 걸 보니 나를 찾으러 온 모양이었다. "도련님, 안색이 좋지 않으신데요." 그가 걱정스레 물었다. 오늘 처음 검술을 봐준 것도 그였고, 힘든 걸 알아준 것도 그였다. 이 저택에서 유일하게 나를 사람 대하듯 보는 사람. 원작에는 이름조차 안 나왔던 인물이었다. '그러고 보니 원작에 박도윤 얘기가 없었던 것 같은데.' 이하준의 몰락 서사를 그리는 데 조연들 사정까지 자세히 나올 필요는 없었을 테니까. 나는 무심코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신경 써줘서." 평소의 나답지 않은 말이었다. 오만하게 살아야 하는 몸인데, 방금 그건 그냥 순수한 감사였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온몸이 얼어붙었다. 찌이이잉―! 뇌를 관통하는 듣도 보도 못한 통증이었다. 서재에서 책을 펼쳤을 때보다 몇 배는 더 아팠다. 무릎이 저절로 꺾였다. 시야 한켠에 낯선 문자가 떠올랐다. [경고: ...] 그리고 거기서, 세상이 뒤틀리듯 흔들렸다. '뭐, 뭐야 이거.' 박도윤의 목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도련님?! 도련님!" 대답할 수가 없었다. 세상이 진짜로, 통째로 흔들리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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