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사교계는 소문에 굶주린 짐승 같은 곳이었다.
귀족 부인들의 다과회에서, 한 문장짜리 소문은 하루도 안 되어 열 문장으로 늘어난다.
"이가의 첫째 도련님이 전직 부단장을 맨손으로 이겼다더군요." 한 부인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것도 검을 배운 지 겨우 몇 주 만에요." 다른 부인이 부채로 입을 가리며 맞장구쳤다.
"게다가 그 잘생긴 얼굴로요. 어쩜, 후작가는 뭐든 다 가졌다니까요."
"들어보니 마법도 쓴다더군요. 검술에 마법까지, 그게 사람이 맞나요?"
이런 대화가 무진왕국 전역의 응접실에서 동시에 벌어지고 있었다.
찻잔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내 이름이, 정확히는 '이하준'이라는 세 글자가 왕국 곳곳을 여행하고 있었다.
나는 이런 사정을 전혀 모른 채, 그저 방에서 노력치 숫자만 노려보고 있었다.
[노력치 9/???]
'이거 언제까지 올라가는 거야.'
숫자 옆에 붙은 물음표 세 개가 마치 나를 놀리는 것 같았다.
'999까지 가야 되나? 아니면 9999?'
기준치를 모르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시스템한테 "야, 몇까지 채워야 돼?" 하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도련님, 후작님께서 부르십니다." 하녀가 다급하게 말했다.
'아버지가? 갑자기?'
목소리에 다급함이 잔뜩 묻어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난 건가, 싶어서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설마 벌써 강태오 쪽에서 뭔 짓을 한 건 아니겠지.'
나는 옷을 갈아입고 아버지의 서재로 향했다.
복도를 걷는 동안 하녀들이 힐끔힐끔 나를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왜 저렇게 쳐다보는 거야, 무섭게.'
이건호 후작은 책상 앞에 서 있었다.
검은 머리에 나와 비슷한 눈매를 가진 남자였다.
체구는 나보다 한 뼘쯤 크고, 어깨는 갑옷 없이도 갑옷처럼 단단해 보였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표정이 확 밝아졌다.
마치 3년 만에 재회한 강아지를 본 사람 같은 표정이었다.
"하준아!" 그가 두 팔을 벌리며 다가왔다.
'또 저 텐션이네.'
"들었다, 다 들었어! 박도윤을 이겼다지?" 그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서재 창문이 살짝 떨리는 것 같았다.
"...뭐, 그럴 수도 있고." 나는 최대한 오만하게 어깨를 폈다.
속으로는 '어떻게 알았지' 하고 등골이 서늘했지만, 겉으로는 태연한 척 팔짱을 꼈다.
이럴 때는 뭐든 여유로운 척하는 게 중요하다.
원작의 이하준이라면 분명 이랬을 테니까.
"그럴 수도 있고가 아니지! 벌써 사교계에 소문이 다 퍼졌다는구나!" 그가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벌써 퍼졌다고?'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조용히 살고 싶다는 내 목표는 개업 3일 만에 폐업한 가게처럼 사라져버렸다.
간판도 못 걸어보고 망한 가게, 딱 그 짝이었다.
"그, 그게 왜 벌써 퍼져." 나는 당황해서 물었다.
"저택 하녀들 입이야 뭐, 원래 그렇지 않느냐! 허허!" 후작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그렇지, 그 하녀들 짓이었네.'
아까 복도에서 나를 힐끔거리던 그 시선들이 이해가 갔다.
'다들 알고 있었던 거네.'
"그래서, 걱정할 것 없다!" 후작이 갑자기 목소리를 낮췄다.
"내가 저택 경비를 두 배로 늘렸다. 외부인 접근은 철저히 막을 테니, 너는 마음 편히 수련만 하면 돼."
'과보호가 아주 스케일이 다르네.'
두 배로 늘렸다는 말에, 순간 이 저택이 무슨 왕궁 경비대라도 되는 줄 알았다.
"경비병만 늘린 게 아니다. 담장에 결계석도 새로 박아 넣었지! 어중이떠중이는 얼씬도 못할 거다!"
'결계석까지? 이거 완전 요새 만드는 수준인데.'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게 지금 나한테는 딱 필요한 조치였다.
안전한 거점, 방해받지 않는 수련장.
누가 갑자기 찾아와서 "저번에 박도윤 이겼다던데, 나랑도 한번?" 하면서 시비 걸 걱정은 안 해도 되는 거니까.
원작대로라면 이건호 후작은 야심 있는 정치가로 나왔었는데, 지금은 그냥 딸 없는 팔불출 아빠 같았다.
정치판에서 칼같이 계산하며 사람들을 밀어붙였다던 그 이건호가, 지금은 아들 자랑에 눈이 반짝인 아저씨가 되어 있었다.
'뭐, 나쁘지 않지.'
이렇게 든든한 뒷배가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나는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아서 잘해."
후작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손수 내 어깨를 두드렸다.
그 손길이 어쩐지, 든든하면서도 조금 부끄러웠다.
"그리고 하준아." 후작이 목소리를 낮추며 덧붙였다.
"혹시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 말해라. 검이든, 마법서든, 사람이든. 내가 다 구해다 주겠다!"
'사람까지 구해준다고? 이거 완전 스폰서인데.'
나는 그냥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이가 저택은 순식간에 요새처럼 바뀌었다.
담장이 높아졌고, 경비병이 늘었다.
정문 앞에는 창을 든 경비병 둘이 서서, 지나가는 참새 한 마리도 검문할 기세로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박도윤은 매일같이 훈련장에 나를 끌고 나갔다.
"주군! 오늘도 검을 논해 봅시다!" 그는 늘 그렇듯 격식 넘치는 어투로 소리쳤다.
'저 형은 진짜 하루도 안 쉬네.'
훈련장 바닥에는 이제 내 발자국 모양대로 홈이 파일 정도였다.
[노력치 14/???]
숫자는 꾸준히 오르고 있었다.
검을 쥔 손도, 마법을 다루는 감각도 조금씩 낯설지 않아졌다.
처음엔 검을 휘두르면 손목이 시큰거렸는데, 이제는 하루 종일 휘둘러도 다음 날 멀쩡했다.
'몸이 게임 캐릭터처럼 강해지고 있는 건가.'
'이대로만 가면, 강태오도 못 이길 게 없지.'
나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솔직히 강태오는 원작 최종보스급 존재감을 가진 놈이라, 이 정도로 이길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지만, 일단 지금은 낙관하는 게 정신건강에 좋았다.
'너무 깊게 생각하면 잠도 못 자.'
그러던 어느 날, 서재로 낯선 서신 한 장이 도착했다.
집사가 조심스레 그것을 내게 건넸다.
집사의 표정이 평소보다 유독 딱딱했다.
'뭔가 심상치 않은 냄새가 나는데.'
"서 백작가에서 보낸 서신입니다."
'서 백작가?'
원작 기억이 순식간에 머릿속을 스쳤다.
서 백작가의 장녀, 서지아.
빙과 독, 두 속성을 지닌 천재이자, 원작에서 나와 정략으로 얽히는 인물.
은발에 옥색 눈, 절세미녀지만 속은 남의 고통을 즐기는 사디스트라는, 정말 위험천만한 캐릭터였다.
원작에서 서지아는 정혼자인 이하준을 상대로 온갖 심리적 고문에 가까운 장난을 쳤었다.
상대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며 웃는 게 취미인 여자.
'그 미친 여자가 왜 벌써 등장하는 거야.'
원작 진행상으로는 훨씬 나중, 그것도 이하준이 어느 정도 세력을 갖춘 뒤에나 나올 인물이었다.
서신에는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혼약에 관하여, 정식으로 방문을 청하고자 합니다. — 서준혁]
'혼약이라니, 갑자기?'
원작보다 시기가 훨씬 빨랐다.
손끝이 조금 서늘해졌다.
집사가 내 표정을 살피며 조용히 물었다.
"답신은 어찌하올지, 도련님?"
'뭐라고 답해야 하는 거야, 이거.'
거절하자니 백작가와의 관계가 틀어질 것이고, 승낙하자니 그 사디스트 아가씨를 저택에 들이는 꼴이었다.
조용히 살고 싶다는 내 소박한 바람은, 이제 완전히 저 멀리 도망친 것 같았다.
'검을 배운 지 몇 주 만에 부단장을 이긴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정략혼까지.'
'이거 완전 드라마 주인공 코스 아니야?'
나는 서신을 다시 한 번 내려다보았다.
'서준혁'이라는 이름 아래, 은발의 소녀가 짓던 그 서늘한 미소가 자꾸만 눈앞에 그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