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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그림자의 정체를 확인한 순간, 나는 숨이 턱 막히는 걸 느꼈다. 방금 강다홍이 쓰러뜨린 멧돼지형 몬스터보다 최소 두 배는 커 보이는 개체였는데, 등에는 뾰족한 가시가 줄지어 솟아 있었고 발굽이 땅에 닿을 때마다 지진이라도 난 듯 흙먼지가 튀어 올랐다. 아무래도 저것이 무리의 우두머리인 모양이었다. '...아니, 저게 뭔데 저렇게 커.' 나는 속으로 되뇌며 놈의 크기를 다시 가늠해봤다. 대략 트럭 한 대 정도는 될 듯한 몸집이었는데, 그 위에 얹힌 가시들이 저물어가는 햇빛을 받아 번쩍거리는 게 꼭 강철로 만든 갑옷처럼 보였다. 저런 게 무슨 튜토리얼 몬스터란 말인가. 이건 명백히 밸런스가 무너진 개체였다. "...저거 뭔데, 아까보다 훨 커" 하고 강다홍이 목검을 고쳐 쥐며 뒷걸음질쳤다. 평소 같으면 큰소리치며 앞장서던 그녀조차 저 크기 앞에서는 본능적으로 위축되는 듯했다. 그녀의 목검 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눈에 들어왔는데, 그 모습을 보니 나 역시 다리에 힘이 빠지는 걸 참기가 힘들었다. 나는 재빨리 시스템 창을 열어 목록을 다시 훑었다. '방벽은 이미 절반쯤 완성됐고, 함정도 하나 성공했으니...' 하고 계산을 이어가는 사이, 우두머리 몬스터가 땅을 박차고 정면으로 돌진해오기 시작했다. 그 속도가 결코 만만치 않았는데, 방금까지 상대했던 개체들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빨랐다. 마치 트럭이 브레이크 없이 언덕을 내려오는 것 같은 속도감이었다. [크래프트: 목재 방벽] 놈의 진로를 막듯 나는 다급히 방벽 한 조각을 더 추가했지만, 놈은 그것을 그대로 들이받아버렸다. 파그작!! 방벽이 나뭇조각으로 흩어지며 부서지는 소리가 귓속을 때렸고, 나는 순간적으로 심장이 얼어붙는 걸 느꼈다. '이 정도로는 못 막는구나' 하는 생각이 스치는 동시에, 놈은 그 여세를 몰아 계속 돌진해왔다. 부서진 나뭇조각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고, 그중 하나가 내 뺨을 스치고 지나갔는데, 그 순간에는 아픈 것도 몰랐다. 지금 아프고 안 아프고를 따질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보통아, 뒤로!" 하고 누군가 소리쳤는데, 돌아보니 윤레아였다. 안쪽 염색을 한 검은 머리를 흩날리며 그녀가 다급히 손을 뻗었는데, 그 손끝에서 은은한 초록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치유]" 하고 그녀가 중얼거리자, 아까 놈과 부딪히며 다친 강다홍의 팔에 남아 있던 찰과상이 순식간에 아물었다. 하지만 지금 필요한 건 치유가 아니라 저 거대한 놈을 막을 방법이었다. 회복이 아무리 빠르다 한들, 저 뿔에 정면으로 받히면 회복할 몸뚱이가 남아 있을는지가 의문이었다. 나는 다급히 목록을 다시 뒤졌다. '함정, 함정...더 크고 깊은 함정이 필요해' 하고 생각하던 찰나, 목록 하단에 새로운 항목이 눈에 들어왔다. [크래프트: 함정(강화형) - 필요 재료: 목재 다량, 돌] '...이게 왜 이제야 뜨는 건데.' 나는 헛웃음을 흘릴 뻔했지만 그럴 여유조차 없었다. 재료 소모량이 방금 만든 함정의 세 배는 되는 것 같았는데, 다행히 아까 남겨둔 목재와 근처에 굴러다니는 돌덩이들로 충당이 가능할 듯했다. '그래, 이거다' 하는 생각과 동시에 나는 급히 손을 놀렸다. 놈이 방벽 잔해를 짓밟으며 우리 쪽으로 달려오는 경로 정면에, 이번엔 훨씬 깊고 넓은 구덩이가 순식간에 파였고, 그 위로 나뭇가지와 흙이 두 겹으로 덮이며 위장됐다. 하지만 놈은 방금 부순 방벽 잔해 때문인지 경로를 살짝 틀어버렸고, 함정을 정면으로 밟지 않고 옆으로 스쳐 지나가려 했다. '이대로면 놓친다' 하는 생각이 스치는 순간, 나는 목이 터지도록 외치고 싶었지만 그럴 시간조차 아까웠다. 다행히 그 순간 구서연이 앞으로 나섰다. "[물의 마법]" 하고 그녀가 외치자,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물살이 놈의 발밑을 순식간에 적셔버렸다. 흙바닥이 진흙탕으로 변하며 놈의 발이 미끄러졌고, 균형을 잃은 놈은 그대로 방향이 꺾이며 내가 만든 함정 쪽으로 굴러떨어졌다. 콰크작!! 우드득!! 놈이 구덩이에 반쯤 몸이 걸린 채 발버둥 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구덩이 벽면이 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조금씩 허물어지는 게 눈에 보였는데, 그 틈에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라 놈의 형체가 반쯤 가려질 정도였다. 나는 그 틈을 놓칠세라 다급히 소리쳤다. "다홍아, 지금이야!" "오케이!" 하고 강다홍이 목검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뛰어들었는데, 그녀의 스킬인 【검술】이 발동하는 순간 목검 주변으로 옅은 붉은 기운이 감돌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뒷걸음질치던 그녀였는데, 막상 기회가 오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몸을 던지는 걸 보니, 역시 이 반에서 제일 배짱 있는 애는 강다홍이 맞구나 싶었다. 퍼억! 퍼억!! 퍼억!!! 연속으로 이어지는 타격이 놈의 목덜미에 정확히 꽂혔고, 몬스터는 몇 차례 더 발버둥 치다가 결국 움직임을 멈췄다. 마지막 타격이 들어가는 순간, 놈의 몸이 부르르 떨리다가 그대로 구덩이 안으로 완전히 미끄러져 들어갔는데, 그 육중한 소리가 땅을 타고 발바닥까지 전해져왔다. [알림: 몬스터 무리의 습격을 격퇴했습니다.] 그 문구를 확인한 순간,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살았다...' 하는 생각과 함께 손끝이 덜덜 떨렸는데, 그것이 두려움 때문인지 아니면 흥분 때문인지 구분이 안 됐다. 손바닥을 펴봤더니 어느새 손톱이 살을 파고들 정도로 힘을 주고 있었던 모양인지, 손바닥에 네 개의 반달 모양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괜찮아?" 하고 구서연이 다가와 물었는데, 그녀의 얼굴에도 피곤함이 짙게 배어 있었다.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고, 마법을 연속으로 쓴 탓인지 숨소리도 평소보다 조금 거칠었다. 나는 겨우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어...어, 괜찮아" 하고 말했지만,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그녀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부서진 방벽 잔해와 아직 남아 있는 함정 흔적을 번갈아 둘러보았다. 그 시선이 꼼꼼하게 지형을 훑는 게, 마치 다음 습격에 대비해 뭔가를 계산하는 사람 같았다. "이거 진짜, 너 아니었으면 우리 다 죽었을 것 같은데" 하고 그녀가 나직이 말했는데, 나는 그 말을 듣고 이상하게 코끝이 시큰해졌다. 지금까지 살면서 누군가에게 이렇게 직접적인 감사나 인정을 받아본 적이 거의 없었으니까. 학교에서든 집에서든, 나는 늘 있어도 없는 듯한 존재였는데, 이 지긋지긋한 이세계 한복판에서 처음으로 '너 덕분에'라는 말을 들었다는 게 웃기게도 서글펐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애들도 하나둘 자리에 주저앉거나 서로를 부축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누군가는 웃음을 터뜨리며 긴장이 풀렸다는 신호를 보냈고, 누군가는 그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며 숨만 몰아쉬었다. 방금까지 죽음의 위협 앞에 놓여 있던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풍경치고는, 묘하게 평화로워 보였다. 그날 밤, 우리는 남은 목재를 모아 방벽을 다시 세웠고, 나는 밤을 새워가며 부족한 부분을 하나씩 보완해나갔다. 함정을 추가로 몇 개 더 설치했고, 화로를 만들어 불을 피웠으며, 간이 텐트까지 세 채나 지었다. 크래프트 스킬은 쓰면 쓸수록 익숙해지는 느낌이 들었는데, 특히 같은 항목을 반복해서 만들 때마다 제작 시간이 조금씩 줄어드는 것 같았다. 처음 방벽 하나를 만드는 데 걸렸던 시간과, 지금 열 번째 방벽을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을 비교해보면 확실히 체감상 절반 이하로 줄어 있었는데, 이게 숙련도라는 개념이 실제로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인 듯했다. '...이거 개사긴데?' 하는 생각이 슬쩍 들었다. 이대로라면 며칠만 더 지나면 웬만한 방벽쯤은 눈 감고도 세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알림: 최초 안전지대 구축 사례로 기록되었습니다.] 그 메시지가 떴을 때, 나는 잠시 멍해졌다. '최초라니, 이게 뭔 소리야'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이어 뜬 추가 문구를 보고서야 그 의미를 이해했다. [현재까지 소환된 모든 학급 중, 하루 내에 완성된 안전 기지로는 가장 완성도가 높은 것으로 집계됩니다.] '다른 반도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그러고 보니 소환 당시 우리 반 외에도 다른 인기척이 있었던 것 같았는데, 그때는 정신이 없어서 미처 신경 쓰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곰곰이 되짚어보니, 소환되던 순간 저 멀리서 들려왔던 웅성거림이 단순한 환청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처럼 어딘가에서 낯선 몬스터와 싸우고 있는 다른 반 애들이 있다는 뜻일 텐데, 그들은 우리처럼 운 좋게 크래프트 스킬을 가진 애가 있었을까, 아니면 진작에 무너져버렸을까. 기지가 완성됐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자리에 앉아 잠시 숨을 돌리려던 그때, 방벽 바깥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짐승의 것이라기엔 지나치게 규칙적인, 사람의 발소리를 닮은 그 기척에, 나는 순간 온몸이 다시 얼어붙는 걸 느꼈다. 방금 세운 방벽 틈으로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다가오는 그림자가 어렴풋이 비쳤는데, 그 걸음걸이가 몬스터의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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