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거기, 잠깐 얘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하고 소리친 이는 우리보다 나이가 조금 더 있어 보이는 남학생이었는데, 뒤로 다섯 명 정도가 조심스레 따라오고 있었다. 옷차림을 보니 확실히 다른 학교, 혹은 다른 반 소속인 듯했고, 표정에서는 경계와 기대가 반쯤씩 섞여 있는 게 보였다. 그들의 옷은 이곳에 떨어진 지 며칠이 지났다는 걸 증명하듯 여기저기 찢기고 흙먼지가 앉아 있었는데, 특히 맨 뒤에 서 있던 여학생 하나는 팔에 붕대를 감고 있었고 그 붕대 위로 얼룩진 핏자국이 마른 채 남아 있었다. 그걸 보는 순간 나는 저들이 그냥 정찰하러 온 게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우리는 3학년 1반에서 왔습니다. 이쪽 기지가 정말 완성됐다는 소문을 듣고 확인하러 왔는데요" 하고 그가 말했는데, 그 존댓말이 오히려 어색하게 느껴졌다. 서로 나이나 학년이 다른 상황에서 이런 어색한 격식이 오가는 게 당연한 반응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이 세계로 떨어진 뒤로 우리는 서로 반이 다르면 남처럼 대하는 게 익숙해져 있었으니까. 같은 학교 안에서도 이렇게 벽이 생기는 걸 보면, 사람이라는 게 위기 상황에서 오히려 더 작은 단위로 쪼그라드는 존재인가 싶기도 했다.
구서연이 나서서 그들을 상대했는데,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경계심이 뚜렷하게 느껴졌다. 팔을 가볍게 앞으로 내밀어 방벽 입구를 은근히 가로막는 듯한 자세를 취한 채였다.
"무슨 용건이신데요" 하고 그녀가 묻자, 남학생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희 반은 아직 안전한 거처를 못 마련했습니다. 밤마다 몬스터 습격에 시달리고 있고, 부상자도 있어서...혹시 여기서 며칠만 신세를 질 수 있을지 여쭙고 싶어서 왔습니다" 하는 그 말에, 나는 순간 마음이 복잡해졌다. 딱 잘라 거절하기엔 그들의 처지가 안타까웠지만, 우리 역시 자원이 그리 넉넉한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무엇보다 방벽 안에 낯선 인원을 여섯 명이나 더 들이면, 지금도 빠짐없이 쪼개 쓰고 있는 식량과 물이 얼마나 더 빨리 바닥날지 계산이 되지 않았다. 간단한 산술이었지만, 그 산술의 결과가 너무 뻔해서 오히려 입 밖으로 꺼내기가 싫었다.
"저희도 지금 겨우 자리 잡은 처지라서요" 하고 구서연이 조심스레 말을 흐렸는데, 그 말에는 완곡한 거절의 뜻이 담겨 있었다. 남학생은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지만, 억지로 밀어붙이지는 않았다. 그의 뒤에 있던 무리 중 몇 명이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낮게 한숨을 내쉬는 게 보였는데, 그 한숨에서 절박함이 묻어나서 나는 괜히 시선을 피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혹시, 저 기지를 어떻게 지었는지만 좀 여쭤봐도 될까요. 저희도 참고하고 싶어서요" 하고 그가 물었는데, 그 질문에 나는 순간 등 뒤가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내 스킬에 대해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으니까. '크래프트 스킬을 가졌다는 걸 말하는 순간, 저 사람들이 나를 가만둘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이 세계에서 스킬은 곧 생존이고, 생존은 곧 자원이었다. 내가 가진 게 희귀하면 희귀할수록, 그걸 노리는 눈길도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강다홍이 먼저 나서서 대답을 가로챘다.
"그건 우리 쪽 비밀이라서요, 죄송하지만" 하고 그녀가 딱 잘라 말하자, 남학생 무리는 서로 눈치를 보더니 결국 물러났다. 그들이 떠나는 뒷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마음이 무거워지는 걸 느꼈다. 붕대를 감은 여학생이 마지막으로 한 번 우리 방벽을 돌아보던 그 눈빛이, 며칠은 더 내 머릿속에 남아있을 것 같았다.
"괜찮았을까, 저렇게 그냥 보내도" 하고 내가 중얼거리자, 구서연이 팔짱을 낀 채 대답했다.
"어쩔 수 없어. 우리도 물자가 빠짐없는 상황이니까. 지금 다른 반까지 받아들이면 진짜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 거야" 하는 그녀의 말이 맞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왠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요컨대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남을 밀어내야 한다는 뜻이었고, 그 사실이 이상하게 목구멍에 걸리는 느낌이었다.
그날 이후로 며칠 동안, 비슷한 방문이 두어 차례 더 있었다. 어떤 무리는 대놓고 기지를 나눠달라 요구했고, 어떤 무리는 정중하게 정보만 얻어가려 했다. 한 번은 밤늦게 방벽 근처를 어슬렁거리던 인영을 발견하고 강다홍이 곤봉을 들고 뛰쳐나갔던 적도 있었는데, 다행히 그쪽도 우리와 비슷한 처지의 낙오자 무리였는지 별다른 충돌 없이 물러났다. 그 모든 상황을 겪으며 나는 점점 우리 기지의 존재가 이 세계에서 이미 소문이 퍼져버렸다는 걸 실감하게 됐다. 완성된 방벽, 안정된 화로, 밤에도 몬스터 걱정 없이 잠들 수 있는 공간이라는 게, 이 세계에서는 그 자체로 하나의 전설처럼 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는 사이 식량과 물자 문제는 점점 심각해지고 있었다. 처음 며칠은 소지품에 있던 비상식량으로 버텼지만, 그것도 이제 거의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나는 크래프트 스킬로 낚싯대나 간단한 함정 도구를 만들어 근처 개울에서 물고기를 잡아보려 했지만, 재료로 쓸 수 있는 나무와 돌도 야영지 주변에서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방벽을 세우는 데 웬만한 굵은 나무는 이미 다 베어썼고, 남은 건 손목 굵기도 안 되는 잔가지들뿐이었으니까.
"이거, 이러다가 진짜 굶어 죽는 거 아니야" 하고 강다홍이 배를 문지르며 투덜거렸는데, 그 말에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목록을 다시 뒤져봤다.
[크래프트: 낚싯대] [크래프트: 그물]
두 항목을 발견하고 나는 곧바로 재료를 모아 그물을 하나 만들었는데, 생각보다 필요한 재료가 많지 않아서 안심이 됐다. 남은 잔가지와 옷가지에서 뽑아낸 실 몇 가닥, 그리고 근처에서 주운 넝쿨이면 충분했다. 완성된 그물을 개울에 던져놓고 반나절쯤 기다리자 제법 많은 물고기가 걸려들었다.
"오, 이거 진짜 쓸만한데?" 하고 윤레아가 물고기를 손질하며 즐거워했는데, 그 모습을 보니 나도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는 손질하는 손놀림이 제법 익숙해 보였는데, 비늘을 벗기는 칼질도 흔들림 없이 착착 이어졌다.
"할머니 집 가면 이렇게 개울에서 낚시했던 기억이 나네" 하고 윤레아가 문득 그런 말을 흐렸는데, 그 목소리에 옛 추억을 그리워하는 티가 배어 있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문득 우리 모두가 각자 원래 세계에 두고 온 것들이 있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여기서는 다들 그저 살아남는 데 급급해서 그런 걸 떠올릴 여유조차 없었는데, 물고기 한 마리가 그 여유를 잠시 되살려준 셈이었다.
그날 밤, 화로 주위에 모여 구운 물고기를 나누어 먹으며 우리는 처음으로 서로의 이전 삶에 대해 조금씩 이야기를 나눴다. 강다홍은 남동생이 있다고 했는데, "걔가 지금쯔음 밥은 잘 챙겨먹고 있으려나" 하며 잠시 허공을 보는 표정이 됐다. 윤레아는 할머니와 명절마다 만두를 빚었다고 했고, 그 이야기를 하는 내내 손끝으로 물고기 살을 발라내며 웃음기 어린 목소리를 냈다. 구서연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 침묵 속에서도 뭔가 그리움 같은 감정이 느껴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화롯불이 그녀의 옆얼굴을 비출 때마다 표정이 아주 살짝씩 흔들리는 게 보였는데, 나는 굳이 그걸 캐묻지 않기로 했다.
"보통이 너는 뭐 좋아하는 거 없어" 하고 강다홍이 불쑥 물었는데,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게임...이랑, 만드는 거" 하고 대답하자, 그녀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딱 맞네, 여기서도 만드는 거 실컷 하고 있잖아" 하는 그 말에, 나는 처음으로 이 상황이 그렇게 나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의 게임 같은 세계에 떨어졌는데 그 안에서 크래프트 스킬로 낚싯대나 방벽을 만들며 살아간다는 게, 어떻게 보면 내가 원래 좋아했던 것과 그렇게 멀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이름은 보통이지만 상황은 전혀 보통이 아닌데, 그 안에서 그나마 익숙한 걸 붙잡고 있다는 게 묘하게 위안이 됐다.
그렇게 소소한 웃음이 오가던 그날 밤이 끝날 무렵, 나는 조금 더 안정적인 물자 확보를 위해 야영지 반경을 넓혀 채집에 나서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근처 자원은 이미 거의 고갈됐고, 개울 하나로는 언제까지 버틸지 알 수 없었으니까. 그러나 야영지 바깥으로 나간다는 것은 곧 다시 몬스터와 마주칠 위험, 그리고 우리 기지를 노리는 낯선 무리와도 다시 마주칠 위험을 동시에 감수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 두 가지 위험을 저울질하며 잠자리에 누웠지만, 결국 답은 정해져 있었다. 가만히 앉아 굶어 죽는 것보다는, 나가서 무언가라도 부딪혀보는 게 나았다.
다음 날 아침, 채집을 위해 방벽 밖으로 나설 준비를 하던 중, 멀리서 또 다른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엔 한 무리가 아니라, 확연히 더 많은 인원이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소리였다. 발소리 사이사이로 낮게 깔린 말소리와, 규칙적으로 절걱거리는 무언가의 마찰음까지 섞여 들려서, 나는 순간 등에 지고 있던 배낭 끈을 무의식적으로 다시 고쳐 쥐었다. 저건, 지금까지 찾아왔던 낙오자 무리와는 뭔가 결이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