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반년 시한부 영주

2화

혼약녀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나는 이상하게 심장이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게 설레는 감정인지 불안한 감정인지 구분이 안 갔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이 느낌, 전장에서 매복에 걸렸을 때랑 똑같은데, 그때는 적어도 상대가 누군지는 알고 있었잖아. 지금은 그것도 모르니 더 지랄맞은 상황인 셈이다. 사실 나는 이 정략혼약이라는 것 자체에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스무 살이 넘도록 여자를 제대로 만나본 적도 없고, 그럴 여유도 없었으니까. 열두 살에 징집되어 창을 쥐었던 그날부터 지금까지, 내 인생에는 오직 전투와 생존만이 있었다. 동료가 옆에서 창에 찔려 죽어 나가는 걸 보면서 컸는데, 연애니 혼약이니 하는 낭만적인 감정을 배울 틈이 어디 있었겠는가. 그런 내가 갑자기 영주가 되어 혼약녀를 맞이해야 한다니, 이 무슨 급전개인가 싶다가도, 세상일이 다 그런 거지 하고 넘겼던 게 벌써 몇 달 전이었다. 인생이라는 게 원래 개연성 따위 신경 안 쓰고 굴러가는 거 아닌가. 아버지가 전사하고 형이 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 남작 자리가 나에게 떨어진 것도 순식간이었다. 형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뭐였더라. 영지는 백성들 목숨이 걸린 곳이니 함부로 굴지 말라는, 그런 뻔한 유언이었다. 그 말을 들을 땐 그저 고개만 끄덕였는데, 이제 와서 그 무게를 실감하니 등에 식은땀이 흐른다. 나는 그때까지 영주 교육이라는 걸 받아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글은 읽을 줄 알았지만 장부 보는 법은 몰랐고, 검술은 신들린 듯 잘했지만 세금 걷는 법은 전혀 몰랐다. 노식 할아범이 처음 세율표를 내밀었을 때 나는 그게 무슨 상형문자인가 하고 한참을 들여다봤었다. 그러니 지금 이 지경이 된 것도 어찌 보면 필연이 아니었을까. 전장에서 배운 건 오직 살아남는 법과 상대를 죽이는 법뿐이었는데, 이제 와서 살림살이를 배우라니 이게 무슨 뒤통수인가 싶었다. 그런 나에게 노식 할아범이 혼약녀 얘기를 꺼낸다는 건, 뭔가 이 재정 위기와 얽혀 있다는 뜻일 텐데, 나는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 짐작조차 못 했다. "혼약녀분에 대해 무엇을 말씀하시려는 겁니까." 나는 최대한 차분하게 물었지만, 속으로는 이미 별별 불안한 상상을 하고 있었다. 설마 어디 문제 있는 집안 딸을 떠넘기려는 건 아니겠지, 설마 나이가 나보다 훨씬 많다거나, 설마 이미 애가 있다거나. 별의별 시나리오가 머릿속에서 전투대열을 짜기 시작했다. 노식 할아범은 자리에 다시 앉으며 안경을 벗어 닦았다. 그 동작이 어쩐지 뭔가 무거운 이야기를 꺼내기 전의 준비 같아서, 나는 그를 따라 자세를 고쳐 앉았다. 등받이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이 집무실 의자마저 낡아서 삐걱거리는데, 이게 남작가의 현실인가 싶어 헛웃음이 나왔다. "윤서은 아가씨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계십니까." 그가 물었다. 나는 솔직히 아는 게 거의 없었다. 대윤 공작가의 딸이고, 정략혼약으로 나에게 시집올 예정이며, 나이는 나보다 네 살 어리다는 정도. 그 이상은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그다지 잘 모릅니다."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알려고도 안 했다. 어차피 정치적으로 정해진 혼약이라 내가 뭘 안다고 달라질 게 있나 싶었으니까. 노식 할아범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낮은 목소리로 소문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세간에서는 그분을 얼음의 공녀라고 부릅니다." 얼음의 공녀. 그 별명을 듣는 순간 나는 뭔가 서늘한 기운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가는 걸 느꼈다. 이름부터 심상치 않잖아. 불의 기사, 폭풍의 검사, 그런 별명은 그래도 멋있는데, 얼음이라니. 사람한테 붙는 별명 중에 이렇게 서늘한 게 흔치 않을 텐데. "그게 무슨 뜻입니까." 나는 물었다. "감정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지요. 원래는 셋째 왕자와 혼약이 되어 있었는데, 왕자 측에서 파혼을 통보했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뭔가 위험한 냄새를 맡았다. 왕자와의 혼약이라니 그것도 급이 다른 이야기인데, 그게 파혼으로 끝났다는 것도 이상하고, 왕자가 먼저 파혼을 했다는 것도 이상한데, 그게 어째서 그녀의 잘못처럼 소문이 났다는 걸까. 원래 이런 일에서는 힘 있는 쪽이 이기는 법이니, 왕실이 잘못을 뒤집어씌운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파혼의 이유가 뭐였습니까."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노식 할아범은 어깨를 살짝 들썩였다. "정확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만, 그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왕립 아카데미에서 추방되었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추방이라니. 나는 그 단어의 무게에 잠시 말을 잃었다. 왕립 아카데미에서 추방된다는 건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그곳은 웬만한 귀족 가문의 자제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곳이었으니, 거기서 추방됐다는 건 뭔가 심각한 사건이 있었다는 뜻이었다. 살인이라도 저질렀나, 아니면 반역에 연루됐나, 별생각이 다 들었다. "그런 분이 저와 혼약을 맺게 됐다는 겁니까." 나는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거 완전 뒤집어쓰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에 손바닥에 땀이 배어났다. 노식 할아범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대윤 공작가로서는 딸의 평판을 회복시킬 방법이 필요했을 테고, 청하 남작가로서는 재정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대윤 공작가와의 인연이 필요했을 겁니다. 서로에게 필요한 거래였겠지요." 거래라는 말이 참 냉정하게 들렸지만, 사실이 그랬을 거라는 걸 부정할 수는 없었다. 결국 나도 그 거래의 물건 중 하나라는 소리인가 싶었다. 남작 자리를 얻은 대가로 정체불명의 여자를 떠안게 된 셈이니, 세상 참 공평하게 돌아가는 것 같으면서도 하나도 안 공평하다. 나는 문득 이 상황이 너무나 낯설게 느껴졌다. 전장에서는 적과 동지가 명확했는데, 지금 내 앞에 놓인 이 결혼이라는 게임에서는 누가 적이고 누가 동지인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적어도 창을 들고 싸울 때는 상대가 나를 찌르려 든다는 걸 알았으니 대비할 수 있었는데, 이건 상대가 나를 어떻게 대할지조차 예측이 안 된다. "그분이 성격이 정말 그렇게 냉정합니까." 나는 물었다. 노식 할아범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대답했다. "만나본 적은 없어서 확언은 못 드립니다만, 소문이 이렇게 자세하게 도는 걸 보면 아예 근거 없는 얘기는 아닐 겁니다." 근거 없는 소문이 아니라는 말이 왜 이렇게 무섭게 들리는지. 그날 밤 나는 침소에 누워서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천장의 나뭇결을 몇 번이나 세었는지 모른다. 재정 위기 하나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것 같았는데, 여기에 얼음의 공녀라는 정체불명의 혼약녀까지 더해지니, 이거 참 개연성 없는 인생이 아닌가 싶었다. 전장에서는 적의 규모와 전력만 파악하면 대략적인 전략이 나왔는데, 이 결혼이라는 전장에서는 도대체 무슨 전략을 세워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상대의 검이 몇 자짜리인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싸우라는 건지.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혼약녀가 도착하는 게 언제였더라. 분명 두 달 후로 예정되어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 정도면 그래도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있겠지, 영지 안 사정도 조금이나마 수습해놓을 수 있겠지, 그런 안일한 생각을 하며 나는 겨우 눈을 감았다. 다음 날 아침, 노식 할아범이 다급한 얼굴로 서찰 하나를 들고 내 방으로 찾아왔다. 그 표정을 보는 순간 나는 뭔가 좋지 않은 소식이라는 걸 직감했다. 저 할아범이 저런 얼굴을 하는 건 세금이 안 걷혔을 때나 창고에 곡식이 바닥났을 때뿐이었는데, 이번엔 또 뭐냐. "영주님, 대윤 공작가에서 서찰이 도착했습니다." 그가 서찰을 내밀며 말했다. 밀랍으로 봉인된 인장이 유난히 붉게 보였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받아 펼쳤다. 그리고 그 안에 적힌 내용을 읽는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예정된 두 달 후가 아니라, 이제 겨우 열흘 후에 윤서은 아가씨가 청하 영지에 도착한다는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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