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윤서은이 성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혼약녀를 맞이하게 된 것도 당황스러웠지만, 그녀의 첫 마디부터가 심상치 않았다는 게 더 큰 문제였다. 소문을 확인하러 왔다니, 이 여자가 정말로 재정 위기를 눈치채고 있다는 건가. 나는 노식 할아범을 돌아보며 눈빛으로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도 이 상황이 예상 밖이었는지 살짝 굳은 얼굴이었다.
"영주님, 일단 혼약녀분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노식 할아범이 재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성 안으로 걸음을 옮겼는데, 뒷목이 뻐근할 정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전투 전에 느꼈던 긴장감과는 또 다른 종류의 긴장이었다. 적이 눈앞에 있으면 어떻게든 싸울 방법을 찾으면 됐는데, 지금은 상대가 적인지 동지인지조차 구분이 안 됐다. 검을 쥐고 적진으로 뛰어드는 것보다, 지금 이 여자와 나란히 걷는 게 백 배는 더 무섭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전장에서 나는 두려운 게 없었는데, 왜 다과실 문턱 하나가 이렇게 넘기 힘든 건지 모르겠다.
그날부터 나에게는 예정에도 없던 새로운 임무가 강제로 배정됐다. 혼약자를 접대하는 일이었다. 나는 전장에서는 병사들을 이끌고 최전선을 돌파하는 법은 알았지만, 귀족 여성을 상대로 어떻게 대접해야 하는지는 전혀 몰랐다. 다과를 준비해야 하는지, 정원을 산책해야 하는지, 아니면 그냥 가만히 있어야 하는지도 감이 안 왔다. 노식 할아범에게 슬쩍 물어봤더니, 그는 헛기침을 하며 "그저 예의를 갖추시면 됩니다"라는, 도움이라고는 조금도 안 되는 대답만 던져줬다. 예의를 갖추라니. 그게 구체적으로 뭘 하라는 건지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 그날 오후, 나는 다과실에서 그녀와 마주 앉게 되었는데, 침묵이 어색하게 흘렀다.
"차가 입맛에 맞으십니까." 나는 어색함을 견디지 못해 먼저 말을 꺼냈다. 윤서은은 찻잔을 살짝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짧게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그게 끝이었다. 대화를 더 이어가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그 태도에, 나는 속으로 이거 참 만만치 않은 상대구나 싶었다. 겉으로는 최대한 자연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마음속으로는 이 어색한 시간이 언제 끝날지만 계산하고 있었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봤자 딱히 볼 것도 없는 정원 풍경뿐이었고, 다시 그녀 쪽을 보니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찻잔만 만지고 있었다. 이 여자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재정 위기를 확인하러 왔다는 말이 그냥 인사치레였을 거라고 믿고 싶었지만, 저 침묵 속에 감춰진 게 뭔지 짐작조차 안 되니 속이 타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영지가 마음에 드십니까." 나는 다시 한번 어설픈 시도를 해봤다. 윤서은은 이번엔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짧지만 묘하게 날카로운 대답이었다. 그 말투에서 뭔가 캐묻고 싶어 하는 기색이 느껴졌는데, 나는 괜히 찔린 기분이 들어서 시선을 다시 찻잔으로 돌렸다. 젠장, 이 여자 눈빛이 왜 이렇게 사람 속을 꿰뚫어보는 것 같지.
다행히 그 어색한 시간을 깨준 건 다래였다. 젊은 시녀인 다래가 다과실 문을 열고 들어오며 활기차게 말을 걸었다. "영주님, 아가씨 방 준비 다 끝났어요! 짐도 옮겨 놨고요!" 다래는 북부 산악민족 출신으로, 전쟁 중에 내가 구조한 인연이 있어 지금은 성에서 시녀로 일하고 있었다. 그녀의 밝은 성격 덕분에 성 안의 무거운 분위기가 조금이나마 환기되는 것 같았다. "고맙다, 다래야." 나는 진심으로 안도하며 대답했다. 이렇게 반가운 얼굴이 있을 줄이야. 다래가 없었으면 나는 그 침묵 속에서 그대로 굳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다래가 윤서은을 방으로 안내하러 나선 뒤, 나는 다시 집무실로 돌아와 노식 할아범과 마주 앉았다. "할아범, 왕실에 지원을 요청하는 건 어떻습니까." 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을 꺼냈다. 전장에서는 상황이 어려울 때 본국에 증원을 요청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으니, 여기서도 같은 방식이 통하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노식 할아범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시도해 볼 가치는 있습니다. 서찰을 준비하겠습니다." 그의 표정에서 큰 기대는 읽히지 않았지만, 나는 그거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대로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그날 밤 나는 직접 왕실에 보낼 서찰을 작성했다. 촛불 아래서 몇 번이나 문장을 고쳐 쓰며, 전쟁에서 세운 공로를 언급하고 청하 영지의 재정 위기가 왕국 전체의 국방력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나름 논리적으로 잘 썼다고 자부하며 서찰을 봉인해 보냈는데, 며칠 후 돌아온 답신은 나를 다시 한번 무너뜨렸다. 왕실은 현재 다른 전선에 자금을 집중하고 있어 청하 영지에 대한 지원은 어렵다는, 지극히 형식적이고 냉담한 답변이었다. 문장 하나하나가 예의 바르면서도 냉정했는데, 그 정중함이 오히려 더 잔인하게 느껴졌다. 이럴 거면 그냥 대놓고 안 된다고 하지, 왜 이렇게 격식을 차려서 사람 속을 뒤집는 건지.
"결국 안 되는 겁니까." 나는 답신을 손에 쥔 채 힘없이 중얼거렸다. 노식 할아범도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예상했던 결과입니다. 왕실도 여유가 없으니까요." 나는 그 말에 완전히 힘이 빠졌다. 재정 문제를 풀 실마리가 하나 사라졌다는 게, 마치 마지막 밧줄이 끊어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정말로 이 영지는, 이대로 무너지는 건가. 전장에서는 적의 숫자가 많으면 후퇴할 방법이라도 있었는데, 지금은 후퇴할 곳조차 없다는 게 더 절망적이었다.
그날 저녁, 나는 정원 한쪽에 홀로 앉아 있었다. 하늘은 이미 어두워져 별이 몇 개 떠 있었고, 바람이 차가워서 옷깃을 여며야 할 정도였다. 다래가 그런 나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영주님, 왜 이렇게 축 처져 계세요?" 그녀가 특유의 쾌활한 말투로 물었다. 나는 그냥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별거 아니다." 하지만 다래는 그 말을 믿지 않는 눈치였다. "영주님, 저 전쟁터에서 영주님이 얼마나 강한지 다 봤어요. 서류 몇 장이 뭐가 그렇게 무섭다고 그러세요." 그녀의 말에 나는 픽 웃음이 났다. 이상하게 위로가 됐다. 서류가 창칼보다 무서운 세상이라니, 이건 또 무슨 아이러니인지.
"다래야, 너는 무섭지 않느냐. 이 영지가 무너질까봐." 나는 문득 물었다. 다래는 잠시 생각하더니 씩 웃었다. "저는 산에서 살 때부터 늘 뭔가 무너지는 거 보면서 살았어요. 그래도 어떻게든 다시 일어나더라구요." 그 말이 어쩐지 진심 어린 위로처럼 다가왔다. 나는 새삼 다래가 평범한 시녀가 아니라는 걸 다시 한번 느꼈다. 그녀의 움직임이나 눈빛에서 느껴지는 절제된 힘은, 분명 일반 병사들보다 뛰어난 무언가가 있었다. 저 가벼운 말투 뒤에 숨겨진 단단함이, 오늘따라 유난히 크게 느껴졌다.
"고맙다, 다래야. 네 덕분에 조금은 숨통이 트이는 것 같다." 나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다래는 별거 아니라는 듯 손을 휘휘 저으며 웃었다. "영주님이 힘내셔야 저도 여기서 편하게 살죠!" 그녀의 넉살에 나는 결국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이 성 안에서 이렇게 편하게 웃을 수 있는 순간이 얼마나 있었던가.
그렇게 위로를 받고 방으로 돌아가던 길, 나는 우연히 서재 앞을 지나다가 불이 켜져 있는 걸 보고 걸음을 멈췄다. 이 시간에 서재에 누가 있을 리가 없는데. 노식 할아범은 벌써 잠자리에 들었을 시간이었고, 다래는 방금 나와 함께 있다가 헤어졌으니 아닐 터였다. 그럼 대체 누구란 말인가. 나는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겨 문틈으로 살짝 들여다보았다.
윤서은이 홀로 앉아 무언가를 읽고 있었는데, 그 손에 들린 것이 다름 아닌 청하 영지의 재정 장부였다. 나는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걸 느꼈다. 저건 노식 할아범이 나에게만 보여준 극비 문서였는데, 저 여자가 언제 저걸 손에 넣었단 말인가. 서재 열쇠는 나와 할아범 둘밖에 없을 텐데, 그럼 저 여자가 몰래 훔쳐본 건가, 아니면 누군가 건네준 건가. 머릿속이 순식간에 복잡해졌다.
그리고 그녀의 표정은, 소문과 달리 아주 진지하게, 뭔가를 계산하고 있는 눈빛이었다. 손가락으로 장부의 숫자를 하나씩 짚어가며, 미간을 살짝 좁힌 채 뭔가를 중얼거리는 그 모습은, 도저히 그냥 소문을 확인하러 온 철없는 귀족 영애의 모습이 아니었다. 저건 마치, 이 영지의 상태를 완전히 파악하려는 자의 눈빛이었다.
씨발.
나는 숨을 죽인 채 문틈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저 여자는 대체 누구인가. 그리고 저 장부를 저렇게 뚫어지게 보는 이유는 뭔가.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끼며, 나는 이 새로운 위기의 정체를 짐작조차 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