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협곡은 좁았다.
그리고 마물은, 끝이 없었다.
[마기 흡수 완료]
소리가 몇 번이나 반복됐는지는 이미 세는 걸 포기한 지 오래였다.
주우욱-! 콰가강! 퍼억-!
소리가 겹치고 겹쳐서 나중엔 그냥 하나의 배경음처럼 들렸다.
마치 오래 틀어놓은 예능 프로그램의 웃음소리 같았다.
처음엔 재밌었는데, 나중엔 그냥 소음이 되는 그런 느낌.
선봉 부대의 마물들은 확실히 강했다.
한 놈, 한 놈이 예전 기준으로 치면 다 보스급이었다.
하지만 흡수할수록 나는 더 강해졌다.
'이거 완전 밸런스 붕괴 캐릭터인데.'
초반엔 약한데 성장형 궁극기 한 번 찍고 나면 렙업 속도가 미친 듯이 빨라지는, 딱 그런 타입.
옛날에 하던 모바일 게임에서 이런 캐릭터 뽑으면 다들 부러워했었는데.
지금 내가 그거였다.
다만 그 게임엔 '현질 유도 이벤트'는 없었다는 게 다행이랄까.
[업적: 선봉 격멸] 만 명 이상의 마신 병력을 단독으로 격퇴했습니다.
'만 명이라고?'
순간 숫자를 잘못 봤나 싶었다.
눈을 비비고 다시 봤다.
하지만 똑같았다.
만, 명.
'언제 그렇게 죽였지.'
기억이 흐릿했다.
분명 조금 전까지 처음 몇 놈을 상대했던 기억은 선명한데, 그 이후는 뭉텅이로 잘려나가 있었다.
마치 필름이 끊긴 술자리 다음 날 같았다.
어제 분명 노래방까지 간 것 같은데, 어떻게 집에 왔는지 기억이 안 나는 그런 상태.
[시간 지각 왜곡 진행률: 41%]
'벌써 41퍼센트라니.'
등골이 서늘해졌다.
분명 처음엔 협곡 밖으로 해가 지는 걸 봤던 것 같은데, 지금은 해가 몇 번이나 뜨고 졌는지 전혀 감이 없었다.
하루가 지난 건지, 일주일이 지난 건지, 아니면 한 달이 지난 건지.
협곡 벽에 새겨둔 표시를 봤다.
원래는 날짜를 세려고 새긴 것이었다.
손톱으로 하나씩, 하나씩.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것도 그만두었다.
의미가 없었다.
표시가 백 개쯤 넘어가자 그냥 세기가 싫어졌다.
이건 뭐, 다이어리에 매일 '오늘도 살아남았다'고 써봤자 나중엔 그냥 귀찮아지는 것과 비슷했다.
대신 나는 협곡 안에서 살아가는 법을 익혔다.
균열 근처의 물웅덩이는 마기에 오염돼 있었지만, 오히려 그게 내 몸에 좋았다.
[체질 변화: 마기 내성 상승]
'몸이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튜닝되고 있다.'
이대로 가다간 나중엔 사람들 만나면 "저 사람 뭔가 좀... 냄새가 이상해요"라는 소리를 들을지도 모른다.
아니, 지금도 이미 그런 거 아닐까.
근데 여기 냄새 맡을 사람이 없으니 알 방법이 없었다.
한번은 균열 안쪽 깊은 곳에서 이상한 짐승을 발견했다.
크기는 개만 한데, 몸 전체가 검은 안개로 이루어져 있었다.
마물이라기엔 공격성이 없었고, 그냥 나를 졸졸 따라다녔다.
처음엔 경계했다.
혹시 저것도 마신왕 잔재의 일부인가 싶어서 몇 번 베어보려고도 했다.
그런데 검은 안개는 그냥 스륵 흩어지고, 다시 뭉쳐서 내 뒤를 따라올 뿐이었다.
공격할 의지가 전혀 없었다.
"넌 뭐냐." 나는 그놈을 향해 물었다.
당연히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그날부터 그 짐승은 계속 내 곁에 있었다.
먹이를 주지 않아도, 딱히 마기를 나눠줘도 좋아하는 것 같았다.
'이름이라도 지어줄까.'
하지만 이름을 지어봤자 부를 사람도 없었다.
혼자 중얼거리는 것도 이제 지겨웠다.
그래도 그 검은 안개 짐승은 조용히 옆에 있어줬다.
말은 안 통해도 그게 위로가 됐다.
한번은 그놈한테 옛날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태현이가 처음 카드를 뽑았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도윤이가 새 능력 쓸 때마다 얼마나 능글맞게 자랑했는지.
검은 안개는 그저 조용히 몸을 웅크리고 듣고만 있었다.
반응이 없어도, 누군가한테 말을 뱉는다는 것 자체로 숨통이 트였다.
전투는 계속됐다.
마신왕의 잔재가 재구성되려 할 때마다 나는 심연 역류를 사용해 그걸 억눌렀다.
[심연 역류 발동] 흡수 한계를 초과한 마기 78% 역류.
콰과과광-!
협곡 전체가 흔들릴 정도의 반동이었다.
바닥이 갈라지고, 벽에 붙은 마물들이 통째로 튕겨 나갔다.
하지만 매번 균열은 조금씩 다시 봉합됐다.
'끈질기네, 이거.'
마치 지우려고 지워도 계속 번지는 얼룩 같았다.
지우개로 아무리 문질러도 자국이 남는, 그런 종류의 얼룩.
문제는 그 반동이 끝날 때마다 시간 지각이 또 훅 무너진다는 점이었다.
[시간 지각 왜곡 진행률: 88%]
'거의 다 왔네, 이거.'
퍼센트가 올라갈수록 오히려 마음이 이상하게 차분해졌다.
이제 와서 되돌릴 수도 없으니, 그냥 끝까지 가보자는 심정이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계절 감각도 사라졌다.
협곡 안은 늘 어둑했고, 바깥세상의 날씨가 어떤지는 짐작도 안 갔다.
밥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도 몰랐다.
그냥 배가 고프면 마기를 흡수하고, 그게 곧 식사가 됐다.
가끔 물웅덩이에 비친 내 얼굴을 봤다.
수염이 자랐는지, 살이 빠졌는지, 그런 것조차 구분이 안 갔다.
얼굴이 그냥 뭉개진 그림자처럼 보였다.
'이러다 진짜 시간 개념 자체가 없어지는 거 아냐.'
걱정이 됐지만, 걱정할 여유조차 점점 줄어들었다.
마물은 계속 밀려왔고, 나는 계속 흡수했다.
그게 전부였다.
가끔 협곡 저 안쪽에서 낮게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신왕의 잔재가 뭔가를 중얼거리는 것 같은 소리였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였지만, 왠지 조롱하는 느낌이 들었다.
"닥쳐." 나는 그쪽을 향해 소리쳤다.
물론 대답은 없었다.
검은 안개 짐승만 내 다리 옆에서 살짝 몸을 떨었다.
어느 날, 협곡 안쪽의 균열이 눈에 띄게 작아진 걸 발견했다.
[균열 안정화율: 61%]
'오, 뭔가 진전이 있긴 있구나.'
드디어 숙제 반절은 끝냈다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아직 반절이 더 남았다는 게 함정이었지만.
그날부터 조금씩 확신이 들었다.
이 균열을 완전히 틀어막을 수 있을 거라는 확신.
다만 그게 얼마나 걸릴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하루가 걸릴 수도, 몇 달이 걸릴 수도.
시간을 셀 수 없다는 게 이렇게 무서운 일이라는 걸 예전엔 몰랐다.
시계도 없고, 달력도 없고, 그저 내 감각만이 유일한 기준인데 그 감각조차 왜곡되고 있다는 걸 아는 상태.
그건 마치 눈을 감은 채로 계속 걷는 기분이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검은 안개 짐승이 내 다리에 몸을 비볐다.
"고맙다." 나는 그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털이 있는 것도 아닌데, 손끝에 뭔가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그게 착각인지 실제인지는 몰랐다.
그냥 좋았다.
대답 없는 짐승이 유일한 대화 상대였다는 게, 지금 생각하면 좀 서글펐다.
그래도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사람은 역시 혼자 있으면 안 되는 동물인가 보다.
전투가 다시 시작됐다.
이번엔 마물의 물량이 이전보다 훨씬 줄어 있었다.
확실히 균열이 좁아진 게 느껴졌다.
주우욱-!
[마기 흡수 완료]
콰가강!
[체력 회복]
퍼억-!
[크리티컬 히트]
그 와중에도 시스템 메시지는 성실하게 팝업을 띄워댔다.
이런 상황에서까지 알림을 꼬박꼬박 챙겨주는 걸 보면, 이 시스템도 나름 성실 근면한 성격인 듯했다.
[균열 안정화율: 100%]
그 메시지를 본 순간, 나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끝났다고?'
협곡의 균열이 완전히 닫히고 있었다.
빛이 스며들던 균열의 틈이 서서히 좁아지다가, 결국 완전히 사라졌다.
마물들도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조용했다.
너무 조용해서 이상했다.
그동안 늘 배경음처럼 깔려있던 마물들의 울음소리, 콰가강 소리, 퍼억 소리.
그게 다 사라지고 나니 오히려 귀가 먹먹했다.
마치 늘 켜놓던 TV를 갑자기 끈 것 같은 정적이었다.
[시간 지각 왜곡 진행률: 100%]
'아, 이것도 다 채웠네.'
100퍼센트라는 숫자를 보면서도 딱히 감흥이 없었다.
그냥 '아, 다 채웠구나' 하는 느낌뿐이었다.
이게 무슨 뜻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좋은 뜻은 아닐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나는 협곡 입구를 바라봤다.
밖으로 나가는 길이 오랜만에 눈에 들어왔다.
저 끝에 빛이 있었다.
협곡 안에 있는 동안은 거의 잊고 살았던, 그 흔한 햇빛.
검은 안개 짐승이 내 옆에서 낮게 울었다.
마치 이제 나가도 되냐고 묻는 것 같았다.
"가자." 나는 발을 뗐다.
한 걸음, 두 걸음.
협곡 안에서 대체 며칠이나, 아니 몇 달이나 걸었을 발걸음인데, 이 몇 걸음이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협곡 밖으로 나가면 태현이와 도윤이가 있을 것이다.
그것만 생각하며 걸었다.
둘이 어떤 표정으로 나를 맞아줄지, 그것만 상상하면서.
아마 태현이는 또 능글맞게 웃으면서 "형, 늦었네요" 같은 소리를 할 거고, 도윤이는 옆에서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쉴 거다.
그런 그림을 그리며 걸었다.
하지만 협곡 입구를 나서는 순간, 나는 뭔가 이상한 걸 느꼈다.
하늘의 색이 낯설었다.
분명 낮인데, 하늘이 익숙한 파란색이 아니었다.
뭔가 탁하고, 붉은 기가 섞인 이상한 색이었다.
공기의 냄새도 낯설었다.
협곡 안의 마기 냄새와는 다른, 그러면서도 뭔가 비슷한, 묘하게 뒤틀린 공기였다.
마치 내가 알던 세상이 아닌 것 같았다.
'설마.'
등골이 서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