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선을 넘는 의붓동생

5화

겨울이 깊어지면서, 도윤은 저택 안에서만 지내는 생활에 점점 갇힌 듯한 답답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눈 쌓인 정원은 매일 같은 모습이었고, 그 정적인 풍경을 몇 시간씩 들여다보는 일도 이제는 지겨워질 지경이었다. 몸을 회복한 지도 한참이었건만, 도현과 서영은 아직 그가 밖으로 나가는 것을 조심스러워했고, 그 이유를 물어도 돌아오는 답은 늘 비슷했다. 아직 날이 차다, 아직 몸이 완전하지 않다, 조금만 더 기다려라. 도윤은 그 말들을 들을 때마다 자신이 유리로 만들어진 인형이라도 되는 것처럼 취급받는 기분이 들었는데, 그런 취급이 오히려 자신을 더 안절부절못하게 만든다는 걸 도현은 모르는 듯했다. 하린 역시 그가 저택을 벗어나려 할 때마다 이상하게 불안한 얼굴을 하곤 했다. 처음엔 그저 걱정이 많은 아이의 습성인가 싶었지만, 그 불안의 결이 단순한 걱정과는 조금 다르다는 걸 도윤은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서 어느 날 저녁, 도윤이 도현에게 마을 구경을 시켜달라고 청했을 때, 그 반응이 예상보다 더 극적으로 갈렸다는 것이 오히려 놀라웠다. "음, 그거야 뭐 어렵지 않지." 도현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슬슬 바깥바람도 쐬어야지. 계속 집에만 있으면 몸이 굳는다." 의외로 순순한 대답이었다. 도윤은 몇 마디 더 실랑이를 벌일 준비까지 했었는데, 그 준비가 무색해질 만큼 도현의 승낙은 가벼웠다. 그런데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옆에서 조용히 식사를 하던 하린의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멈추는 걸 도윤은 보았다. 포크를 쥔 그 작은 손이 공중에서 한순간 굳어버린 것처럼 보였고, 도윤은 왜인지 그 정지된 손끝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저도 같이 갈래요." 하린이 곧바로 끼어들었다. 그 목소리에는 청유의 형태를 띠고 있었지만, 담긴 어조는 이미 결정된 사실을 통보하는 것에 더 가까웠고, 도윤은 그 미묘한 차이를 느끼면서도 딱히 반대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어차피 저택 안에서 하린과 얼굴을 마주하는 시간이 하루에도 몇 번이었으니, 밖에서 조금 더 함께 있는 것이 특별히 문제될 리는 없었다. "둘이 같이 다녀오려무나. 오누이끼리 나들이도 좋지." 서영이 웃으며 거들었고, 그 말에 도현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도현은 잠시 목소리를 낮춰 도윤에게만 들리도록 덧붙였다. "밖에 나가서도, 아까 말했던 것—선은 지키고. 둘이 아무리 가까워도, 남들 눈이 있으니까 말이다." 도윤은 그 당부가 어딘가 지나치게 반복적이라고 느꼈지만, 별다른 의문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는 그 말의 무게를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다. 아버지라는 사람이 원래 저렇게 말이 많은 편이었나, 잠깐 그런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다음 날, 두 사람은 처음으로 함께 저택 밖으로 나섰다. 대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공기가 달랐다. 저택 안의 온기 밴 공기와는 다르게, 바깥의 찬 바람은 코끝을 아릴 정도로 맑았고, 도윤은 그 낯선 청량함에 잠시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마을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하린은 유난히 상기된 얼굴로 창밖을 내다보았는데, 그 모습이 진짜 여덟 살 아이처럼 순수하게 들떠 보여서, 도윤은 처음으로 그녀에게서 느끼던 위화감이 조금은 옅어지는 걸 느꼈다. 창에 손바닥을 붙이고 지나가는 풍경을 좇는 그 뒷모습이, 그저 오랜만의 외출을 즐거워하는 아이의 것으로만 보였다. '그냥 애일 뿐인가.' 그런 생각이 들자 도윤은 스스로도 조금 어이가 없어졌다. 대체 무슨 대단한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던 건지, 새삼 되짚어봐도 명확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뭔가 이상했다는 느낌뿐이었다. 시장 거리는 눈이 얼어붙어 반짝이는 돌바닥 위로 사람들의 발소리가 오가고, 곳곳에서 화덕의 열기와 빵 굽는 냄새가 흘러나왔다. 상인들의 외침과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뒤섞여 도윤에게는 낯설도록 활기찬 풍경이었는데, 저택 안의 정적에 익숙해진 그의 귀에는 그 소음마저도 신선하게 다가왔다. 하린은 좌판에 놓인 작은 유리 장식품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는, 도윤의 소매를 살짝 잡아끌며 물었다. "이거, 예쁘죠?" 작은 유리 새 모양의 장식품이었다. 빛을 받으면 날개 부분이 얼음 조각처럼 반짝였고, 도윤은 그 반짝임보다 그것을 바라보는 하린의 눈빛이 더 밝다고 생각했다. "그러네." 짧게 대답했을 뿐인데, 하린의 얼굴에 번지는 미소가 지나치게 환해서, 도윤은 순간 말을 아꼈다. 그 미소는 단순히 예쁜 물건을 발견한 기쁨이라기보다, 오빠의 소매를 잡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에서 오는 만족처럼 보였다. 그런 눈으로 자신을 보는 게 처음도 아니었는데, 왜 오늘따라 유독 마음이 쓰이는지 도윤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좌판을 몇 개 더 지나며, 하린은 마른 과일 조각을 사달라고 조르기도 했고, 눈사람 모양의 작은 인형을 손에 쥐고는 놓지 않으려 했다. 도윤은 그런 모습들을 지켜보며 어쩐지 마음이 느슨해지는 걸 느꼈다. 이렇게 평범한 시간이라면, 계속 이어져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돌아오는 길, 좁은 골목을 지날 때 갑자기 지나가던 마차가 급하게 방향을 틀었고, 도윤은 반사적으로 하린의 팔을 잡아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 순간 그녀의 몸이 그의 품 안으로 완전히 들어왔고, 두 사람의 심장이 서로에게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서 몇 초간 미동도 하지 못했다. 마차가 지나간 뒤에도 골목은 여전히 좁았고, 두 사람이 떨어질 만한 여유는 좀처럼 생기지 않았다. 하린의 정수리에서 나는 옅은 비누 냄새가 도윤의 코끝에 닿았고, 그 냄새가 이상하게도 낯설지 않아서 도윤은 잠시 멍해졌다. 하린의 숨결이 도윤의 목덜미에 닿는 게 느껴졌고, 그는 순간 이유 모를 열기가 얼굴로 올라오는 걸 억누르며 서둘러 그녀를 놓았다. "괘, 괜찮아?" "……네." 하린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고 가늘게 떨렸는데, 그것이 놀라움 때문인지 다른 무엇 때문인지 도윤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녀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어 있는 것을 보며, 그는 이상하게도 시선을 피하고 싶어졌다. 마차 소리는 이미 멀어졌는데, 도윤의 귓속에서는 아직도 무언가가 울리고 있는 것 같았다. 골목을 벗어나 큰길로 나선 뒤에도, 하린은 좀처럼 말이 없었다. 평소라면 저택에서 있었던 일이며 도현의 잔소리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쉼 없이 늘어놓았을 텐데, 오늘은 유난히 조용했다. 도윤은 그 침묵이 신경 쓰였지만, 먼저 말을 걸 용기가 나지 않아 그냥 나란히 걸었다. 저택으로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하린은 아무 말 없이 도윤의 옷자락 끝을 살짝 붙잡은 채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 손가락은 옷자락을 세게 쥐지도, 놓지도 않은 채 그저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는데, 도윤은 그 손을 떼어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상하게도 그러지 못한 채 그저 창밖의 어두워지는 하늘을 응시할 뿐이었다. 마차 바퀴가 눈 쌓인 길 위를 굴러가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그 소리 사이사이로, 하린의 숨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빠르다는 것을 도윤은 알아챘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물어봤다가 돌아올 대답이 두려운 것도 아니었는데, 왜 입이 떨어지지 않는지 그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날 밤, 방으로 돌아온 도윤은 낮의 그 짧은 순간—품 안에 안겼던 하린의 온기와, 그 뒤로 이어진 알 수 없는 정적을 몇 번이나 떠올렸다. 단순한 사고였을 뿐이라고 스스로에게 되뇌었지만, 가슴 한구석에서 그 온기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서도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천장을 바라보며 도윤은 오늘 하루를 처음부터 다시 되짚어보았다. 유리 새 장식품 앞에서 웃던 얼굴, 눈사람 인형을 꼭 쥔 작은 손, 그리고 골목에서의 그 몇 초. 하나같이 별것 아닌 장면들인데, 왜 이렇게 오래 머무는 건지. '그냥 사고였잖아.' 몇 번이나 되뇌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 말이 그다지 설득력 있게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밤, 그의 방문 밖에서 아주 오래도록, 발소리 하나가 떠나지 않고 서 있었다는 것을, 도윤은 끝내 알지 못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