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어둠이었다.
소리도, 냄새도, 촉감도 없었다.
등의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이상했다.
방금 전까지 등이 찢어질 것 같았는데.
아버지의 손이 허리띠를 들어 올리는 걸 봤는데.
그런데 지금은 아무것도 없었다.
몸이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손을 움직이려 해도 손이 있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숨을 쉬려 해도 숨을 쉬는 감각이 없었다.
죽은 걸까.
그런 생각이 스쳤다.
여섯 살짜리 머리로도 그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눈 좀 떠봐."
목소리가 들렸다.
여자의 목소리였다.
낮지도 높지도 않은, 이상하게 색이 없는 목소리.
전생의 기억에서 들었던 어떤 목소리와도 닮지 않았다.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그냥 존재했다.
눈을 떴다.
하얀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벽도 바닥도 없이 그냥 하얗기만 했다.
발밑을 봤는데 발이 딛고 있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냥 서 있었다.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얼굴이 없었다.
아니, 있었는데 자꾸 흐려져서 잡히지 않았다.
눈을 맞추려 하면 시선이 미끄러졌다.
코를 보려 하면 코가 사라졌다.
마치 초점을 맞출 수 없는 사진 같았다.
"누구세요."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목이 있다는 게 그제야 느껴졌다.
"이름은 없어."
여자가 말했다.
"그냥 여신이라고 부르든가."
여신이라는 말에 몸이 굳었다.
전생의 기억 어딘가에서, 이런 존재가 세계를 만든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었다.
소설이었는지, 게임이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그 지식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온갖 질문이 떠올랐다.
여기가 어디인지.
내가 왜 여기 있는지.
전생의 기억을 가진 게 흔한 일인지.
그런데 입 밖으로는 가장 급한 질문 하나만 나왔다.
"저 죽은 건가요."
"아직."
여신이 짧게 대답했다.
"그런데 곧 죽을 확률이 높아. 아버지 손에, 아니면 숲 짐승 손에."
숫자를 대는 것처럼 담담한 말투였다.
감정이 하나도 묻어 있지 않았다.
확률이라니.
사람의 목숨을 두고 확률을 말하는 존재라니.
"저를 구해주실 건가요."
"아니."
짧은 대답에 숨이 막혔다.
기대했던 건 아니었는데.
그런데도 그 한마디에 뭔가가 쿵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거래를 하자는 거야."
여신이 말을 이었다.
"내가 너한테 힘을 하나 팔게. 대신 대가를 받아."
"대가가 뭔데요."
"나중에 알게 돼."
"그런 거래는 못 해요."
목소리가 떨렸다.
전생에서도 이런 계약서는 절대 사인하지 말라고 배웠다.
조건을 모르는 계약, 대가를 명시하지 않은 거래.
가장 기본적인 상식이었다.
"할 수 있어."
여신이 곧바로 되받았다.
"선택권이 없거든."
그 말에 몸이 차가워졌다.
선택권이 없다는 말이, 이미 결정되었다는 뜻이라는 걸 깨달았다.
발버둥 칠 수 없는 상황.
그 사실을 몸이 먼저 알아차렸는지, 손끝부터 감각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저는 마법사가 되고 싶었어요."
마도사 계급의 어머니를 보고 자란 여섯 살짜리 아이의, 가장 소박한 바람이었다.
마법을 쓸 수 있었다면, 아버지에게 맞을 일도 없었을 거다.
어머니가 마법으로 접시를 씻고, 불을 피우고, 상처를 치료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부러웠다.
나도 저렇게 되면, 아버지 앞에서도 떨지 않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마법사는 안 돼."
여신이 말했다.
"너한테는 그 그릇이 없어. 대신 다른 걸 줄게."
그릇이 없다는 말이 이상하게 아팠다.
마치 태어날 때부터 실격 판정을 받은 것 같았다.
싸구려 주식처럼, 처음부터 오를 가능성이 없다고 낙인찍힌 기분이었다.
손끝에서 빛이 일었다.
하얀 검 한 자루가 허공에 떠올랐다.
검은 빛을 내면서도 눈이 부시지 않았다.
자루는 단순했고, 검신은 아무 장식도 없었다.
그런데 보고 있는 것만으로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검성(劍聖)."
여신이 말했다.
"검을 쓰는 자들 중 가장 위에 있는 힘. 이걸로 너는 살 수 있어."
"저는 검을 배운 적이 없어요."
"배울 필요 없어."
여신이 말했다.
"이건 재능이 아니라 매입이니까. 내가 이미 사서 너한테 넣어주는 거야."
매입이라는 말이 이상하게 귀에 걸렸다.
마치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것처럼, 이 여신은 사람의 목숨과 힘을 그렇게 다뤘다.
주식을 매입하듯, 힘을 매입해서 나에게 이식한다는 말.
그 말투에 소름이 돋았다.
"싫다고 하면요."
"그럼 오늘 밤에 죽어."
여신이 대답했다.
"선택은 네가 하는 게 아니야. 이미 시장은 열렸고, 매물은 너 하나뿐이야."
숨이 막혔다.
매물이라니.
내가 매물이라는 말이 귓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제가 뭘 잃는데요."
"모르는 채로 받는 게 계약 조건이야."
여신이 말했다.
"알고 싶으면, 나중에 알게 될 거야. 그때는 이미 늦었겠지만."
손이 떨렸다.
대가를 모르는 계약이 얼마나 위험한지, 전생의 기억 어딘가에서 배운 적이 있었다.
주식 시장에서도, 조건 없는 계약서에는 절대 사인하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도 지금은 그 지식이 아무 힘도 되지 못했다.
여신은 기다리지 않았다.
검이 조금씩 흐려지고 있었다.
마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려주는 것처럼.
"몇 초 남았는지 궁금해?"
여신이 물었다.
"알려줄까?"
"아니요."
"그럼 빨리 결정해."
"싫어요."
"그래?"
여신이 처음으로 웃었다.
웃음에도 온도가 없었다.
입꼬리만 살짝 올라갔을 뿐, 눈은 여전히 흐릿했다.
"그럼 이 어둠 속에서 그냥 죽든가."
검이 점점 흐릿해졌다.
동시에 하얀 공간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마치 문이 닫히는 것처럼.
공간의 경계가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머릿속으로 여러 장면이 스쳤다.
아버지가 허리띠를 휘두르던 손.
어머니가 나를 감싸며 등을 내주던 모습.
그리고 전생, 마지막으로 봤던 계좌 잔고.
0.
그 숫자가 지금 이 순간과 겹쳐졌다.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괜찮아, 서하야. 엄마가 어떻게든 할게.
그 말이 아직도 귓가에 남아 있었다.
목소리는 작았지만, 그 안에 담긴 다급함은 선명했다.
살고 싶었다.
어머니를 다시 보고 싶었다.
그것 말고는, 이 순간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할게요."
목소리가 겨우 나왔다.
입이 마른 것처럼 갈라졌다.
"잘 생각했어."
여신의 목소리에는 기쁨도, 안도도 없었다.
그냥 거래가 성사되었다는 사실만 있었다.
마치 거래 체결 알림음 같았다.
검이 내 손으로 빨려들어왔다.
손바닥이 뜨거워졌다.
뜨겁다기보다는, 무언가가 살 속으로 파고드는 감각이었다.
뼈까지 스며드는 것 같은 이물감.
"이제 눈을 뜨면 현실이야."
여신이 말했다.
"거기서부터는 네가 알아서 해."
"대가는."
"나중에."
그 말이 마지막이었다.
하얀 공간이 완전히 무너졌다.
눈을 떴다.
등이 다시 아팠다.
대전의 바닥이 차가웠다.
등을 타고 흐르는 통증이 다시 현실감을 되돌려줬다.
아, 살아 있구나.
그 생각이 먼저 들었다.
주변은 어두웠다.
밤이 된 모양이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에는 별도 보이지 않았다.
"서하야."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작고 다급했다.
눈을 돌렸다.
어머니가 나를 안고 있었다.
옷은 흙투성이였고, 뺨에는 시퍼런 멍이 들어 있었다.
아버지가 어머니한테도 손을 댔다는 걸, 그 멍을 보고 알았다.
"엄마, 우리 지금 나가야 해."
어머니가 나를 안아 올렸다.
팔이 떨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힘을 다해 나를 붙잡았다.
대전 뒤쪽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그 문 너머로 어둠이 보였다.
"아버님이 눈치채면."
"눈치채기 전에 가야 해."
어머니가 발소리를 죽이며 걸었다.
발걸음 하나마다 신경이 곤두서 있는 게 느껴졌다.
나는 어머니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손바닥이 여전히 뜨거웠다.
검성이라는 힘이 정말 내 안에 들어온 건지, 확인할 시간도 없었다.
뒷문을 지나 정원을 가로질렀다.
달빛이 없어서 사방이 캄캄했다.
발밑의 돌바닥이 차가웠고, 밤공기가 살을 파고들었다.
"조금만 더 가면 숲 입구야."
어머니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숲 너머에는 소하리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고, 어머니는 예전에 지나가듯 말한 적이 있었다.
그곳까지만 가면, 아버지의 손이 닿지 않는다고 했다.
그 말을 붙잡고 어머니는 지금 뛰고 있었다.
정원을 지나는 동안, 나뭇가지가 어머니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어머니는 멈추지 않고 그대로 뜯어냈다.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졌다.
심장 뛰는 소리가 내 귀에도 들릴 정도였다.
정원 끝, 담벼락에 다다랐을 때였다.
담을 넘기 위해 어머니가 나를 살짝 내려놓았다.
그 짧은 순간, 등 뒤에서 빛이 번쩍였다.
뒤에서 횃불이 흔들렸다.
"거기 서라!"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어머니의 몸이 굳었다.
등 뒤로 병사들의 발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발소리는 하나가 아니었다.
여럿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