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샹들리에 불빛이 대연회장의 대리석 바닥 위로 부서져 내리던 밤, 해동귀족학교 졸업생들을 위한 사교 무도회는 그해 가장 화려한 행사로 손꼽혔고, 강도현은 그 화려함 속에서 유독 심장이 뻐근하게 뛰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수백 개의 촛불이 천장에 매달린 크리스털 장식마다 부딪혀 무수한 빛의 조각으로 흩어졌고, 악단의 현악 선율이 대리석 기둥 사이를 타고 흐르며 사람들의 웅성거림과 뒤섞여 어우러졌으며, 각 가문의 문양을 새긴 예복을 입은 귀족 자제들이 삼삼오오 모여 서로의 앞날을 축하하는 말들을 주고받고 있었는데, 도현은 그 모든 소음 속에서도 오직 한 사람의 위치만을 신경 쓰고 있었다.
열아홉이 된 그의 손에는 작은 벨벳 케이스가 쥐어져 있었고, 그 안에는 어머니가 남긴 마지막 유품인 사파이어 반지가 촛불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는데, 그는 이 순간을 위해 무려 이 년을 준비해왔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마른 입술을 축였다.
그 반지는 도현이 열일곱이 되던 해, 병상에 누워 있던 어머니가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그의 손에 쥐여준 것이었고, '언젠가 네 마음을 다 줄 수 있는 사람에게……' 라는 말을 끝으로 눈을 감으셨다는 기억이 지금 이 순간에도 도현의 가슴 한켠을 뻐근하게 짓눌러왔으며, 그렇기에 이 반지를 서지아의 손에 끼워주는 것이야말로 어머니의 유언을 지키는 일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였다.
서지아는 그의 유년기 전체를 함께한 사람이었고, 양가 부모가 어린 시절부터 맺어준 정혼자였으며, 학창 시절 내내 그녀의 미모는 해동귀족학교를 넘어 사교계 전체에 회자될 정도였기에, 도현은 그녀 앞에서 무릎을 꿇는 이 장면이야말로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완벽한 순간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늦가을 오후의 볕을 그대로 엮어놓은 듯한 금빛이었고, 눈동자는 봄날 새순이 돋아나기 전의 여린 갈색을 닮아 있었으며, 웃을 때마다 드러나는 입가의 얕은 보조개는 도현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풍경이었다는 사실을, 그는 케이스를 쥔 손에 힘을 주며 다시 한번 되새겼다.
해동귀족학교의 관례에 따르면, 졸업 무도회는 단순한 사교 행사가 아니라 각 가문의 후계자들이 정식으로 성인 사회에 발을 들이는 의식과도 같은 자리였고, 그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청혼은 가문 간의 약속을 대외적으로 공표하는 절차이기도 했기에, 도현이 오늘 이 자리를 선택한 것은 결코 즉흥적인 결정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오랜 시간 서지아와 상의하고 그녀의 동의를 얻어 마련한 무대였다는 사실이 그의 확신을 더욱 굳건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연회장 한가운데,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두 사람에게 모여드는 그 자리에서 도현은 천천히 무릎을 굽혔고, 케이스를 열어 반지를 내밀며 목소리를 가다듬어 말했다.
"지아야, 나와 결혼해줘."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몇 번이나 연습했음에도, 정작 그 순간이 되니 마지막 음절이 미세하게 갈라져 나왔다는 사실을 도현은 뒤늦게 깨달았지만, 이미 뱉어버린 말을 주워담을 방법은 없었다.
짤막한 정적이 흘렀고, 그 정적이 너무 길게 이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도현의 등줄기로 서늘한 예감이 스쳐 지나갔는데, 그것은 마치 폭풍이 몰아치기 직전의 고요함과 닮아 있었다.
연회장을 가득 채우던 현악 선율마저 어느 순간 멈춘 듯 느껴졌고, 수십 개의 시선이 자신의 정수리 위로 내려앉는 감각을 도현은 온몸으로 견뎌내고 있었다.
찰싹.
서지아의 손이 그의 손목을 세차게 내려친 소리가 연회장에 낮게 울려 퍼졌고, 도현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손목에 남은 얼얼한 통증이 뒤늦게 밀려왔지만, 그보다 더 아픈 것은 지금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녀의 눈빛이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언제나 그를 바라볼 때 따뜻한 갈색이었는데, 지금은 마치 얼어붙은 호수처럼 차갑게 굳어 있었고, 입술 끝에는 낯설도록 냉소적인 미소가 걸려 있었다.
"도현아, 우리가 언제 그런 약속을 한 적 있었니?"
비웃음 섞인 물음에 도현은 무릎을 꿇은 채로 굳어버렸고, 주변에서 술렁이는 소리가 점점 커지는 것을 느꼈지만 정작 그의 머릿속은 하얗게 비어버린 상태였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그녀는 그의 손을 잡고 웃어주었고, 편지에는 늘 다정한 말들이 담겨 있었으며, 오늘 이 자리를 마련하자고 먼저 제안한 것도 서지아 본인이었다는 사실이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게 헤집었다.
바로 어제, 정원의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던 서지아는 도현의 어깨에 살며시 머리를 기대며 "내일 무도회에서 특별한 순간이 있었으면 좋겠어"라고 속삭였고, 그 말을 들은 도현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이 반지를 몇 번이고 케이스에서 꺼내 확인했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지금 눈앞의 상황이 도무지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왜…… 도대체 왜.'
그때, 서지아의 뒤편에서 누군가 천천히 걸어 나왔고, 그 사람이 그녀의 어깨를 자연스럽게 감싸 안는 모습을 본 순간 도현은 숨을 삼키고 말았다.
한도윤이었다.
백작가의 후계자로, 학창 시절부터 그 미모와 화려한 스캔들로 이름을 날리던 남자가 서지아의 허리에 손을 얹은 채 도현을 내려다보며 조소를 흘렸다.
그의 검은 머리카락은 밤하늘을 그대로 잘라낸 듯 짙었고,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빛은 사람을 내려다보는 데에 익숙한 자의 것이었으며, 입가에 걸린 미소는 상대를 조롱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정교하게 비틀려 있었다는 사실이, 도현으로 하여금 이 모든 상황이 이미 오래전부터 계획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을 불러일으켰다.
"강 자작, 이런 자리에서 이런 실수를 하면 곤란하지 않겠나."
한도윤의 목소리에는 조롱을 넘어선 여유가 배어 있었고, 그 여유는 마치 이미 승부가 끝난 게임을 관전하는 자의 태도와 닮아 있었다는 사실을 도현은 뒤늦게 깨달았다.
도현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고, 그는 여전히 케이스를 쥔 채로 서지아를 올려다보며 겨우 목소리를 짜냈다.
"지아야, 이게…… 무슨 말이야."
목소리는 이미 갈라져 있었고, 무릎을 꿇은 자세로 케이스를 든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그는 멈추고 싶었지만 멈출 수 없었다.
서지아는 도현의 손목을 뿌리친 채 한도윤의 팔에 자신의 손을 얹었고, 그 동작이 마치 오래전부터 반복해온 습관처럼 자연스러웠다는 사실이 도현의 가슴을 더욱 서늘하게 만들었다.
주변에서 누군가 낮게 속닥이는 소리가 들려왔고, "강 자작이 정말 몰랐던 걸까"라는 말이 도현의 귓가에 날카롭게 박혀들었지만, 정작 그 말의 의미를 곱씹을 여유조차 그에게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니…… 반드시 이유를 들어야 해.'
도현은 무릎을 꿇은 채로도 시선을 거두지 않았고, 서지아의 표정 어딘가에서 예전의 그녀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실낱같은 희망을 붙잡고 있었지만, 그런 흔적은 이미 그녀의 얼굴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의 다음 말이 연회장 전체를 얼어붙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