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나는 이미 한도윤 님의 사람이야."
서지아의 그 한마디가 연회장 안을 순식간에 잠식했고, 촛불이 흔들릴 때마다 그림자가 넘실거리는 벽면을 배경으로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파도처럼 퍼져나갔지만, 도현의 세계는 그 순간 완전히 정지해버린 것만 같았다.
수백 개의 촛불이 매달린 샹들리에가 머리 위에서 반짝였고, 그 빛을 받아 서지아의 은빛 드레스가 눈부시게 빛났지만, 지금 도현의 눈에는 그 빛조차 원망스럽게만 느껴졌으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웃음 하나에 온 세상이 다 밝아지는 것 같았던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뒤늦게야 깨닫는 순간이었다.
무릎을 꿇은 채로 굳어버린 그의 시야 속에서 서지아와 한도윤의 모습은 점점 흐릿하게 번져갔고, 대신 그의 머릿속에는 낡은 저택의 복도가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열다섯 살의 도현이 부모님의 관 앞에서 무릎을 꿇었던 그날, 산악 지대의 험한 길목에서 마차가 굴러떨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이른 새벽이었고, 그는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 영지의 모든 서류에 자신의 이름으로 서명을 해야 했다.
그날의 하늘은 지금 이 연회장의 샹들리에보다도 더 눈부시게 맑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청명한 하늘 아래 부모의 관을 묻으며 도현은 처음으로 세상이 얼마나 잔인하게 완벽할 수 있는지를 배웠고, 그 뒤로는 하늘이 맑을수록 오히려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버릇이 생겼을 정도였다.
어린 자작이 무엇을 할 수 있느냐며 뒤에서 수군거리던 늙은 가신들의 시선을 견디며, 그는 영지의 재정을 파악하는 법도, 병사들을 다루는 법도 모두 홀로 배워야 했는데, 그 외로움은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밤마다 서류더미에 파묻혀 촛불이 다 타들어 갈 때까지 숫자를 헤아리던 그 시절, 손끝이 갈라지고 눈이 시큰거려도 누구 하나 걱정해주는 이가 없었으니, 도현은 그때부터 스스로에게 다짐했었다.
'반드시…… 누구도 나를 무시하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그 다짐 하나로 버텨온 세월이었는데, 열일곱이 되던 해에는 왕국의 부름을 받아 종군까지 해야 했으니, 어린 나이에 전장의 흙먼지와 피비린내를 맡으며 살아 돌아온 것이 그의 유일한 자랑거리였다.
전장에서의 첫날 밤, 하늘을 뒤덮은 화살비 속에서 도현은 자신이 죽는구나 생각했었고, 그 순간 누군가의 억센 손이 그의 뒷목을 잡아채어 참호 아래로 끌어내렸는데, 그 손의 주인이 훗날 대장군이라 불리게 될 은인이었다.
"이런 곳에서 죽기엔 너무 아까운 목숨이지 않느냐."
그가 그때 웃으며 던진 그 한마디가, 지금까지도 도현의 가슴 깊이 새겨져 있었으니, 그가 전장에서 도현의 목숨을 두 번이나 구해주었다는 사실은 도현에게 있어 살아 있는 이유이자, 세상에 대한 신뢰를 그나마 붙잡아 둘 수 있게 한 유일한 끈이었다.
그렇게 홀로 모든 것을 짊어지고 살아온 도현에게, 서지아는 유일하게 변하지 않을 것이라 믿었던 존재였는데.
그녀의 웃음소리가 처음 그의 귀에 들어왔던 날부터, 도현은 그녀야말로 자신이 그토록 지켜온 것들을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 믿어왔었고, 서지아가 건네주던 작은 손편지 한 장에도 하루 종일 마음이 놓였던 시절이 분명 있었는데.
'그런데 왜…… 도대체 왜.'
의문이 가슴을 파고드는 순간, 현실의 소리가 다시 그의 귀로 밀려들었다.
딸그락.
누군가 떨어뜨린 술잔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정적을 갈랐고, 그 소리에 놀란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이쪽으로 쏠렸다.
"강 자작, 정신이 없어 보이는데, 그만 일어나시지."
한도윤의 비웃음 섞인 목소리가 그를 회상에서 끌어내렸고, 도현은 천천히 무릎을 펴며 자리에서 일어섰지만 다리가 후들거려 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한도윤의 얼굴에는 승자의 여유가 넘쳤는데, 잘 정돈된 검은 머리카락 아래로 드러난 눈매는 마치 가을 하늘처럼 차갑고 서늘했으며, 그 시선이 지금 도현을 훑어 내리는 모양새가 마치 벌레를 관찰하는 것과 같아서, 도현은 그 눈빛 하나에도 온몸의 피가 다 얼어붙는 듯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서지아는 이제 그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한도윤의 팔에 매달려 다른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고, 그 뒷모습이 점점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도현은 손에 쥔 반지 케이스가 부서질 만큼 세게 쥐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다.
그 케이스 안에는 지난 석 달간 도현이 밤낮없이 영지의 재정을 아껴 마련한 반지가 들어 있었으니, 서지아가 좋아한다던 진주를 구하기 위해 상단 세 곳을 돌아다녔던 기억이 아직도 손끝에 생생한데, 이제 그 반지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차가운 금속 조각으로 변해버리고 만 셈이었다.
그때,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한 중년 남자가 다가왔는데, 서지아의 부친이자 서가상회를 운영하는 서정호였다.
그는 도현의 부친과 학창 시절을 함께한 오랜 친구였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지금 그의 얼굴에는 조금의 죄책감도 보이지 않았다.
풍채 좋은 그의 얼굴에는 오히려 만족스러운 미소가 어렴풋이 걸려 있었으니, 도현은 그 미소를 보는 순간 이 모든 일이 처음부터 계획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이고 말았다.
"도현 군, 이해하시게. 세상일이 다 그런 거지."
형식적인 위로의 말을 남긴 채 서정호는 도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는 곧바로 딸의 뒤를 따라 사라졌고, 도현은 그 손길이 남긴 냉기가 오랫동안 어깨에 남아 있는 것만 같은 기분에 몸을 떨었다.
주변에 서 있던 귀족들의 시선이 그의 등 뒤로 따라붙었고, 누군가는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차는 소리를 냈으며, 또 누군가는 낮게 킥킥거리는 웃음소리를 감추지도 않았는데, 그 모든 소리가 도현의 귓가에서 뒤섞여 마치 벌 떼가 윙윙거리는 것처럼 들려왔다.
'반드시…… 이 굴욕을 잊지 않을 것이다.'
속으로 되뇌었지만, 그 다짐이 정작 무엇을 향해야 하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로, 그는 텅 빈 연회장을 홀로 걸어 나와야 했다.
연회장을 빠져나오는 그 짧은 복도가 그렇게 길게 느껴진 적이 없었으니,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등 뒤에서 쏟아지는 시선들이 마치 칼날처럼 그의 등에 박히는 것 같았고, 도현은 그 시선들을 견디며 오로지 앞만 보고 걸어야 했다.
시종이 그의 외투를 건네주었을 때조차 도현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는데, 그 떨림을 감추기 위해 그는 애써 외투 자락을 힘껏 그러쥐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도현은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불빛들을 멍하니 바라보았고, 마차 바퀴가 돌 위를 지날 때마다 덜컹거리는 소리가 그의 가슴속에서 무너져 내리는 무언가와 함께 울려 퍼지는 듯했다.
덜컹, 덜컹.
바퀴가 흔들릴 때마다 반지 케이스도 그의 손안에서 함께 흔들렸고, 도현은 그 케이스를 열어볼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창밖의 어둠 속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녀는 도대체 언제부터…… 아니, 왜 나는 그것조차 눈치채지 못했던 걸까.'
수많은 의문들이 머릿속에서 뒤엉켰지만 어느 하나도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했고, 도현은 그저 눈을 감은 채 마차의 흔들림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며칠 뒤 그의 저택 대문 앞으로 낯선 관리들이 서류를 들고 찾아오리라는 사실은, 그때까지도 그는 전혀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