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샘가에 짓는 낙원

2화

태오는 눈을 떴다. 주변은 온통 하얬다. 바닥도 하늘도 구분이 안 됐다. 발밑에서 찰랑, 물소리가 났다. 고개를 내려보니 발목까지 물이 차 있었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이상하게 무감각한 물이었다. 그리고 그 물 위에, 소녀가 서 있었다. 물빛의 머리카락, 하얀 옷. 피부까지 하얗다. 눈동자도 머리카락과 같은 물빛이었다. 소녀는 태오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눈동자가 물결처럼 흔들렸다. 방금 전까지 지하철에 치여 죽었던 걸 생각하면, 이 상황이 오히려 담담하게 느껴졌다. “내 이름은 소하.” “강태오입니다.” 태오는 얼떨결에 목례를 했다. 죽어서도 인사는 하는구나. 습관이란 게 참 무섭다. “당신은 특별한 죽음을 맞았어.” 소하가 말했다. “특별한 게 아니라 그냥 재수가 없었던 거죠.” 태오가 바로 받아쳤다. 야근 끝나고 집 가는 길에 지하철에서 사고를 당한 게 무슨 특별한 죽음이란 말인가. 그냥 운이 없었다. 그게 전부다. 소하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당신 같은 반응은 오랜만이네.” “다른 사람들은 어떤 반응이었는데요.” “대부분 울거나, 화를 내거나, 도망치려 했지.” “여기서 도망칠 데가 있어요?” 태오가 주위를 둘러봤다. 사방이 하얀 물뿐이었다. 도망칠 곳이 없어 보였다. [세계선 붕괴 경보 발생] [다수의 세계에서 유사 사건 다발 관측] 태오는 눈앞에 뜬 문구를 다시 읽었다. 다수의 세계라니. 게임 로딩 화면도 아니고, 죽자마자 이런 게 뜨는 게 정상인가. “이거 저만 죽은 게 아니라는 뜻이에요?” “그래. 지금 이 순간, 수십 개의 세계에서 균열이 열리고 있어.” 소하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내 세계도 그중 하나야.” “균열이라는 게 정확히 뭔데요?” 태오가 물었다. “세계와 세계 사이의 벽이 무너지는 현상.” “벽이 무너지면요?” “존재해선 안 되는 것들이 넘어와.” 소하의 표정이 처음으로 굳었다. 태오는 팔짱을 꼈다. 생각보다 스케일이 크다. 죽음이 개인 사고가 아니라 세계 단위 사건이라니. 이거 뭔가 잘못 걸린 것 같은데.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들어보긴 해야겠다. “그래서 저를 왜 부른 겁니까.” “계약을 하고 싶어서.” 소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계약이요?” “내 샘을 지켜줄 사람이 필요해.” “왜 저예요?” “당신이 죽는 순간, 균열이 가장 가까이 있었어.” “그게 이유예요?” “그리고 반응이 마음에 들었어.” 소하가 태연하게 덧붙였다. [퀘스트 알림] [샘의 여신 소하가 계약을 제안합니다] [수락 시 이세계 전생, 특전 스킬 지급] 태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거 완전 게임이네. 알림창까지 뜨는 거 보니 확실하다. “조건이 뭔데요.” “내 샘 주변에, 낙원을 만들어줘.” “낙원이요?” “정원이라고 해도 되겠네.” 소하가 웃었다. 그 웃음이 이상하게 자신 있었다. “규모가 어느 정도예요?” “당신이 만드는 만큼.” “그런 식으로 대답하면 답이 없잖아요.” “그래서 재밌는 거야.” 소하가 어깨를 살짝 들썩였다. 태오는 잠깐 침묵했다. 낙원 건설이라니, 규모가 너무 큰데. 근데 이대로 죽는 것보단 낫지 않나. 어차피 이번 생은 끝났다. 밑져야 본전이다. “보상은요?” “살고 싶었던 대로 살 수 있어.” 소하가 대답했다. “내가 원하는 삶으로?” “당신이 원했던 삶, 알고 있어.” 태오는 그 말에 잠깐 멈칫했다. 전원생활, 손으로 뭔가 만드는 취미, 야근 없는 하루. 그런 걸 어떻게 알지. “당신, 내 기억을 봤어요?” “계약 전 확인은 당연한 절차야.” 소하는 태연했다. “그럼 제 인생도 다 봤겠네요.” “대충은.” “대충이라는 말이 제일 무섭네요.” 태오가 중얼거렸다. [계약 조건: 상호 계약] [여신 소하는 계약자에게 특전을 지급하고, 계약자는 여신에게 낙원을 헌납한다] “상호 계약이라, 그럼 저도 뭘 요구할 수 있는 거네요.” 태오가 슬쩍 물었다. “맞아. 당신도 원하는 걸 말해.” 태오는 잠깐 생각했다. 이런 기회는 두 번 안 온다. 따질 건 따져야 한다. “싸우는 건 별로예요. 몸으로 부딪히는 거, 딱 질색이거든요.” “전투는 안 시킬게.” “음식은 제대로 먹고 싶고요.” “샘물이 있으니 걱정 마.” “그게 밥이 되는 건 아니잖아요.” “먹어보면 알아.” 소하가 자신 있게 말했다. “그리고, 야근 없는 삶.” “그건 인간 세상에나 있는 거 아니야?” “여신님 세계에도 야근이 있어요?” “없길 바라야지.” 소하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내가 보장할 수 있어.” 태오는 그 대답에 처음으로 마음이 놓였다. 계약서도 없고 도장도 없지만, 이상하게 믿음이 갔다. 죽기 전보다 더 확실한 약속 같았다. 서면 계약서보다 이게 더 낫다는 게 웃긴 일이었지만. “하나만 더.” 소하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췄다. “앞으로 벌어질 일, 조금 미리 말해줄게.” [여신 소하가 미래의 정보를 공유합니다] 태오의 눈이 커졌다. 미래를 알려준다고? 이런 특혜가 있나. 계약서 한 줄 없이 이렇게 퍼주는 거 보니 뭔가 더 있는 것 같은데. “당신이 도착할 세계에는, 지금 어떤 존재가 봉인되어 있어.” 소하의 목소리가 진지해졌다. “그 존재를 풀어주는 사람이, 세계의 균형을 좌우하게 될 거야.” “그게 저예요?” “그럴 확률이 높아.” “높다는 게 몇 퍼센트예요?” “그건 나도 몰라.” “모르면서 왜 말해준 거예요.” “알아야 대비할 수 있으니까.” 태오는 뭔가 찜찜했다. 확률이 높다는 건 확정이 아니라는 뜻이다. 근데 다른 도리도 없다. 이미 죽은 몸으로 여기까지 왔는데, 여기서 발 빼면 갈 곳이 없다. “계약할게요.” 태오가 대답했다. 죽은 사람한테 선택권이 그렇게 많지도 않았다. [계약이 체결되었습니다] [강태오는 여신 소하의 유일한 계약자가 되었습니다] 촤아아아. 물소리가 사방에서 울렸다. 태오의 몸이 빛에 감싸였다. 발밑의 물이 소용돌이치며 위로 솟구쳤다. “기다려, 어떻게 생겼는지도 안 알려줬잖아요, 그 존재.” 태오가 급히 물었다. 빛이 점점 강해지며 시야가 흐려졌다. 소하의 형체가 서서히 물결 속으로 사라져갔다. “가면 알게 될 거야.” 소하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그런 대답 진짜 싫어하는데.” 태오가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말이 끝으로, 시야가 완전히 하얗게 변했다. 빛이 눈을 찌르고, 물소리가 귓속을 가득 채웠다.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순간, 태오는 문득 그 미소가 조금 걸린다고 생각했다. 너무 태연한 웃음이었다. 계약서에 적히지 않은 뭔가가, 분명히 더 있는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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