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무표정 용사님의 폭주 순정

2화

"안 돼." 라는 그 짧은 말 이후로, 서윤은 한참을 말없이 도윤을 바라보기만 했다. 방 안의 촛불이 그녀의 붉은 눈동자에 비쳐 흔들리는 모습이 마치 안개 속에서 타오르는 작은 불씨 같았는데, 그 불씨가 꺼질 듯 말 듯 일렁이는 걸 지켜보고 있자니 도윤은 괜히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서윤의 은빛 머리카락이 촛불 빛을 받아 마치 세필로 그은 붓 자국처럼 결결이 반짝였고, 그 아래로 드리운 표정은 여전히 조각처럼 미동이 없었지만, 도윤은 그 무표정 안에 숨겨진 무언가가 자신을 향해 쏟아지고 있다는 걸 어렴풋이 느꼈다. 그 시선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슬그머니 눈을 피했는데, 왜인지 그 짧은 순간이 몇 분처럼 길게 느껴졌다. "서윤아, 도윤이 결정도 존중해줘야지." 정훈이 중재하듯 끼어들며 서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대신, 그냥 이 자리에서 확정할 일은 아니잖아. 국선 파티 탈퇴는 절차도 복잡하고." "맞아요." 수아도 재빨리 맞장구를 쳤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도윤과 서윤을 번갈아 쳐다보았는데, 그 표정이 마치 눈싸움을 지켜보는 심판 같아서 도윤은 저도 모르게 헛기침을 했다. "길드에 신청서 넣고, 심사받고…… 최소 한 달은 걸릴 텐데, 그동안 도윤이가 마음을 바꿀 수도 있고요." "한 달이나요?" 도윤이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그렇게 오래 걸려요?" "국선 파티는 특수 케이스라서." 정훈이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설명을 이어갔다. "왕실 승인, 길드 확인, 대체 인력 배치 심사까지 거쳐야 하거든. 어지간한 용병단 탈퇴랑은 다르지." 도윤은 그 말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당장 짐을 싸서 나가야 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이 그나마 다행스러웠는데, 동시에 이런 식으로 시간을 끌면 자신의 결심이 흔들릴까 봐 조금 두렵기도 했다. 이 자식들, 나 회유하려는 거 다 티 나는데……. 한 달이라는 시간이 마치 그를 붙잡아두려는 보이지 않는 그물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 그물이 그렇게까지 싫지만은 않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낯설었다. "그럼……" 도윤이 조심스레 입을 뗐다. "일단은, 정식 탈퇴 서류가 처리될 때까지는 계속 파티에 있는 걸로." "그래." 정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도윤의 어깨를 툭 치는데, 그 손길이 마치 안심하라는 듬직한 위로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 한 달 동안, 우리가 얼마나 잘해주는지도 좀 봐줘라. 사람 마음이라는 게 또 어떻게 바뀔지 모르잖냐." "그런 뇌물성 친절은 사양이에요." 도윤이 픽 웃으며 손을 저었지만, 정훈은 이미 못 들은 척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서윤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시선이 도윤의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는 걸 그는 눈치채지 못했다. 서윤이 그를 그렇게 바라보는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으니까, 도윤은 그저 익숙한 무표정의 연장선쯤이라 여겼을 뿐이었다. 촛불이 다 타들어갈 때까지도 그 시선은 거두어지지 않았지만, 정작 시선의 주인만이 그 무게를 가장 가볍게 흘려보내고 있었다. * * * 다음 날 아침, 도윤은 평소처럼 부엌에서 감자를 깎고 있었다. 창문 틈으로 들어온 아침 햇살이 도마 위에 얇게 깔리고, 그 위로 감자 껍질이 나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소리가 사각사각 규칙적으로 울렸는데, 그 소리에 맞춰 도윤의 마음도 조금씩 차분해지던 참이었다. 뒤에서 서윤이 조용히 다가와 그의 옆에 섰다. 은빛 비단결 같은 머리카락이 어깨 위로 흘러내리는 걸 도윤은 슬쩍 곁눈질로 보았고, 서윤은 감자칼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물었다. "그거, 나도 할 수 있어?" "어, 어…… 그냥 껍질 벗기는 건데." 도윤이 감자칼을 건네주며 시범을 보였다. "이렇게, 살살. 힘을 많이 주면 안 돼." 서윤은 그 동작을 뚫어지게 관찰하더니, 마치 검술 초식을 외우듯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그 모습이 어쩐지 진지해서, 도윤은 이게 감자 깎기 시범인지 검술 사사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살살." 서윤이 중얼거리듯 따라 말하며 감자를 받아 쥐었다. 그 커다란 손 안에서 감자가 유난히 작아 보였는데, 도윤은 그 손이 얼마 전까지 성검을 휘둘러 마수의 목을 베던 손이라는 사실이 문득 떠올라 묘한 기분이 들었다. 서윤은 진지한 얼굴로 시도했는데, 다음 순간 감자가 두 조각으로 쩍, 갈라지며 반대편 벽까지 튕겨 날아갔다. 우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감자 한쪽이 냄비 뚜껑을 맞고 튕겨 나가 바닥을 굴렀고, 도윤은 헛웃음을 삼키며 서윤을 바라보았다. "……힘을 그렇게 세게 주면 안 되는데." "몰랐어." 서윤은 태연하게 대답했지만, 도윤이 보기엔 그 무표정 아래로 살짝 당황한 기색이 스치는 것 같았다. 그녀는 남은 감자 반쪽을 손에 쥐고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다시 도전이라도 하려는 듯 감자칼을 고쳐 잡았다. "자, 잠깐." 도윤이 얼른 그 손을 붙잡아 말렸다. "일단 이건 내가 치울게. 감자가 부족해지면 오늘 저녁은 감자수프 대신 감자죽 먹어야 하니까." 성검에 선택된 용사가 감자 하나를 못 깎아서 저러는 게, 왠지 우습기도 하고 짠하기도 해서, 도윤은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세상을 구하러 온 용사가 부엌 앞에서 이렇게 무력해질 수 있다는 게, 어쩌면 이 여행에서 가장 신선한 발견일지도 몰랐다. "내가 할게. 서윤이는 그냥 앉아 있어." "싫어." 서윤이 즉답했다. "같이 할래." "그, 그래도……." 도윤이 말을 얼버무리며 바닥에 떨어진 감자 조각을 주섬주섬 주워 올렸다. "칼질은 위험하니까, 서윤이는 그냥 감자 씻는 것부터 하는 게 어때?" "그것도 할 수 있어." 서윤은 마치 도전을 받은 것처럼 눈을 살짝 좁히며 대답했고, 도윤은 그 사소한 승부욕이 어쩐지 귀엽다고 생각하다가, 아니 이게 무슨 생각이야, 하고 속으로 스스로를 다그쳤다. 그 말에 도윤은 왜인지 귀가 화끈거리는 걸 느꼈는데, 정확히 명명할 수 없는 그 감정을 애써 무시하며 다시 감자칼을 건넸다. 서윤은 이번엔 조심스레, 정말로 살살, 감자 표면을 긁어내기 시작했고, 어설프지만 조금씩 나아지는 그 손놀림을 지켜보며 도윤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부엌 창밖으로는 새들이 지저귀고, 화로 위 냄비에서는 물이 서서히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소소한 하루가, 탈퇴를 앞둔 그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어쩐지 이 시간이 조금 더 길게 이어졌으면 싶었다. 감자 껍질이 하나둘 쌓여가는 도마 위로, 서윤의 시선이 다시 한번 조용히 도윤을 향했지만, 이번에도 그는 그 시선의 무게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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