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탁한 마석의 마도공학자

3화

부품을 뜯어보기 시작한 건 그날 밤부터였다. 공방 한구석, 최달수 어르신이 내어준 작업대에 낡은 등불 하나를 밝혀놓고, 청동 외피를 하나씩 분해했으며, 마석 코어를 감싸는 회로판이 드러나기까지는 세 시간이 걸렸다. 나사 하나를 풀 때마다 손가락 끝이 저릿했다. 이 세계의 나사는 전생의 것과 규격이 달라서, 맞는 드라이버를 찾는 것조차 일이었다. 결국 손에 익은 드라이버 세 개를 번갈아 쓰며 겨우 외피를 벗겨냈다. 손끝이 기름과 먼지로 새까매졌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전생의 나는 이런 밤을 수백 번 넘게 보냈다. 공장 기계가 이유 없이 멈춰서, 발주처와의 계약 마감이 다가오는데, 밤을 새워가며 회로도를 뒤지고 부품을 뜯어보던 그 시절의 감각이 몸에 그대로 남아 있었으며, 그 감각이 지금 이 이상한 세계에서도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게 스스로도 신기했다. 그때는 커피 대신 자판기 밀크티였고, 지금은 등불 옆에 놓인 미지근한 물 한 잔뿐이라는 게 다를까. 씁쓸하게 웃음이 났다. 회로판을 들여다보자, 예상대로 여과 구조가 지나치게 단순했다. 마석에서 발생하는 마력을 코어로 흘려보내는 통로가 하나뿐이었고, 그 통로에 불순물이 쌓이면 전체 흐름이 막히는 구조였다. 손가락으로 통로를 따라가며, 머릿속으로는 이미 전생의 도면을 겹쳐 그리고 있었다. 전생 세계의 유압 시스템과 비교하면, 이건 필터 하나로 모든 걸 걸러내려다 필터가 터져버리는 구조와 똑같았다. 현장에서 흔히 보던 실수였다. 원가를 아끼려고 필터를 하나만 쓰다가, 결국 라인 전체가 멈춰서 하루 손해가 필터 값의 백 배가 나던 그 광경이, 지금 이 마도구 안에서 똑같이 재현되고 있었다. "필터를 두 개로 나누면..." 혼잣말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하나는 굵은 불순물을 걸러내는 예비 필터, 다른 하나는 순도 높은 흐름만 통과시키는 정밀 필터. 두 단계로 나누면 부하가 분산될 것이고, 저순도 마석이라도 코어를 태워먹지 않고 안정적으로 작동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론상으로는 그랬다. 하지만 이론과 실제는 다르다는 걸, 전생의 나는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도면대로 완벽하게 작동한 기계는 단 한 번도 없었다. 항상 어딘가 어긋났고, 항상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졌다. 그래도 시도조차 안 하는 것보다는, 시도하고 실패하는 게 나았다. 전생에서도 그랬고, 지금도 그럴 것이다. 밤이 깊도록 나는 회로판을 스케치했다. 낡은 종이 위에 예비 필터와 정밀 필터의 위치, 그 사이를 연결할 통로의 굵기까지 세세하게 그려 넣었다. 손목이 아파올 무렵, 창밖에서 새벽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설계도를 그려 최달수 어르신을 찾아갔다. 낡은 종이 위에 연필로 그린 도면은 조잡했지만, 핵심 구조는 명확했다. 공방 문을 열고 들어서자, 어르신은 벌써 작업대 앞에서 어제 뜯어놓은 부품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어르신, 이거 보세요." 도면을 내밀자, 어르신의 손이 잠시 멈췄다. 어르신은 도면을 받아들고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오른팔의 흉터가 진 손가락으로 도면 위 회로 부분을 몇 번이나 짚어보며, 얼굴에 복잡한 표정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정적이 길어질수록 내 심장은 점점 빠르게 뛰었다. 혹시 미친 소리로 들렸으려나. 이 세계 사람도 아니면서 이딴 걸 들이대다니, 나 스스로도 가끔 어이가 없었는데. "이건... 왕국 표준 설계와는 전혀 다른데요." "맞아요. 표준을 따르지 않았어요." "어떻게 이런 구조를 생각해내신 겁니까." 결국 이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오늘만큼은 어정쩡한 거짓말로 넘기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얼마나 많은 순간을 얼렁뚱땅 넘겼던가. 파혼당한 날도, 부품 청구서를 처음 받아든 날도, 매번 적당한 말로 상황을 모면해왔다. 하지만 이 사람에게는, 이 흉터 진 손을 가진 사람에게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어르신,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 저는 원래 이 세계 사람이 아니었어요." 최달수 어르신의 눈이 커졌다. "전생이라고 해야 할지, 다른 삶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전에 살던 곳에서는 기계를 만지고 고치는 일을 오래 했어요. 지금 이 부품도, 그때 배운 원리로 뜯어본 거예요." 침묵이 흘렀다. 어르신은 나를 미친 사람 보듯 쳐다볼 수도 있었고, 아예 무시할 수도 있었다. 작업대 위 등불이 흔들리는 소리만 공방 안을 채웠다. 나는 손끝이 저절로 말리는 걸 느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아가씨." 어르신이 낮게 입을 열었다. "저는 삼십 년 넘게 이 공방에서 마도구를 만졌습니다. 그런데 이런 회로는 처음 봅니다." "믿기 힘든 얘기라는 거 알아요." "믿고 안 믿고를 떠나서요." 어르신이 도면을 다시 들었다. "이 설계, 진짜로 작동할 것 같습니다." 뜻밖의 반응이었다. 내가 예상했던 반응은 이런 게 아니었다. 최소한 눈을 흘기거나, "아가씨, 정신이 어떻게 된 거 아닙니까" 같은 말이 나올 줄 알았는데. "어떻게 확신하세요?" "확신은 아니지요. 하지만... 이 여과 구조, 저희가 옛날에 시도했다가 실패한 방식과 비슷한데, 방향이 다릅니다. 저희는 필터를 더 촘촘하게 만들려고 했는데, 아가씨는 단계를 나눴어요." 어르신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흥미가 섞였다. "실패한 방식이 있었다는 거예요?" "그렇습니다. 십 년 전쯤, 저도 젊었을 때 비슷한 시도를 했다가, 결국 마석 자체가 못 견디고 터져서... 이 팔도 그때 그렇게 됐습니다." 어르신이 오른팔을 슬쩍 들어 보였다.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이 사람의 흉터에는 그런 사연이 있었구나. 작업대 위 등불 빛에 흉터 자국이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오래된 화상 자국이었고, 팔을 움직일 때마다 살짝 뻣뻣해 보이는 게 보통 흉터가 아니라는 걸 짐작하게 했다. "그럼 위험할 수도 있는 거네요." "위험합니다. 하지만..." 어르신이 도면을 다시 내려다봤다. "단계를 나눈다는 발상, 저는 못 했습니다. 이거, 시도해볼 가치가 있습니다." "정말요?" "아가씨가 어디서 이런 지식을 얻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르신이 나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실력은 진짜인 것 같습니다. 해봅시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동시에, 뭔가 뜨거운 게 명치 밑에서 확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전생에서도 이런 순간이 있었다. 아무도 믿어주지 않던 아이디어를, 단 한 사람이 믿어주는 순간. 그때는 야근에 지친 팀장님이었다. 다들 무모하다고 손사래 치던 개선안을, 팀장님 혼자 "일단 해보자"고 밀어붙였고, 그 덕분에 라인 하나가 살아났다. 그 한 사람 덕분에 회사가 살아난 적도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이, 그 순간과 겹쳐 보였다. 낡은 공방과 삐걱거리는 작업대, 흉터 진 손을 가진 노인이 팀장님 자리를 대신하고 있을 뿐이었다. "고맙습니다, 어르신." "고맙긴요. 저야말로 이 나이에 새로운 걸 배우게 됐으니 좋지요." 어르신이 처음으로 웃었다. 주름진 얼굴에 잠깐 스친 웃음이었지만, 그 웃음이 나에게는 세상 어떤 계약서보다 확실한 보증서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아가씨." 어르신이 다시 진지한 얼굴로 돌아왔다. "이거, 재료비가 만만치 않을 겁니다. 지금 저희 공방 자금으로는..." 돈 얘기가 나오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파혼 위약금, 부품 청구서, 그리고 이제 시제품 재료비까지. 한꺼번에 몰려드는 숫자들이 머릿속에서 뒤엉켰다. 파혼 위약금은 아직도 절반이나 남아 있었고, 저번에 사들인 부품값 청구서는 다음 주까지 갚아야 했다. 거기에 이번 시제품 재료비까지 더해지면, 이번 달 안에 영지 금고가 텅 비어버릴지도 몰랐다.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릴수록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었다. "방법을 찾아볼게요. 어떻게든." 말은 자신 있게 했지만, 속으로는 이미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었다. 영지 금고 잔액, 창고에 남은 낡은 부품들, 그리고 팔 수 있는 게 뭐가 있을지. 혹시 창고 구석에 처박아둔 낡은 마도구들을 고물상에 넘기면 얼마나 받을 수 있을까. 아니면 최근에 손봐준 마차 수리비를 조금 더 받아낼 방법은 없을까. 머릿속에서 온갖 궁리가 스쳐 지나갔지만, 어느 것도 확실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이라는 말이 이렇게 무겁게 느껴진 건 전생을 포함해도 처음이었다. 최달수 어르신은 도면을 조심스럽게 접어 작업대 서랍에 넣으며 말했다. "일단 필요한 재료 목록을 뽑아보겠습니다. 아가씨는 그동안 자금 쪽을 알아보시지요." "네, 그럴게요." 어르신과 눈이 마주쳤다. 흉터 진 손으로 서랍을 닫는 그 모습이, 어쩐지 전생의 팀장님이 서류를 정리하던 손짓과 겹쳐 보였다. 공방을 나서며, 나는 영지 금고의 잔액을 떠올렸다. 숫자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지만, 절대 넉넉하지 않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아직 몰랐다. 이 재료비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생각지도 못한 사람과 다시 마주치게 될 것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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