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탁한 마석의 마도공학자

5화

위약금 청구가 정식으로 인정된 지 사흘 뒤, 왕도 마도구상단연합에서 새로운 대리인이 청람 변경백작가를 찾아왔다. 지난번 최달수 어르신을 상대로 부당 청구를 시도했던 그 남자였다. 다만 이번에는 표정이 더 날카로웠고, 손에 든 서류철도 더 두꺼웠다. 응접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부터 느껴졌다. 지난번의 여유로운 웃음기는 사라지고, 눈빛만 잔뜩 벼려져 있었다. "이서린 영애." 그가 응접실 소파에 앉으며 서류를 펼쳤다. "지난번 저희 쪽 부품 교체 관련해서, 사기 혐의를 제기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제기가 아니라 사실을 확인했을 뿐입니다." 목소리를 낮게 깔고 대응했다. 상대의 압박에 밀리는 순간, 협상은 끝난다는 걸 전생의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었다. "그 문제로, 저희 상단연합 본부에서 조사를 진행했고요." 남자가 서류를 내 앞으로 밀었다. "결과적으로, 지난 시공 당시 저희 측 기술자가 개인적으로 부적절한 부품을 사용했다는 점이 확인됐습니다." 뜻밖의 인정이었다. 솔직히 조금 놀랐다. 저쪽에서 순순히 잘못을 시인할 줄은 몰랐으니까. 하지만 곧 이어진 말이 문제였다. "다만, 그 기술자 개인의 과실로 판단되어, 저희 상단연합의 손해배상 책임은 제한적입니다. 대신, 이번에 문제가 된 기존 계약 자체를 파기하고, 새로운 계약을 체결하셔야 하는데... 그 위약금이 발생합니다." "위약금이요?" "기존 유지보수 계약 조기 해지에 따른 위약금, 금화 삼십 개입니다." 숨이 턱 막혔다. 사기를 저지른 건 저쪽이었는데, 계약을 해지하려면 오히려 우리가 돈을 내야 한다는 논리였으며, 이런 식으로 조항을 짜놓은 계약서가 애초에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어처구니없었다. ······씨발,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머릿속으로 욕이 튀어나왔지만, 얼굴에는 티를 내지 않았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무릎 위에 얹은 손을 꽉 쥐어 진정시켰다. "계약서 좀 보여주시겠어요." 남자가 서류철에서 원본을 꺼내 건넸다. 작은 글씨로 빽빽하게 적힌 조항들 사이, 제12조에 조기 해지 위약금 규정이 숨어 있었다. 삼 년 전, 아버지가 왕도 상인의 말만 믿고 서명했던 그 계약서였다. 한 줄 한 줄 눈으로 훑어 내려가는 동안, 속에서 뜨거운 것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이건 계약서가 아니라 함정이었다. 처음부터 상대가 나가고 싶어도 못 나가게 만들어 놓은, 정교하게 짜인 덫. "이 조항, 저희 쪽에 불리하게만 되어 있네요." "계약이란 게 원래 그렇습니다, 영애님. 서명하신 이상 유효합니다." 맞는 말이었다. 계약서 자체는 형식적으로 문제가 없었으며, 이걸 뒤집을 방법이 당장은 보이지 않았다. 금화 삼십 개. 지난번 위약금 백이십 개를 받아내는 데 성공했지만, 그 돈은 이미 시제품 제작 자금과 밀린 부채 정리에 대부분 들어간 상태였다. 남은 자금으로는 삼십 개를 채우기도 빠듯했다. 계좌 잔액을 떠올리는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숫자를 계산하는 머릿속이 마치 뜨겁게 달군 철판 위에서 팔딱거리는 느낌이었다. "기한은 언제까지죠?" "보름입니다." 보름. 그 안에 삼십 개를 마련하거나, 새로운 대응 방안을 찾아내야 했다. "검토 후 답변드리겠습니다." "현명한 선택이시길 바랍니다." 남자가 서류를 챙기며 일어섰다. "참고로, 저희 상단연합은 왕도의 거의 모든 마도구 유통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관계 유지하시길 바라겠습니다." 에두른 협박이었다. 앞으로 우리 영지에서 마도구 하나 들여오려면 전부 저쪽 손을 거쳐야 한다는 뜻이었고, 지금 이 자리에서 삐끗하면 그 줄이 아예 끊어질 수도 있다는 경고였다. 남자가 떠난 뒤, 나는 계약서를 다시 펼쳐 조항 하나하나를 뜯어봤다. 제12조뿐 아니라, 다른 조항들에도 비슷한 함정이 숨어 있을 가능성이 컸다. 제7조, 제15조, 제21조까지. 읽을수록 속이 뒤집혔다. 위약금, 손해배상 면책, 분쟁 발생 시 관할 재판소를 왕도로 지정하는 조항까지. 이건 처음부터 우리가 이길 수 없게 짜인 판이었다. "골치 아프게 됐네." 혼잣말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하지만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마침 그때, 최달수 어르신이 응접실 문을 두드렸다. "아가씨, 시제품 규모를 키우는 작업, 자재 계산을 다시 해봤는데요." 어르신이 새 도면을 펼쳤다. 실전 규모로 확대한 관개펌프 설계도였으며, 필요한 마석과 재료의 목록이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종이 위에 그려진 굵은 선들과 세밀한 치수 표기를 보는 순간, 이 사람이 밤을 새워 계산했다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눈 밑에 짙게 내려앉은 그늘이 그 증거였다. "이 정도 규모면, 최소 금화 육십 개는 필요할 것 같습니다." 육십. 거기에 상단연합 위약금 삼십을 더하면, 아흔 개. 영지 금고 잔액을 다 긁어모아도 부족한 액수였다.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렸다. 남은 자금에서 인건비를 빼고, 식량 비축분을 빼고, 겨울 대비 예산을 빼면... 답은 뻔했다. 턱없이 모자랐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절망보다 먼저 뜨거운 승부욕이 올라왔다. 전생에서도 이런 순간이 있었다. 자금이 바닥나고, 빚쟁이가 들이닥치고, 직원들 월급날이 코앞인데 통장에 돈이 없던 그 순간들. 그때마다 나는 포기하지 않고 방법을 찾아냈고, 결국 회사를 다시 일으켰다. 지금도 다르지 않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이번 생에서도 마찬가지다. 돈이 없으면 만들어내면 된다. 판을 못 이기면 판을 새로 짜면 된다. "어르신, 이 시제품 성공한 거, 왕도에 알릴 방법 없을까요?" "판로를 찾으시려는 겁니까?" "네. 우리 영지뿐 아니라, 저순도 마석을 쓰는 다른 변경 지역에도 이 기술이 필요할 거예요. 그걸 팔 수 있다면..." 어르신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거, 저도 젊은 장인들 몇 명 소개해드릴 수 있습니다. 예전에 저와 같이 일했던 이들인데, 요즘 왕도 큰 공방들 밑에서 제대로 대우도 못 받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거든요." 뜻밖의 제안이었다. 일이 한꺼번에 커지는 느낌이었지만, 지금은 무엇이든 붙잡아야 할 상황이었다. "몇 명이나 되나요?" "많으면 다섯, 적으면 세 명 정도. 다들 실력은 확실합니다. 다만 지금 소속된 공방에서 눈치를 볼지도 모르겠습니다." "소개해주세요. 사람이 많을수록 좋아요." "알겠습니다. 다만..." 어르신이 잠시 말을 멈췄다. "이 설계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줘야 할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왕국 표준과 완전히 다른 구조라서, 보는 사람마다 궁금해할 겁니다." 순간 뇌리에 스치는 불안감이 있었다. 이 설계도는 전생의 지식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걸 그대로 보여줬을 때, 누군가가 그 출처를 캐묻고 들어온다면. 그 생각만으로도 손끝이 다시 차가워졌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사람이 필요했고,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죠. 필요한 만큼만 보여줄게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는 이미 어디까지 보여주고 어디까지 숨겨야 할지 선을 긋고 있었다. 그날 밤, 최달수 어르신이 소개해준 장인 후보 명단을 훑어보다가, 문득 왕실 조달감독관 박현우가 연회장에서 마지막으로 던졌던 시선이 떠올랐다. 계약서를 정확히 파악하고 계셨던 겁니까, 라던 그 질문. 단순한 호기심이었을까, 아니면 뭔가를 의심하기 시작한 것일까. 정말 우연일까? 확신할 수 없었다. 명단을 든 손이 가늘게 떨렸다. 촛불이 창가에서 흔들릴 때마다, 명단 위의 이름들이 일렁였다 다시 또렷해지길 반복했다. 다만, 며칠 후 왕실에서 정기 조달 감사 명목으로 청람 변경백작령을 방문할 예정이라는 공문이 도착했을 때, 나는 그 불안이 결코 근거 없는 게 아니었다는 걸 깨닫게 됐다. 공문을 받아 든 손이 순간 얼어붙었다. 정기 감사라니, 이런 시기에. 공문 말미에는 담당관 이름이 적혀 있었다. 박현우.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가 무엇을 확인하려 오는 것인지, 나는 아직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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