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숨겼는데 왜 자꾸 들키냐고

2화

숲에서 병사들에게 이끌려 걸은 지 얼마나 됐을까. 발밑에서 나뭇가지 밟히는 소리가 뚝뚝 끊기며 울렸고, 코끝에는 비 온 뒤의 흙냄새와 말 냄새가 뒤섞여 들어왔다. 병사들은 나를 마치 유리병 다루듯 조심스레 에워싸고 걸었는데, 그게 오히려 더 부담스러웠다. 이봐요, 나 별로 안 무서운 사람인데. 숲을 벗어나자 눈앞에 성이 나타났다. 돌로 쌓은 외벽은 내 키의 몇 배는 됨직했고, 붉은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며 십자 모양 문양을 자랑스레 드러냈다. 【각하의 영지, '이헌 백작가'의 본성입니다.】 "내 영지라고?" 목소리가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영지라니. 아파트 청약도 안 되던 인생인데 갑자기 영지가 생겼다. 대문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그 광경이 낯설어서 순간적으로 등이 굳었다. 이런 대접, 살면서 받아본 적이 없는데. 검은 정복을 입은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눈매가 날카롭고 자세가 흠 없이 곧았다. 걸음걸이 하나에도 절제가 배어 있었는데, 딱 봐도 뭐랄까, 조직의 이인자 같은 인상이었다. "백작님, 무사히 귀환하셨습니까." 목소리에 안도와 반가움이 섞여 있었는데, 나는 이 사람이 누군지 전혀 몰랐다. 미치겠다. 이름도 모르는데 반가워하고 있어. "아, 네. 무사히···왔죠, 네."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티 안 나게 웃어야 하는데 입꼬리가 어색하게 당겨졌다. 【해당 인물은 집사 황태호입니다. 각하의 최측근입니다.】 최측근이라는데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이 몸의 원주인, 진짜 이헌 백작에게는 최측근이었겠지만. ···내 최측근은 아니잖아. 마음속으로 정정했지만 겉으로는 웃어 보였다. 이런 상황에 요령이 생긴다는 게 좀 서글펐다. "그래, 태호. 고생 많았지." 이름을 안 것도 조금 전 커맨드가 알려준 덕이었다. 하늘이 도왔다. 아니, 정확히는 이상한 시스템이 도왔지만, 이 순간만큼은 하늘이라 부르고 싶었다. 황태호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눈썹이 아주 살짝, 정말 눈치채기 힘들 정도로 미세하게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뭔가 이상하다는 눈치였는데, 그때 뒤에서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다각다각다각! 성문 앞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병사들의 어깨가 딱딱하게 굳는 게 눈에 보였다. 귀족원 문양이 박힌 마차가 성문 앞에 멈춰 섰다. 문이 열리고 회색 로브를 입은 남자가 내려섰다. 손에는 두꺼운 서류 뭉치를 들고 있었는데, 그 두께만 봐도 심상치 않았다. 종이 냄새가 이렇게 위협적으로 느껴진 적은 없었다. "이헌 백작이시죠." 말투가 곱지 않았다. 심문하러 온 세무조사관 같았다. 아니, 세무조사관보다 더 지독한, 뭔가 사람 하나 인생을 끝내러 온 듯한 분위기였다. "그런데요." 일단 뻣뻣하게 대응했다. 여기서 기죽으면 끝이다, 라는 감이 왔다. "귀족원 소속 조사관 박현입니다. 최근 목격 보고에 대해 확인할 게 있어서 왔습니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났다. 몸이 저 혼자 반응하는 게 웃겼다. 나는 아직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는데. 【귀족원의 신분 검증 절차입니다. 실패 시 백작위 박탈, 최악의 경우 처형입니다.】 "처, 처형?" 목소리가 갈라져서 나왔다. 침이 바짝 마르고 위장이 대놓고 쪼그라드는 느낌이었다. 조사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식은땀 두 배. 등판이 아예 젖는 게 느껴졌다. 박현이 서류를 펼쳤다. 종이가 사락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첫째, 방금 A등급 마수를 단독으로, 그것도 소환 스킬로 처치하셨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이헌 백작님은 원래 C등급 마법사이셨는데요." 허, C등급이었어? 나는 그런 것도 몰랐는데. "…아, 그게, 요즘 몸 상태가 좋아서." 말하면서도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몸 상태 좋아서 등급이 오른다는 게 어디 있어. 【변명이 지나치게 부실합니다.】 닥쳐, 나도 안다. 박현이 눈을 가늘게 뜨며 계속했다. "둘째," 그가 서류의 다른 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평소와 말투가 다르다는 하급 병사들의 증언이 있습니다." 병사들 쪽을 슬쩍 봤는데, 몇몇이 시선을 피했다. 아, 저놈들이구나. "셋째, 걸음걸이도 다르다는 시녀의 증언이 있습니다." 걸음걸이까지 검사하는 거였냐, 이 세계. 와, 진짜 CCTV보다 더 무서운 게 사람 눈이구나. 걸음걸이 하나까지 다 봤다니. 황태호가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목소리에는 여전히 격식이 배어 있었지만, 그 아래로 무언가 급박함이 느껴졌다. "박현 조사관. 백작님께서는 최근 큰 부상에서 회복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여러 변화가 있을 수 있습니다." 박현이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꾸했다. "부상이라 함은 정확히 어떤." "머리 쪽에 큰 타격이 있었습니다. 기억과 언행에 일시적인 혼란이 올 수 있는 부위였지요." 머리 쪽 타격이라니, 그거 딱 나 얘기 아닌가. 진짜로 이 몸에 들어온 게 머리를 다친 거랑 비슷한 거긴 하지. [백작님, 잠시만 제게 맞춰 주십시오.] 황태호가 나를 향해 눈짓했다.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이럴 때는 무조건 아는 척하는 게 최선이다, 라는 확신이 왔다. "맞습니다. 큰 사고가 있었어요." 목소리에 힘을 실어봤다. 연기력 부족은 여기서 드러나지 말아야 한다. 박현이 미심쩍은 눈으로 나를 훑었다. 그 시선이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스캐너처럼 지나가는 게 느껴졌다. "사고에 대한 기록이 백작가에 남아있습니까." "어, 그건 태호가 알아서··· 아니, 잘 알고 있습니다." 황태호가 재빨리 받았다. "영지 내 신관에게 치료받은 기록이 있습니다. 필요하시면 열람하실 수 있도록 문서를 준비해 두겠습니다." 박현이 잠시 말이 없었다. 서류를 뒤적이는 소리만 들렸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신분 확인용 마력 서약을 해주시겠습니까. 백작가 문장에 손을 올리시면 됩니다." 등 뒤에서 황태호가 내 손을 살짝 잡아끌었다. 손바닥에 뭔가 쓰인 걸 보고 있으니 감이 왔다. 저기에 손을 대면 뭔 일이 생기는데, 그 순간 몰래 하라는 신호였다. 무슨 신호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태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느껴져서 나도 덩달아 심장이 뛰었다. 나는 문장에 손을 얹었다. 돌이 차갑다가 이내 온기가 올라오는 게 손바닥으로 전해졌다. 지지직. 손바닥이 뜨거웠다. 문장이 붉게 빛나다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 짧은 순간, 나는 정말로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만약 이게 실패하면, 그 순간 여기서 재가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혈통 인증 성공. 이헌 백작가의 정당한 계승자로 확인됩니다.】 다행히 이 몸이 진짜 이헌이었으니 통과된 거였다. 만약 아니었으면 지금 여기서 재가 됐을 수도. 살았다. 몸속 어디선가 안도의 물결이 확 퍼지는 게 느껴졌다. 박현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서류를 접었다. 얼굴에 실망 비슷한 게 스쳤는데, 아마 뭔가 걸리는 걸 찾아내지 못해서 그런 모양이었다. "…확인됐습니다. 다만 소환 스킬의 갑작스러운 발현은 귀족원 상부에 보고할 겁니다. 조만간 다시 뵙지요." "네, 조심히 가세요." 인사말이 너무 평범하게 나왔다. 조사관한테 조심히 가라니, 이게 무슨 말버릇이야,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지만 박현은 별 반응 없이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가 떠나는 것을 보며 나는 무릎이 풀리는 걸 참았다. 다각다각다각, 소리가 멀어지고 나서야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휴우." 숨을 길게 내뱉었다. 그 한숨에 방금 겪은 모든 긴장이 다 담겨 있는 것 같았다. 황태호가 나를 향해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가고, 눈가에 잔주름이 살짝 잡혔는데, 그 미소가 좀 이상했다. 아까랑은 다른 사람 보듯이 나를 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아는 사람을 확인하는 눈빛이 아니라, 낯선 무언가를 살피는 눈빛이었다. 등줄기가 다시 서늘해졌다. 방금 조사관 앞에서는 통과했는데, 이번엔 다른 관문이 남아있는 건가. "백작님, 정말로 백작님이십니까?" ······들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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