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숨겼는데 왜 자꾸 들키냐고

3화

황태호는 성 안쪽 응접실로 나를 데려갔다. 돌바닥에 깔린 붉은 카펫이 발소리를 삼켰고, 복도를 지나는 동안 벽에 걸린 초상화들이 하나같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게 다 전 백작님인가. 눈매가 사나운 초상화도 있고, 검을 든 채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초상화도 있었다. 아무도 웃고 있지 않았다. 이 집안 가풍이 원래 이런 건가 싶었다. 응접실 문을 열자 벽난로 불빛이 은은하게 방을 채우고 있었다. 장작 타는 냄새와 낡은 가죽 냄새가 뒤섞여 코끝을 스쳤다. 낡은 가죽 소파가 두 개 놓여 있었는데, 앉는 순간 삐걱 소리가 나서 나는 살짝 몸을 굳혔다. 이 몸 무게가 소파를 못 견디는 건가, 아니면 소파가 원래 이 지경인가. "앉으시죠." 존댓말인데 명령이었다. 나는 얌전히 앉았다. 황태호는 맞은편에 앉지 않고 벽난로 옆에 선 채로 나를 내려다봤다. 그 자세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뭔가 심문 받는 기분이었다. "방금 문장 인증까지 통과하지 않았습니까?" "통과했죠. 그런데 백작님 말투는 여전히 다릅니다." ···귀신같이 눈치가 빠르네, 이 사람. 숨기려던 게 있는데 다 들킨 기분이었다. 어차피 여기서 도망칠 곳도 없었다. 창밖을 봐도 어디가 어딘지 모르는 낯선 성, 낯선 하늘. 도망쳐봤자 길 잃고 굶어 죽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실은 좀 이상한 일이 있었습니다." 나는 사고, 죽음, 그리고 낯선 이 몸으로 눈을 뜬 순간까지 전부 털어놓았다. 말하는 내 목소리가 스스로 들어도 미친 소리 같았다. 트럭에 치인 것부터 시작해서, 정신 차려보니 이 몸이었다는 얘기까지 하는 내내 황태호의 얼굴에서 표정 변화를 찾으려 했지만 없었다. 완벽하게 평온한 얼굴. 이게 훈련된 표정인지 원래 이런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 황태호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다 들었다. "…혼이 바뀌셨다는 말씀이시군요." "믿어요, 이걸?" "이 세계엔 그보다 더 이상한 일도 흔합니다." 의외로 담담했다. 나는 순간 맥이 빠졌다. 이렇게까지 순순히 받아들여지면 오히려 사람이 불안해진다. 뭔가 반박이라도 해야 정상 아닌가. 【사실 저희도 조금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문이 열리며 여자 한 명이 들어왔다. 백금색 긴 머리가 등허리까지 흘러내리고, 나이는 20대 후반쯤인데 눈빛이 서릿발처럼 단단했다. 걸음걸이가 조용했다. 발소리가 거의 나지 않는 게 훈련된 몸짓이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백작님, 무사 귀환을 축하드립니다."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하는 자세가 흠잡을 데 없었다. 각도, 시선, 손끝의 위치까지 하나같이 정확했다. 이런 인사를 받아본 적이 없어서 나는 순간 어디를 봐야 할지 몰라 시선을 헛돌렸다. 【메이드장 윤슬아입니다.】 이번엔 커맨드가 먼저 알려줬다. 학습 효과인가. 아까는 백작 얼굴도 못 알아봐서 애먹었는데, 이번엔 친절하게 이름표까지 붙여준다. 이 시스템, 일 처리가 은근히 즉흥적이다. "슬아, 오랜만이네." 대충 던진 인사였는데 윤슬아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그 미묘한 흔들림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뭔가 잘못 말했나? "…백작님께서 저를 그렇게 편하게 부르신 건 오랜만입니다." 뭔가 사연이 있는 말투였다. 원래 이헌은 부하들과 거리를 뒤로 뒀던 모양이다. 나는 그 사정까지는 알 도리가 없었지만, 일단 분위기를 맞췄다. "몸이 좀 편해져서 그런가 보다." 적당히 둘러댔다. 윤슬아가 살짝 웃었다. 그 웃음이 진짜 안심한 얼굴이었다. 웃는 얼굴을 보니 아까까지의 서릿발 같던 눈빛이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이 사람, 원래 백작한테 정이 깊은 모양이다. 나는 괜히 죄책감이 들었다. 나는 그 사람이 아닌데. 황태호가 이 상황을 정리하듯 말했다. "백작님, 슬아에게도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야겠지." 두 번째로 사연을 설명하는 건 조금 덜 힘들었다. 어차피 한 번 해봤다고 익숙해지는 게 인간이다. 나는 이번엔 조금 더 담백하게, 사고와 죽음과 눈을 뜬 순간을 요약해서 말했다. 첫 번째보다 문장이 훨씬 짧아졌다. 윤슬아는 듣는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마지막에 딱 한마디만 했다. "저희에겐 백작님이 어떤 분이시든, 지켜야 할 분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 말이 이상하게 뭉클했다. 낯선 세계에서, 낯선 이름으로, 처음으로 누군가가 나를 지켜주겠다고 말해준 순간이었다. 벽난로 불빛이 그녀의 옆얼굴에 어른거렸고, 나는 잠깐 말을 잃었다. 회사에서 야근하다 쓰러져도 아무도 안 물어봐주던 인생이었는데, 여기서는 처음 만난 사람이 이렇게 말해준다. 【감동적인 장면입니다만, 각하께서는 아직 이 세계의 규칙을 전혀 모르십니다.】 분위기 깨는 데는 도가 텄네, 이 시스템. 감성 팔이 하려는데 꼭 이렇게 초를 친다. "…그래, 알아야지. 뭘 알아야 되는 건데." 【첫째, 이 세계는 마수의 위협 아래 존재합니다. 국가는 5년마다 각 영지에 토벌 마감 기한을 부여합니다.】 "5년? 지금 몇 년 차인데." 【이헌 백작가는 3년째 토벌 실적이 저조하여 이번 해가 마지막 기회입니다.】 갑자기 위장이 뒤틀렸다. 회식 자리였으면 여기서 소주 한 병은 더 시켰을 거다. 아니, 소주가 아니라 이건 소맥으로도 안 풀리는 소식이었다. 마감 기한, 그것도 마지막 기회라니. 회사에서 프로젝트 마감 놓쳐서 상무한테 불려간 게 제일 무서운 일이었는데, 여기선 마감 못 채우면 뭐가 어떻게 되는 건지 감도 안 왔다. 황태호가 침중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저조한 이유는… 전 백작님이 무리한 토벌 중 큰 부상을 입으셨기 때문입니다." 이 몸이 죽지 않고 살아있던 건 순전히 운이었다는 얘기다. 그 자리에 내 영혼이 우연히 들어온 것이고. 나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부상 입고 죽어가던 몸에 굴러 들어온 게 나였다는 거잖아. 이거 원래 몸 주인은 지금 어디 있는 건지, 그런 생각까지 들자 머리가 아파왔다. 일단 그 생각은 접어두기로 했다. 지금 당장 풀 수 없는 문제였다. "둘째," 커맨드가 이어갔다. 【각하께서 사용하신 소환 스킬은 '가챠 코인'이라는 자원을 소모합니다. 현재 잔량 10매입니다.】 "코인이 열한 갠데 하나 썼으니 열 개 남았단 거지?" 【정확합니다. 각하께서는 학습이 빠르십니다.】 칭찬은 고마운데 왜 로봇 톤으로 하냐. 그것도 딱 문제 없이 계산기 두드리는 소리로. 뭔가 감정 하나도 안 섞인 칭찬을 들으니 오히려 더 기분이 이상했다. "셋째," "또 있어?" 【코인은 재충전되지 않습니다. 신중히 사용하시길 권장합니다.】 재충전이 안 된다는 말에 나는 순간 손이 떨렸다. 게임이었으면 현질하면 그만인데, 여긴 그런 게 없다는 거잖아. 한 번 쓰면 끝. 무슨 목숨 걸린 뽑기냐. "그러니까 결론은, 코인 열 개로 마감 기한 안에 마수 토벌 실적을 채워야 한다는 거네." 【정확한 이해입니다.】 윤슬아가 조용히 한마디를 덧붙였다. "백작님, 그래도 이제는 예전보다 훨씬 강해지셨습니다. 저희 모두 함께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존댓말로 다정하게 말하는데, 나는 속으로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강해진 건 나가 아니라 이 몸이랑 뭉치잖아. 그런 말은 굳이 하지 않기로 했다. 이미 충분히 복잡한 하루였으니까. 황태호가 벽난로 앞에서 몸을 돌려 나를 바라봤다. 그 눈빛에 아까와는 다른 무게가 담겨 있었다. "백작님, 하나 더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또 뭔데." 불안했다. 이 사람이 저 말투로 뭔가를 꺼낼 때마다 좋은 소식이 없었다는 걸 나는 이미 눈치로 알고 있었다. 황태호가 입을 열려는 순간, 응접실 문 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쿵쿵쿵. 누군가 계단을 뛰어 올라오는 소리였다. 윤슬아의 눈빛이 순식간에 다시 서릿발처럼 굳었다. 방금까지 다정하게 웃던 얼굴과는 완전히 다른 표정이었다. 문이 벌컥 열렸다. 숨을 몰아쉬는 병사 하나가 문턱에 서서 나를, 아니 이헌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백작님! 북쪽 경계선에서 마수 무리가 발견됐습니다!" 방금까지 벽난로 불빛에 노곤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나는 소파에서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아직 이 몸으로 검 한 번 잡아본 적도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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